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폐하, 바람은 곤란합니다

4화

"무슨 일이에요?" 은주는 잠시 주저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요 며칠 청암 백작가의 별궁에 자주 드나드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청암 백작가. 소하의 가문이었다. 나는 표정을 최대한 담담하게 유지했다. 손끝이 살짝 떨리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찻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속으로는 어이가 없었다. 결혼한 지 며칠도 안 됐는데. 결혼식 날, 도현은 내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었다. "5년을 기다렸다. 이제 곁에 두고 지킬 거다." 지킬 거라고? 지금 지키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다른 여자의 별궁 담벼락인 것 같은데. "확실한 정보인가요?"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하게 나왔다. 다행이었다. "시녀들 사이에 도는 이야기라, 확실치는 않습니다. 하지만 폐하의 마차가 밤늦게 그쪽으로 향하는 걸 본 병사가 있다고 합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은주가 고개를 숙이고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그 발걸음이 유난히 조심스럽다고 생각했다. 나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늘 저런 걸음으로 걷는다. 은주가 나간 뒤, 나는 창가에 앉아 오래 생각에 잠겼다. 5년을 기다려서 데리러 오겠다던 사람이,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른 여자의 별궁을 드나든다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화가 나기보다는, 그냥 그럴 줄 알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왜였을까. 처음부터 기대를 안 해서였을까. 아니면 이 결혼이라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허울이라는 걸 알고 시작했기 때문일까. 밖에서는 정원사가 낙엽을 쓸어 담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각, 사각. 그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게 신기하게도 마음을 가라앉혔다. 세상이 이렇게 뒤집어지는 와중에도 낙엽은 계속 떨어지고, 정원사는 계속 그걸 쓸어 담는다. 다음 날, 나는 직접 확인해보기로 했다. 무작정 캐묻는 건 의미가 없으니, 은주에게 부탁해 그날 밤 도현의 동선을 조용히 알아봐 달라고 했다. "위험한 일은 하지 마세요, 왕비마님." 은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당부했다. "위험할 게 뭐가 있어요. 그냥 창밖 보는 건데." 내 대답에 은주는 뭔가 더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정말로 도현의 마차가 후원 쪽 길을 지나 청암 별궁 방향으로 향하는 것을 창밖으로 목격했다. 어두운 후원을 가로지르는 마차의 등불이, 마치 확신을 갖고 나아가는 것처럼 흔들림 없이 멀어졌다. 소영이 옆에서 그 모습을 보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왕비마님…" "괜찮아."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그 담담함이 진짜인지 나조차 알 수 없었다. 창문을 닫고 자리에 앉으니, 손끝이 시렸다. 방 안 온도는 그대로인데. 다음날 아침 조회 자리에서 나는 태호 공작을 처음으로 정식으로 마주할 기회를 얻었다. 왕비 접견실에서 왕궁 예산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였는데, 재하도 함께 참석했다. 접견실에 들어서자마자 공기가 다르다는 걸 느꼈다. 다들 서류를 든 채 서 있었고,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이런 침묵에는 익숙해져야 한다고, 소국에서부터 배운 게 있었다. "올해 후원 보수 비용이 예상보다 초과됐습니다." 재하가 서류를 내밀며 건조하게 보고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없었지만, 시선만은 나를 정확히 향해 있었다. "이유가 뭔가요?" "청암 백작가 별궁 보수에 예산이 상당 부분 사용됐습니다." 순간 방 안 분위기가 묘하게 얼어붙었다. 태호 공작이 조용히 나를 살폈다. 그 시선에는 관찰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렸다. 나는 서류를 넘겨받아 천천히 읽었다. 별궁 보수, 정원 확장, 새 가구 구입까지. 심지어 별궁 전용 정원사를 새로 고용한 항목까지 있었다. 왕비궁보다 더 많은 예산이 그쪽에 쓰이고 있었다. 속으로 헛웃음이 났다. 정원사까지? 나는 아직 내 방 커튼 색깔도 못 골랐는데. "이 예산 승인은 누가 했나요?" "폐하의 직접 지시였습니다." 재하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날이 서 있었다. 나를 시험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 자리가 처음부터 그런 목적으로 짜인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스쳤다. 나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이럴 때는 감정을 앞세우면 진다. 사실과 논리로 밀고 나가야 한다. "국왕 전용 예산이라면 제가 관여할 부분은 아니겠지만, 왕실 전체 예산에서 지출됐다면 왕비궁도 동일한 기준으로 검토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별궁 보수가 왕실 예산으로 처리됐다면, 앞으로는 모든 왕실 시설 보수를 재상부에서 통합 관리하고, 왕비궁 명의로도 동일한 검토 절차를 거치도록 하죠. 특정 인물에게만 예외가 적용되는 건 형평에 맞지 않으니까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재하가 눈을 살짝 좁혔고, 태호 공작은 처음으로 표정에 흥미로움을 내비쳤다. 그 미묘한 표정 변화를 나는 놓치지 않았다. "왕비마님 말씀이 옳습니다." 태호 공작이 짧게 동의했다. "재하야, 별궁 예산 건은 다시 검토해서 보고하도록." "…예." 재하는 짧게 대답했지만, 나를 보는 눈빛에는 확실히 불쾌함이 서려 있었다. 어쩌겠어. 원래 이런 자리는 미움받을 각오하고 앉는 거지. 이렇게라도 선을 그어놓지 않으면, 다음번엔 왕비궁 담장까지 헐어서 별궁에 넘겨줄 판이었다. 회의가 끝난 뒤, 태호 공작이 나를 따로 불렀다. 다른 사람들이 다 나간 뒤라 접견실에는 정적만 남아 있었다. "왕비마님, 오늘 판단이 정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엔 걱정이 많았습니다. 소국에서 오신 어린 공주님이 이 궁의 정치를 감당할 수 있을지." 그 말에 순간 자존심이 상했지만, 표는 내지 않았다. 어차피 다들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을 테니까. "지금은요?" "조금 다르게 보고 있습니다." 그 말이 왜인지 든든하게 느껴졌다. 이 궁에서 처음으로, 진짜로 내 편이 생긴 기분이었다. 낯선 궁에 홀로 떨어진 것 같던 마음에 처음으로 작은 틈이 생긴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든든함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별궁 문제를 정리한 서류를 다시 살펴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서류를 한 장 한 장 넘기다가, 예산 승인서 하단에서 손이 멈췄다. 낯익은 서명이 있었다. 홍은주. 촛불이 살짝 흔들렸다. 나는 서명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방금까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곁을 지키던 그 사람이, 어째서 이 서류에 이름을 올려놓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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