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궁 안이 온통 꽃향기로 뒤덮인 날이었다.
청하국 왕궁 정전 앞뜰에는 대현제국에서 보내온 홍매화 화분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고, 시녀들은 그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마지막 점검을 했다. 화분 하나를 옮기던 시녀가 발을 헛디뎌 잎사귀를 떨어뜨렸고, 상궁이 매섭게 눈치를 주자 허둥지둥 주워 담았다.
'저러다 화분 깨겠네.'
나흘 뒤면 나는 이 나라를 떠난다.
대현제국의 태자, 이현의 태자비가 되어서.
'열두 살 때부터 기다린 날이 코앞이네.'
손끝이 떨렸다. 긴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건 그냥 긴장이 아니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치맛자락을 슬쩍 문질러 닦았다.
"서인 왕녀님,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상궁의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옷매를 다시 정돈했다. 옷깃을 두 번, 세 번 매만졌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는 건 아닌데도 손이 자꾸 그쪽으로 갔다.
아버지 윤정후 왕이 갑작스레 나를 찾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평소 정무도 신하들에게 미루기 바쁜 분이, 이 결혼 준비에는 유독 발이 빨랐다.
'이상해. 진짜 이상하다니까.'
혼담이 나온 건 반년 전이었다. 대현제국 쪽에서 먼저 사신을 보내왔고,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바로 승낙했다. 신하들의 반대도, 나의 의견도 묻지 않고.
왕은 보통 이런 큰 결정에 뜸을 들이는 법인데, 이번만큼은 마치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서둘렀다. 심지어 예단 목록까지 사흘 만에 확정 지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나조차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시집보내고 싶었어요, 아버님?'
정전으로 가는 복도는 길었다. 걸음마다 상궁의 뒤를 따르며 나는 속으로 오늘 만날 대화의 전개를 미리 짜 봤다. 준비는 잘 되어 가느냐, 물으실 거고. 나는 네, 라고 답할 거고. 그다음엔 뭘 물으실까.
정전에 들어서자 아버지가 서류를 보다가 나를 힐끗 올려다봤다. 촛대의 불빛이 종이 위에서 흔들렸다.
"준비는 잘 되어 가느냐."
"네, 아버님. 이번에도 상궁들이 애써주고 있습니다."
"그래. ……잘 됐구나."
말끝이 이상하게 흐려졌다. 잘 됐다는 말에 안도라기보다는 안심이 묻어 있었다. 마치 뭔가 큰 짐을 던 사람처럼.
'뭘 그렇게 안심하는 건데요, 아버님.'
나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자란 덕에 이런 미세한 변화는 본능처럼 읽혔다. 정치적 소양은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지긋지긋하도록 가르쳐 준 것이었고, 통찰력은 그 뒤로 혼자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다듬은 것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궁 안의 시선은 늘 두 방향으로 갈렸다. 언니 아영에게 쏠리는 감탄의 시선과, 나에게 향하는 무심한 시선. 그 차이를 견디는 법을 배우느라 십 년이 걸렸다.
아버지는 서류를 덮으며 화제를 돌렸다.
"태자와는 서신을 자주 주고받았다지."
"네. 벌써 십 년째입니다."
십 년.
열두 살 때 청하국을 방문한 대현제국 사신단 속에서 처음 그를 봤다. 열여섯의 이현은 이미 또래보다 훤칠하고 서늘한 눈매를 가진 소년이었다. 그날 그는 어린 나를 향해 딱 한 번, 아주 짧게 웃어주었다.
'그 웃음 하나로 십 년을 버텼지, 참.'
서신 왕래는 그 뒤로 계속됐다. 정략적인 안부와 정세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지만, 나는 그 문장 하나하나에서 그가 나를 배려하고 있다고 믿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쪽 궁의 날씨를 물어주는 문장 하나, 내 건강을 염려하는 짧은 한 줄. 그게 다였는데도 나는 그 편지를 몇 번씩 다시 읽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정말 그랬던 걸까.
지금 생각해보면 참 우스운 일이다. 열두 살짜리가 받은 편지 한 통에 인생을 걸다니. 그런데 그때는 그게 전부였다. 궁 안에서 나를 봐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까.
"태자가 곧 도착할 거다. 결혼식 전에 미리 인사를 나누고 싶다더구나."
그 말에 심장이 살짝 뛰었다. 결혼식 전에 따로 만나자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태자쯤 되는 사람이 격식을 무시하고 미리 얼굴을 보이겠다니, 그것도 나쁘지 않은 신호였다.
'설레발치지 마, 윤서인. 그냥 격식일 수도 있잖아.'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이미 벌써 달뜨고 있었다. 정전을 나서는 발걸음이 평소보다 가벼웠다는 걸 인정하기는 싫지만, 사실이었다.
상궁이 뒤에서 따라오며 조심스레 물었다.
"별궁 정원으로 준비할까요, 왕녀님?"
"그래주세요."
"옷은 어느 걸로……"
"평소대로 해주세요. 너무 꾸민 것처럼 보이면 안 되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이미 어떤 색이 나을지 세 번쯤 갈아엎었다.
'아니, 뭐 대단한 자리도 아닌데 왜 이렇게 신경 쓰냐.'
그날 오후, 나는 별궁 정원에서 이현을 만났다.
그는 여전히 서늘한 눈매를 가지고 있었지만, 예전보다 훨씬 다듬어진 태로 웃었다. 키가 더 자랐고, 어깨도 넓어졌다. 십 년 전 소년의 얼굴이 어른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는데, 그 변화가 낯설면서도 반가웠다.
격식에 맞춘 인사가 오갔고, 짧은 대화가 이어졌다.
"오랜만입니다, 서인 왕녀."
"오랜만입니다, 태자 전하."
형식적인 인사였지만 나는 그 안에서도 뭔가를 읽으려 애썼다. 목소리의 높낮이, 시선의 방향, 손짓의 속도.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는 시간이 짧았다.
'왜 눈을 잘 안 마주치지.'
긴장한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나는 애써 첫 번째 쪽으로 생각을 밀어붙였다. 그도 나름 떨릴 수 있으니까. 태자라고 해서 감정이 없는 건 아니니까.
대화는 계속됐다. 결혼식 절차에 대한 이야기, 대현제국의 궁 생활에 대한 짧은 설명. 그는 말을 예의 바르게 이어갔지만, 어딘가 정해진 대본을 읽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대화 중간, 정원 저편에서 언니 아영이 시녀들과 함께 걸어오는 게 보였다. 절세의 미녀라는 평을 듣는 언니는 그날도 유독 눈에 띄었다. 걸음걸이마다 치맛자락이 부드럽게 흔들렸고, 지나가는 시녀들이 힐끗힐끗 눈을 돌릴 정도였다.
그 순간, 이현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그쪽으로 움직였다.
0.3초쯤이었을까.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뭐지.'
등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그건 단순한 눈길이 아니었다. 낯선 사람을 대할 때의 흔한 호기심도 아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뭔가를 확인하는 눈빛 같았다.
나는 그 눈빛의 온도를 알았다. 사람이 익숙한 것을 볼 때 짓는 눈빛. 새로운 걸 보고 놀라는 게 아니라, 이미 아는 걸 다시 확인하는 눈빛.
나는 애써 태연한 얼굴로 다시 그를 바라봤다. 그는 이미 시선을 거두고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그 웃음이 오히려 더 이상했다.
"결혼식이 기대됩니다."
다정한 말투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등골이 서늘한 걸까.
'그럴 리 없어. 그냥 착각이야.'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십 년을 기다린 날이 나흘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이상한 촉을 세워봤자 좋을 게 없었다. 나는 애써 웃으며 화제를 돌렸고, 그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받았다. 겉으로 보기엔 완벽하게 다정한 한 쌍이었을 거다.
인사를 마치고 그가 자리를 뜨는 순간까지도 나는 그 눈빛을 곱씹었다. 걸어가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나는 애써 다른 생각을 떠올리려 했다. 결혼식 예복, 대현제국 궁의 풍습, 앞으로 배워야 할 예법들. 그런데 자꾸만 그 0.3초가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그날 밤, 나는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대현제국 사신단의 숙소에서는 늦게까지 불빛이 꺼지지 않았고, 낮에 얼핏 스쳤던 시녀들의 대화 한 조각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아영 왕녀님 쪽이 더 어울리시지 않았을까요."
"쉿, 말조심해."
지나가며 흘려들은 말이었다. 그때는 그냥 시녀들의 실없는 수다라고 넘겼다.
그런데 지금 다시 떠올려 보니, 그 말이 이상하게 목에 걸린 가시처럼 자꾸 신경을 긁었다.
나는 침상에 누워 눈을 감았다. 잠은 오지 않았고, 대신 낮에 봤던 이현의 눈빛과 아버지의 이상하게 흐려진 말끝이 번갈아 떠올랐다. 두 개의 조각이 어딘가에서 맞물리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설마.'
나는 그 생각을 애써 지웠다. 나흘 뒤면 나는 태자비가 된다. 십 년을 기다린 결과다. 지금 와서 흔들릴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창밖의 불빛이 꺼지지 않는 걸 지켜보며, 나는 이상하게도 자꾸만 그 불빛 아래에서 누군가 은밀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