‹ 목록으로 혼약파기? 가문은 지킵니다

5화

박씨 부인의 경고를 들은 후로 나는 매일 아침 학당에 갈 때마다 주변을 살피는 습관이 생겼다. 골목 어귀에서 한 번, 학당 정문에서 한 번, 강의실 문 앞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 마치 게임에서 미니맵 켜놓고 적 캐릭터 위치 확인하는 것처럼, 나는 서은채의 붉은 댕기가 시야에 걸리는지부터 확인하는 게 하루 시작 루틴이 됐다. 다행히 서은채는 당분간 눈에 띄지 않았고, 그 덕분에 나는 오랜만에 조용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폭풍 전 고요라는 말이 딱 이런 느낌이겠거니 싶었지만, 일단 지금 당장은 조용해서 좋았다. 사람이 매일 전투 모드로 살 수는 없는 거니까. 부친 강도윤은 그즈음 나를 본가에 정식으로 소개하는 서신을 올렸다. 무영술 각성이라는 소식이 본가 어르신들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매일 서재에 앉아 내 영술 수련 일정을 짜고,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영술 서적들을 잔뜩 구해다 안겨줬다. 책상 위에 쌓인 서책들의 높이가 날이 갈수록 올라가는 걸 보면서, 나는 이게 무슨 수능 대비 문제집 증정 이벤트인가 싶었다. "이 책은 무영술 계열의 기초 원리를 다룬 거다. 이건 감정 조율에 관한 것이고, 이건 호흡법이다." "아버지, 이걸 다 언제 읽어요." "학당 남은 학업 기간이 일 년이다. 그 안에 최소한 명예는 되찾아야 하지 않겠느냐." 일 년.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묘하게 마감 기한 같은 느낌을 받았다. 회사에서 프로젝트 기한 통보받던 그 감각이랑 똑같았다. 팀장이 "이번 달 안에 끝내야 합니다" 하던 그 목소리가 아버지 목소리에 겹쳐 들렸다면 믿을까. 다만 이번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실패하면 회사가 아니라 가문 전체가 무너진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야근 수당도 없고, 퇴사도 불가능한 프로젝트라는 점도. "알겠어요. 해볼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책 두께를 가늠하며 한숨을 삼켰다. 그래도 별수 있나. 여기서 안 하면 굶어 죽거나 맞아 죽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날 이후 나는 규칙적인 하루를 살기 시작했다. 아침엔 학당 수업, 오후엔 뒤뜰에서 영술 수련, 저녁엔 박씨 부인과 우물가에서 영기 음식을 만들며 소소한 대화를 나눴다. 처음으로 이 세계에서 안정된 리듬이 생겼다. 시계도 없는 세상인데 몸이 알아서 시간을 쟀다. 해가 어디쯤 걸리면 수련 끝낼 시간, 우물가에 물동이 소리 들리면 저녁 준비할 시간. 캠핑장에서 며칠 지내다 보면 자연스레 해 뜨고 지는 시간에 몸이 맞춰지듯이. 뒤뜰 텃밭에는 언젠가부터 내가 심어놓은 채소들이 자라기 시작했다. 영기를 살짝 흘려보내면 배추가 유독 빨리 크는 걸 발견하고는, 나는 그걸 취미처럼 반복했다. 처음엔 그냥 심심해서 해본 거였는데, 시들시들하던 잎이 손끝 영기 몇 번에 초록빛을 되찾고 통통하게 부풀어 오르는 걸 볼 때마다 묘한 쾌감이 있었다. 남들 눈엔 그저 소일거리로 보였겠지만, 나에게는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손에 잡히는 성취였다. 무영술이니 명예 회복이니 다 손에 안 잡히는 것들뿐인데, 배추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고 심지어 된장국에 넣어 먹을 수도 있었다. "아가씨 텃밭 배추가 옆집보다 두 배는 크더군." 박씨 부인이 웃으며 말했을 때, 나는 진심으로 뿌듯했다. 명예 회복이니 가문 신용이니 하는 거창한 목표들 사이에서, 배추가 크게 자란다는 사실이 이렇게 마음을 편하게 해줄 줄은 몰랐다. 사람이 큰 목표만 보고 살면 지친다. 작은 성취 하나씩 쌓아가는 게 답이다, 라는 걸 배추한테 배웠다면 누가 믿어줄까. "다음엔 무 심어볼까요." "무는 땅이 깊어야 하는데. 아가씨 영기면 뭐, 그것도 될 것 같긴 하네." 박씨 부인은 그렇게 말하며 또 웃었다. 그 웃음이 요즘 내가 버티는 데 은근히 큰 몫을 했다. 동급생들 사이에서도 조금씩 분위기가 바뀌었다. 여전히 서은채가 퍼뜨린 소문을 믿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몇몇은 대놓고 내 편을 들어줬다. "서연이가 그럴 애가 아니라는 거, 우리가 제일 잘 알잖아." "맞아. 이현우 공자님이 오히려 이상한 거지." "소문이라는 게 원래 처음 낸 사람이 제일 의심스러운 거 아니겠어?" 그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오해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 생각보다 큰 힘이 됐다. 편의점에서 우연히 아는 얼굴 만난 것 같은, 그런 작은 반가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박씨 부인이 우물가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물동이를 내려놓는 손길부터 평소와 달랐다. 평소라면 물 튀는 소리에 장난스러운 잔소리가 따라붙었을 텐데, 이번엔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아가씨, 오늘 본가 쪽에서 전언이 왔는데." "무슨 전언인데요?" "이씨 호위가 쪽에서... 곧 큰 행사를 연다더군. 요마 토벌군 위로 잔치라는데, 아무래도 서은채가 그 자리에 초청받은 모양이야." 나는 순간 손끝의 영기가 살짝 흔들리는 걸 느꼈다. 요마 토벌군 위로 잔치라면, 이현우와 그 집안이 주최하는 자리일 텐데. 서은채가 그 자리에 초청받았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냥 동급생 신분으로 초청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뜻이었으니까. "그거, 아무나 초청받는 자리예요?" "아니지. 그 잔치는 원래 유력 가문들만 부르는 자리인데." "그럼 서은채네가 갑자기 유력 가문이 됐다는 거예요?" 박씨 부인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게 더 불안했다. "그리고 하나 더." 박씨 부인이 목소리를 낮췄다. 우물가 특유의 물소리 사이로 그 목소리가 더 무겁게 들렸다. "그 잔치에... 아가씨네 가문도 초청장이 올 거라는 이야기가 있어."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에 쥐고 있던 물바가지가 가늘게 떨렸다. 아직 다 아물지 않은 상처 위로, 뭔가 새로운 폭풍이 다가오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배추 키우면서 겨우 되찾은 이 평화가,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지 나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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