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폐하, 바람은 곤란합니다

2화

5년 전, 나는 열네 살이었다. 설란국과 대붕국 사이의 국빈 방문 행사였다. 대붕국의 왕태자였던 한도현이 우리 왕궁을 방문했다. 나는 언니들 뒤에 서서 그저 예를 갖추기만 하면 되는 자리였다. 사실 그날 내가 거기 있었던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원래는 셋째 언니가 서야 할 자리였는데, 언니가 감기에 걸려서 대신 내가 섰던 거였다. 그 우연이 내 인생을 통째로 바꿔놓을 줄, 그때는 몰랐지. 행사장은 지루했다. 어른들의 인사가 끝없이 이어졌고, 나는 발이 아파서 몰래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그때 그가 나를 보고 굳었다. "저 아이는 누굽니까." 낮고 단단한 목소리였다. 행사장 전체가 순간 조용해졌던 걸 기억한다. 오빠 이준서가 곤란한 표정으로 웃었다. "제 동생, 이서린입니다." "약혼자가 있습니까." "…예? 아직은 없습니다만." "내가 그 자리를 청하겠습니다." 그때 나는 어렸고, 그게 얼마나 이상한 말인지도 몰랐다. 그저 놀라서 아버지 얼굴을 쳐다봤던 기억뿐이다. 아버지는 웃고 있었는데, 그 웃음이 기쁨인지 당혹인지 구별이 안 됐다. 어머니는 아예 표정이 없었다. 나중에 알았다. 그 자리에서 어머니는 이미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계산하고 있었다는 걸. 5년이 지나서야 알았다. 그 순간이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놨다는 걸. 도현에게는 이미 정혼자가 있었다. 청명 공작가의 김도윤. 어릴 때부터 정해진 혼약이었다고 했다. 두 집안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맞춰놓은 자리였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런데 그는 나를 본 순간 그 약혼을 깼다. "파혼하겠습니다." 그 한 문장으로, 도윤은 버려졌다. 나는 그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내가 그의 자리를 대신하게 됐다. 도윤이라는 사람이 그 소식을 듣고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나는 상상조차 하지 않으려 애썼다. 애써 눈을 감았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배려였으니까. 어머니는 그 소식을 듣고 나를 불러 앉혔다. 방 안 공기가 유독 무거웠던 걸 기억한다. "서린아. 이건 네가 선택한 일이 아니야. 하지만 이제부터는 네가 감당해야 할 일이다." "저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데요." "그러니까 배워야지. 왕비란 자리는 사랑받는 자리가 아니라 책임을 지는 자리야. 명심해라. 감정에 휘둘리면 그 나라가 흔들린다." 그때는 그 말이 그렇게 무겁게 다가오지 않았다. 열네 살짜리한테 '나라가 흔들린다'는 말이 뭐 그리 실감 나겠어.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도현이 얼마나 변덕스러운 사람인지. 어쩌면 그날 파혼당한 도윤을 보면서, 언젠가 내 차례도 오리라는 걸 예감했던 게 아닐까. 결혼이 정해진 후 도현은 매년 설란국을 찾아왔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매번 선물을 한아름 안고 와서 내 앞에 무릎을 꿇듯 앉았다. 어떤 해에는 대붕국에서만 나는 붉은 옥가락지를 가져왔고, 또 어떤 해에는 직접 골랐다는 서책을 한 무더기 안고 왔다. 내가 읽지도 않을 걸 알면서도 그는 꼭 그랬다. "서린아, 5년만 기다려줘. 그때는 반드시 데리러 올 거야." 그 말을 할 때마다 눈이 너무 뜨거워서, 나는 매번 시선을 피했다. 열대여섯의 나는 그 뜨거움이 무섭기도, 설레기도 했다. 친구들은 부러워했다. 나라 하나를 통째로 가진 왕태자가 저렇게 애타게 매달린다니, 그게 얼마나 대단한 사랑이냐고. 나도 한때는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 뜨거움이 언제까지 갈지는, 아무도 보장할 수 없다는 걸. 사람의 눈빛이 뜨겁다고 해서 그게 영원히 뜨거우리라는 보장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나는 이 결혼 앞에서 결심했다. 사랑을 바라지 않기로. 그저 왕비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 그거면 충분하다고. 사랑을 기대하는 순간 나는 도윤이 겪었던 걸 똑같이 겪게 될 테니까. 어차피 사랑이란 게 오래가는 걸 본 적이 없으니까. 내 앞에서 파혼당한 사람이 산 증거인데, 뭘 더 기대해. "서린아." 문가에 선 도현이 낮게 내 이름을 불렀다. 회상에서 빠져나온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심장이 괜히 한 번 쿵 내려앉았다. 5년을 기다린 결혼식이 끝나고 처음 마주하는 자리라는 걸, 몸이 먼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는 결혼식 때와 다른 사람 같았다. 예복을 갈아입고 온 그는 어깨의 힘을 다 뺀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굳어 있던 표정은 사라지고, 눈에는 뭐라 설명하기 힘든 열기가 서려 있었다. 저 눈빛, 5년 전 그날부터 봐온 눈빛이었다. 변한 게 없어서 오히려 이상했다. "많이 기다렸지."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손이 따뜻했다. 예상보다 훨씬. "오늘부터 여기가 네 집이야. 필요한 게 있으면 다 말해. 뭐든 다 해줄 테니까." 뜻밖이었다. 이렇게까지 다정할 줄은 몰랐는데. 결혼식 내내 무표정하게 옆자리를 지키던 사람이라, 나는 오늘 밤도 그저 형식적인 인사만 나누고 헤어질 줄 알았다. "감사합니다, 폐하." 형식적으로 대답했는데, 그는 그 대답이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폐하라고 하지 말라니까. 우린 부부잖아."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도현이라고 불러." 국왕을 이름으로 부르라고? 이 궁 사람들이 다 듣는데? 지나가는 시녀들도, 문밖의 호위무사들도 다 들을 텐데, 그걸 감당하겠다는 건가. 하지만 그는 진심인 것 같았다. 눈빛에 장난기 하나 없었다. 소영이 뒤에서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 표정이 딱 내 심정이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냐'는. "네, 도현." 어색하게 그 이름을 불렀는데, 도현의 표정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아이처럼 좋아하는 얼굴이었다. 왕이 저런 얼굴을 지어도 되는 건가, 잠깐 딴생각이 들 정도였다. "좋다." 그가 웃었다. 그 웃음이 5년 전 그날의 얼굴과 겹쳐졌다. 열네 살의 나를 보고 굳어버린 소년의 얼굴이, 열아홉의 나를 보고 웃는 지금의 얼굴 위로 겹쳐 보였다. 신기했다. 사람이 저렇게 오래 똑같은 표정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게. 그날 밤, 그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짧게 몇 마디를 나눈 뒤 정무가 남았다며 자리를 떴다. 문 앞에서 한 번 더 돌아보더니, "일찍 자."라는 말을 덧붙이고서야 정말로 갔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잠깐 멍했다. 방금 그거, 왕이 신하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 정말 남편이 아내를 대하는 태도였잖아. 문이 닫히자 소영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다정하시네요." "그러네." 나는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불안했다. 다정한 사람이 변덕스럽지 않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를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도윤이라는 이름의 그 사람도, 한때는 도현에게 저런 다정함을 받았을 테니까. 그 다정함이 얼마나 갔는지, 나는 정확히 알고 있다. 단 한 번의 만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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