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촛불 백여 개가 강당 천장까지 그림자를 늘어뜨리며 흔들리고 있었고, 그 불빛들 사이로 강지윤의 얼굴이 유난히 하얗게 떠 있었다. 한빛고등학교 강당을 이렇게 개조하는 데 얼마가 들었는지는 묻지 않기로 했는데, 어차피 청첩장 대신 프러포즈부터 하는 마당에 예산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나는 무릎을 꿇은 채 반지 케이스를 열었고,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애써 감추면서 목소리를 짜냈다.
"지윤아, 우리 1년 6개월 동안 만났잖아. 나는... 너랑 계속 이렇게 있고 싶어."
그 순간 나는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는데, 이 대사를 준비하면서 편의점 알바비를 모아 산 반지가 이렇게까지 손을 떨게 만들 줄은 몰랐던 것이다. 대본은 어제 화장실 거울 앞에서 열 번도 넘게 연습했으니 떨릴 이유가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몸이라는 건 참 솔직해서 머리가 아무리 괜찮다고 우겨도 지 멋대로 반응해 버리는구나 싶었다. 지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 침묵이 강당 전체를 짓누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촛불 하나가 바람도 없는데 픽 꺼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 작은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설마 감동해서 말을 못 하는 건가.'
나는 그렇게 속으로 자기위안을 하면서 반지를 그녀의 손 가까이 밀었는데, 지윤의 눈동자가 서서히 붉어지는 걸 보고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감동해서 붉어지는 눈과 화가 나서 붉어지는 눈은 분명히 다른 색을 띤다는 걸, 나는 그 순간에서야 뒤늦게 배웠다.
"도현아, 나 다 알아."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칼날처럼 명확했다. 한 글자 한 글자를 일부러 힘주어 발음하는 것처럼 들렸고, 그 정확함이 오히려 더 무섭게 다가왔다.
"네가 서연이한테 무슨 말 했는지, 그날 밤 클럽에서 뭐 했는지, 나 다 들었어."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으며 온몸의 피가 발끝으로 쏠리는 감각이 들었고, 나는 입을 열었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강당 안의 조명이 갑자기 너무 밝아진 것처럼 느껴졌고, 촛불의 냄비 타는 듯한 냄새까지 코를 찌르는 것 같았다.
'이건 시나리오에 없던 전개인데.'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도 나는 습관처럼 변명거리를 찾고 있었으니, 이런 순간에도 뇌는 참 성실하게 살 궁리를 하는구나 싶었다. 무릎을 꿇은 채로 머리를 굴리는 내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울지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 그건 오해야. 진짜로 아무 일도 없었어."
나는 반지를 쥔 손을 뻗으며 다급하게 말했지만, 지윤은 한 걸음 물러서며 고개를 저었다. 그 한 걸음이 마치 몇 미터처럼 멀게 느껴졌다.
"거짓말 그만해. 나 너 믿었어. 진심으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고, 그 물방울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이상하게도 귀에 크게 울렸다. 그 조그만 소리 하나가 강당을 채운 백여 개의 촛불보다 더 선명하게 남았다.
"지윤아, 그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어. 서연이는 그냥—"
"됐어. 이름 꺼내지 마."
그녀는 내 말을 자르며 팔로 자신의 몸을 감쌌다. 마치 내 목소리가 닿는 것조차 견디기 힘들다는 듯한 몸짓이었다.
주변에 있던 친구들, 박지훈과 김서연과 한소율까지 모두 숨을 죽인 채 이쪽을 보고 있었고, 그 시선들이 등에 꽂히는 감각이 마치 수백 개의 바늘 같았다. 김서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시선을 어디에도 두지 못했고, 박지훈은 팔짱을 낀 채 미묘하게 고개를 돌렸으며, 한소율은 입을 손으로 가린 채 나와 지윤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나는 그 짧은 순간에도 각자의 표정을 하나하나 읽어버리는 내 눈이 참 쓸데없이 성실하다고 생각했다.
"지윤아, 잠깐만."
나는 그녀의 팔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녀는 매섭게 손을 뿌리쳤다. 손끝이 스치는 그 짧은 접촉에서마저 그녀의 손이 얼마나 차가운지 느껴졌다.
"놔. 나 이제 너랑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그 말을 남기고 지윤은 몸을 돌려 강당 출입구로 뛰어갔고, 하이힐 소리가 텅텅 울리며 멀어져 갔다. 그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는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손에 쥐고 있던 빈 반지 케이스를 내려다보았는데, 그 케이스 안쪽에 남은 벨벳의 붉은빛이 지금 내 속을 그대로 비추는 것 같아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편의점 알바비를 세 달 동안 모아서 산 반지였다. 시급 얼마짜리 인생이 만들어낸 반지가 이렇게 텅 빈 케이스로 남는다는 게, 어쩐지 지금 내 처지를 요약해서 보여주는 것 같았다.
'1년 6개월. 그게 이렇게 끝나는구나.'
나는 속으로 되뇌며 천천히 무릎을 폈고, 주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걸 느끼면서도 아무런 반응도 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낮은 목소리로 "저거 진짜야?"라고 물었고, 누군가는 혀를 차는 소리를 냈다. 그 모든 소리가 나를 향한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아무도 상관없는 배경음처럼 들렸다.
최범수가 다가와 등을 두드리며 뭐라고 말을 걸었지만, 그 목소리가 마치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먹먹하게 들렸다. "도현아, 일단 나가자." 정도의 말이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 무슨 말이었는지는 나중에 물어봐도 기억나지 않았다. 오하린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살피는 것도, 정우빈이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는 것도, 그 순간에는 전부 흐릿한 배경처럼 느껴졌다. 세상이 텔레비전 화면처럼 한 발짝 물러나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결국 사람들을 밀치고 강당 뒤편 비상구로 걸어 나갔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반지 케이스가 손안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문을 밀고 나가자 차가운 밤바람이 얼굴을 때리는 순간에야 겨우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강당 안의 열기와 시선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고, 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 하나 없이 새까맣게 깔린 구름층이 도시를 통째로 덮고 있었는데, 그 순간 그 구름 사이로 이상한 빛 한 줄기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저건 또 뭐야.'
나는 실없이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가늘게 떴는데, 그 빛은 점점 밝아지면서 마치 하늘 자체가 갈라지는 것처럼 넓게 퍼져 나갔다. 처음에는 멀리서 켜진 조명 같기도 했고, 어느 건물의 서치라이트인가 싶기도 했지만, 그 빛이 흔들리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점점 넓어지는 걸 보고서야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감각이 스쳤고, 발밑의 아스팔트가 미세하게 진동하는 게 느껴졌다.
'설마 지진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다리가 이상하게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발바닥이 아스팔트에 붙어버린 것처럼, 힘을 줘도 몸이 앞으로도 뒤로도 기울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감각을 느꼈던 몸이 이번에는 완전히 다른 이유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빛은 이제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아졌고, 그 빛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무언가의 윤곽 같은 것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 중심에서 뭔가가 나를 향해 정확히 쏟아지고 있다는 걸 느낀 순간, 나는 반지 케이스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방금 헤어진 여자친구도, 등 뒤에서 웅성거리던 친구들도, 심지어 내가 왜 그 자리에 서 있었는지조차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두 팔로 얼굴을 가릴 새도 없이, 나는 온몸이 그 빛에 통째로 삼켜지는 감각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