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강도현은 폐신전으로 향하는 좁은 회랑을 걸으며 발소리를 죽였는데, 그 걸음이 마치 먹이를 향해 미끄러져 가는 물뱀처럼 조용하고 정확했다. 회랑 양옆으로 늘어선 낡은 석상들은 오랜 세월 동안 얼굴이 깎여나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형체로 남아 있었고, 그 사이를 지날 때마다 그는 자신의 그림자가 벽을 타고 길게 늘어지는 것을 곁눈으로 흘려보았다. 밤공기가 차가웠으나 그는 조금도 서두르지 않았고, 오히려 이 순간을 오래 음미하려는 듯 걸음 사이사이에 여유를 두었다. 마치 오랫동안 벼려온 칼을 이제야 뽑아 드는 사람처럼, 그의 표정에는 조급함 대신 어떤 차분한 만족이 서려 있었다.
이 신전을 찾아오기까지 그가 들인 시간을 생각하면, 오늘 밤의 걸음은 오히려 느긋해도 될 성질의 것이었다. 몇 달째 그는 신전의 하급 사제들을 매수해 성물 보관실의 출입 기록을 훔쳐보게 했고, 야간 경비의 교대 시간을 외워두었으며, 심지어는 성녀의 시녀 하나를 은밀히 회유해 그녀의 일상 동선을 손에 넣기까지 했다. 그 모든 준비가 오늘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그의 입가에 옅은 웃음을 걸게 했다.
폐신전의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안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낡은 돌바닥에 노란 얼룩처럼 번져 있었다. 그는 문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르며 안을 들여다보았다. 촛불 하나가 제단 옆에서 흔들리고 있었고, 그 불빛에 비친 실내는 오래된 먼지와 습기 냄새로 가득했다.
그녀가 거기 있었다.
성녀복을 벗어던진 채, 헐렁한 평민 옷을 걸치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은 이서윤이었다. 손에는 도자기 술병을 쥐고 있었고, 뺨은 이미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으며, 평소 사람들 앞에서 짓던 그 서늘하고 완벽한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녀의 얼굴에는 나른한 웃음이, 마치 오랫동안 참아온 숨을 겨우 내뱉는 듯한 표정이 걸려 있었다. 머리카락은 반쯤 풀어져 어깨 위로 흐트러져 있었고, 옷깃은 단정치 못하게 벌어진 채였다.
강도현은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턱이 단단하게 조여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운 감정이었는데, 오랫동안 서류와 소문으로만 접했던 존재가 마침내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눈앞에 나타난 것에 대한 어떤 격렬한 만족감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그녀를 성녀라는 이름 아래 놓인 하나의 상징으로만 보아왔다. 흠 하나 없는 대리석 조각처럼, 감히 손댈 수 없는 자리에 앉아 사람들의 숭배를 받는 존재로. 그러나 지금 눈앞의 여자는 술에 취해 뺨을 붉히고, 웃음의 결이 흐트러진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 낙차가 그의 안에서 이상한 열기를 지폈다.
*드디어.*
그는 문틀에 어깨를 기댄 채 목소리를 냈다.
"성녀님께서 이런 곳에서, 이런 모습으로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서윤의 몸이 굳었다. 술병을 쥔 손이 허공에서 멈췄고, 그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문가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 담긴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계산이었는데, 이미 십수 년을 성녀로서 살아온 사람답게 위기 앞에서도 표정을 다스리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가, 곧 다시 평정을 되찾는 과정이 강도현의 눈에는 고스란히 보였다. 마치 물 위에 던진 돌이 만든 파문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을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기사단장님이시군요." 그녀가 담담하게, 그러나 어딘가 미묘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 시간에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조사입니다. 이곳에서 성물이 훼손되고 술이 반입된 사건에 대한." 강도현이 안으로 발을 들이며 대답했다. 그의 발소리가 돌바닥 위로 낮게 울렸다. "그리고 그 조사가, 뜻밖에도 쉽게 끝나버렸군요."
이서윤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술병을 등 뒤로 슬쩍 숨겼으나, 그 행동이 오히려 상황을 더 명확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는 듯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감추려는 듯 그녀는 손을 바닥에 짚었고, 그 바람에 술병이 돌바닥에 부딪혀 나지막한 소리를 냈다.
"보신 대로입니다." 그녀가 짐짓 태연한 척 말을 이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신지요."
강도현은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촛불이 그의 얼굴에 명암을 그렸는데, 그 명암 속에서 그의 눈빛만이 이상하게 짙고 선명했다. 이서윤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몸을 물렀으나 등이 곧 벽에 닿았고,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차가운 돌벽의 감촉이 등을 타고 스며들었고, 그녀는 숨을 짧게 삼켰다.
그가 한 걸음, 또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촛불 그림자가 그의 몸을 따라 벽을 타고 늘어졌다가 다시 접혔다. 이서윤은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오래전 어느 사냥터에서 보았던 뱀 한 마리를 떠올렸다. 먹이를 눈앞에 두고도 서두르지 않던, 오히려 그 여유가 더 소름 끼치던 그런 뱀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가 낮게 말했다. "저는 성녀님을 고발할 생각이 없으니까요."
"그럼요?"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이서윤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이런 순간을 수없이 상상해왔으나, 실제로 맞닥뜨리자 목구멍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신전에 들어온 이래로 그녀는 늘 자신이 언젠가 벌거벗겨질 순간을 기다려왔고, 그 순간이 이렇게 갑작스레, 이런 하찮은 장소에서 찾아올 줄은 몰랐다.
"조건이라니,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녀가 애써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물었다. "돈이라면 신전의 재정을 다루는 사제들에게 청하시는 것이 더 빠를 텐데요."
"돈이 아닙니다." 강도현이 짧게 답했다. 그의 어조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럼."
"천천히 알게 되실 겁니다."
강도현은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 시선에는 오래된 갈증이 담겨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지난 몇 년간 은밀히 모아온 그녀에 관한 자료들, 사소한 소문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수집해온 기록들 위에 쌓인 감정이었다. 그녀가 어린 나이에 신전에 맡겨졌다는 사실, 매년 봄 축제 때마다 유독 낯빛이 어두워진다는 사실, 성물 창고 열쇠를 남에게 맡기지 않는다는 사실까지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갈증을 얼굴 위로는 조금도 드러내지 않은 채, 오직 냉정한 조사관의 표정만을 유지했다.
이서윤은 그 눈빛 속에서 무언가 위험한 것을 감지했다. 단순히 죄를 캐내려는 관리의 눈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깊고 끈덕진, 오랫동안 벼려온 무언가가 그 안에 숨어 있었다. 그녀는 등을 벽에 붙인 채로 숨을 죽였고, 그 침묵이 신전 안을 무겁게 가득 채웠다.
"조건은 곧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가 몸을 돌리며 말을 맺었다. "당분간은, 오늘 일을 발설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성녀님께는 충분한 자비일 겁니다."
그 말을 남긴 채 그는 문을 나섰다. 그의 발소리는 다시 조용하고 정확하게,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회랑을 따라 미끄러져 갔는데, 이서윤의 귀에는 그 소리가 마치 뱀이 소리 없이 풀숲 속으로 사라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이서윤은 벽에 등을 붙인 채 한참을 서 있었다. 술병은 이미 그녀의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져 있었으나, 그 소리조차 그녀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촛불이 낮게 흔들리며 그녀의 얼굴 위로 그림자를 던졌고, 그 그림자 속에서 그녀의 표정은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방금까지의 계산도, 태연함도 모두 사라지고 남은 것은 오직 두려움뿐이었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 조건이 무엇일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의 목덜미를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문밖에서는 이미 발소리가 사라진 지 오래였으나, 이서윤은 그날 밤 내내 그 소리가 회랑 어딘가에 여전히 남아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