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강도현은 자신의 처소로 돌아와 문을 걸어 잠갔다. 바깥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에야 그는 침상 밑으로 손을 뻗어 나무함을 꺼냈는데, 그 동작은 오랜 세월 반복해온 습관처럼 매끄러웠으나 그 안에 담긴 조심스러움은 결코 옅어지지 않았다.
함을 여는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안에는 오랫동안 쌓아온 것들이 있었다. 이서윤이 처음 신전에 들어온 날의 초상화 스케치, 그녀가 즐겨 읽는다는 시집의 필사본, 그녀가 순례를 다녀온 지역마다 남긴 짧은 소문들을 정리한 종이 뭉치들. 종이는 낡아 가장자리가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몇 장은 손이 자주 닿았던 흔적으로 매끈하게 닳아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손끝으로 하나하나 훑으며, 지난 세월 동안 자신이 무엇을 향해 이토록 조용히, 그리고 집요하게 손을 뻗어왔는지를 다시 확인했다.
초상화 스케치 속 소녀는 지금의 이서윤과는 사뭇 달랐다. 아직 앳된 얼굴에 두려움과 호기심이 뒤섞인 눈빛이었으며, 그 눈빛을 그는 몇 번이고 다시 들여다보곤 했다. 그가 이서윤을 처음 본 것은 그녀가 아직 어린 소녀였을 때, 성녀 후보로 선발되어 신전 계단을 오르던 순간이었다. 하얀 예복을 입은 작은 몸이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조금씩 떨렸던 것을, 그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이미 기사로서 이름을 얻은 뒤였고, 그녀는 그보다 일곱 해나 어린,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였다. 나이 차이도, 신분도, 어느 것 하나 어울릴 만한 접점이 없었으나, 그는 그날 이후 그녀를 마음속 깊은 곳에 밀어 넣은 채 살아왔다. 처음에는 그저 먼 곳에서 지켜보는 것으로 충분했다. 신전의 행사에 참석할 때마다 먼발치에서 그녀의 뒷모습을 눈에 담는 것,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향의 흔적을 맡는 것, 그것만으로도 며칠을 버틸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거리는 그를 갉아먹었다.
*가까이 갈 수 없다면, 가질 수 있어야지.*
그는 종이 뭉치를 뒤적이며 그녀가 순례를 다녀온 마을들의 이름을 하나씩 되짚었다. 각 마을에서 그녀가 어떤 말을 했고, 어떤 사람들과 마주쳤으며, 누구의 병을 어루만졌는지까지도 그는 낱낱이 기록해두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애정이라 부를지 몰랐으나, 그는 그것이 애정보다는 소유욕에 가깝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내 것으로 만들 방법을 찾고 있었을 뿐이야.*
그 생각은 자기 자신조차 놀랄 만큼 뒤틀려 있었으나, 그는 그 뒤틀림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 사건이야말로, 오랫동안 접근할 명분이 없던 존재에게 마침내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문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성녀의 밀주 습관을 발견한 그 순간, 그의 심장은 두려움이 아니라 기이한 환희로 뛰었다. 그녀의 비밀을 손에 쥔 이상, 그녀는 더 이상 그가 닿을 수 없는 먼 곳의 우상이 아니었다. 그녀도 이제는 흔들릴 수 있는 존재였고, 흔들리는 존재는 결국 누군가에게 붙잡히기 마련이었다.
그는 종이 뭉치를 다시 함 속에 넣고 뚜껑을 닫으며 낮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방 안의 정적을 메우기에는 너무 작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만큼은 결코 작지 않았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어스름한 달빛이 그의 얼굴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는데, 그 그림자 속에서 그의 눈빛만은 이상하리만치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서윤은 그 밤, 자신의 처소로 돌아와 거울 앞에 섰다. 방 안은 고요했고, 촛불 하나가 흔들리는 소리조차 크게 들릴 만큼 정적이 가득 차 있었다. 거울 속에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결이 고운 은발과 흰 피부, 옅은 청록빛 눈동자가 만들어내는 인상은 흡사 오래된 성화 속 인물처럼 정제되어 있었으나, 그녀는 그 얼굴을 볼 때마다 이질감을 느꼈다.
*저게 나야?*
그녀는 손끝으로 거울의 표면을 천천히 쓸어보았다. 유리 너머의 얼굴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완벽했다. 눈매도, 입술의 곡선도, 심지어 눈썹의 결까지도 어긋남 없이 조화로웠다. 그녀는 그 완벽함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누군가 정성껏 조각해놓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웃어야 할 때 웃고, 슬퍼해야 할 때 눈물을 짓는 법을 그녀는 아주 어릴 때부터 배워왔다. 시녀들이 그녀의 표정을 하나하나 교정해주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조금 더 부드럽게, 조금 더 자애롭게, 성녀님은 그렇게 웃으셔야 합니다.* 그 말들이 반복될수록 그녀의 얼굴에서 진짜 감정은 조금씩 지워졌다. 성녀는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되었고, 감정을 가지되 그것을 절대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진짜 얼굴이 어떤 모습인지조차 이제는 확신하지 못했다.
폐신전에서 마시던 밀주는, 그녀가 유일하게 자신을 되찾을 수 있는 수단이었다. 낡은 돌기둥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과 곰팡이 냄새, 거친 나무 잔에 담긴 독한 술의 맛. 취기가 오르면 잠시나마 성녀의 가면이 벗겨지는 듯한 감각이 들었고, 그 짧은 순간에만 그녀는 진짜 자신의 얼굴로 웃을 수 있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자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는 곳에서, 그녀는 그저 이서윤이라는 이름만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 그 유일한 도피처가 강도현에게 발각되었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을 노려보았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얼굴, 완벽하게 통제된 표정, 완벽하게 짜인 인생. 그 모든 완벽함이 오히려 그녀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녀들도, 신관들도, 심지어 그녀를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이들조차 그녀의 웃음 뒤에 숨겨진 균열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렇게 살다간 언젠가 정말로 사라져버릴 거야.*
그 생각과 함께 그녀는 거울 표면에 이마를 가만히 대었다. 차가운 유리의 감촉이 열기로 들뜬 이마를 진정시켜 주었으나, 마음속의 갈증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그 갈증의 한편에는, 강도현이 자신에게 어떤 조건을 걸어올지 모른다는 불안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을 떠올릴 때마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흘렀는데, 그것이 단순한 두려움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조차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밤이 깊도록 그녀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침상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강도현이 자신을 바라보던 그 시선이 자꾸만 떠올랐다. 단순한 충성심에서 나온 눈빛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오래 억눌러온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었고, 그녀는 그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으면서도 애써 외면했다.
다음 날 아침, 시녀장이 그녀의 처소를 찾아와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시녀장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정갈했으나, 그 안에는 미묘한 흥분이 섞여 있었다.
"성녀님, 사흘 뒤 왕궁에서 대연회가 열립니다. 이번엔 성녀님께서도 정식으로 초청되셨다고 하옵니다."
이서윤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대연회. 왕국의 귀족들이 모두 모이는 그 자리에, 처음으로 자신이 초청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신전 밖의 화려한 자리에는 거의 발을 들이지 않았는데, 그것은 성녀의 신성함을 지키기 위한 방침이었으며 동시에 그녀 스스로도 원치 않았던 일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초청이라니.
"정식으로... 초청되었다고요?"
"예, 성녀님. 국왕 전하께서 직접 서명하신 초청장이옵니다."
시녀장이 건넨 초청장을 받아 든 그녀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두꺼운 종이의 질감과 금박으로 새겨진 문양이 손끝에 닿았으나, 그녀의 시선은 그 화려한 장식이 아니라 그 아래에 적힌 짧은 문구에 고정되어 있었다. 낯익은 필체였다.
*그날 조건을 알려드리겠습니다. — 강도현*
그 글자들을 읽는 순간, 이서윤의 얼굴에서 핏기가 서서히 빠져나갔다. 시녀장은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듯, 여전히 연회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으나, 이서윤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초청장을 쥔 손을 천천히 무릎 위로 내려놓으며, 강도현이 대체 어떤 조건을 준비해두었을지, 그것이 자신을 얼마나 더 깊은 곳으로 끌어당길지를 가늠해보려 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사흘 뒤의 그 연회가 결코 평범한 자리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