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고백 대신 염제로 각성했다

4화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는데, 그 리듬이 사람의 걸음걸이와는 확연히 달라서 마치 무언가가 바닥을 긁으며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쿵, 쿵, 하는 저음의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와 종아리까지 저릿하게 만들었고, 그 간격이 일정한 걸 보면 최소한 정신은 있는 놈인 모양이었다. '이거 좀 불길한데.' 나는 검을 고쳐 쥐며 청아를 향해 낮게 물었다. "저게 뭔데?" 청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벽면 너머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이 유적을 지키던 수호 병기입니다. 삼천 년간 침입자를 걸러내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삼천 년이나? 퇴직금은 챙겨줬으려나." 청아는 내 농담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수호 병기에게 퇴직금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 목적이 곧 소멸 시점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헛웃음이 나왔는데, '삼천 년째 근무 중인 경비원이라니, 이건 무슨 초장기 계약직인가' 하는 실없는 생각이 스치는 동시에, 벽면이 갈라지며 거대한 형체가 그 틈으로 밀고 들어오는 걸 목격했다. 돌가루가 흩날리며 시야를 뿌옇게 가렸고, 그 먼지 사이로 청동빛 갑주로 뒤덮인 존재가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그 크기가 어림잡아도 이 미터는 훌쩍 넘어 보였고, 두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붉은 결정이 박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갑주 표면에는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는데, 그 문양이 결정의 빛을 받아 미세하게 파동하듯 일렁였다. '저건 뭘로 만든 거지, 청동인가 청동을 흉내 낸 다른 뭔가인가.' 이런 걸 따질 여유가 있다는 게 스스로도 어처구니없었지만, 위기 상황에서도 딴생각으로 새는 버릇은 여기까지 와도 고쳐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주인님, 자리를 옮겨야 합니다." 청아가 다급하게 말하며 내 팔을 붙잡았고, 나는 그 손길을 따라 몸을 돌리려는 순간, 수호 병기가 팔을 크게 휘두르며 우리를 향해 돌진해왔다. 그 팔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만으로도 근육이 얼마나 압축된 힘을 담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나는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그 공격을 막았는데, 쇳덩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귀청을 때리며 팔 전체로 충격이 퍼졌고, 발밑의 대리석 바닥이 쩍 갈라지는 게 느껴졌다. 손목부터 어깨까지 저릿한 통증이 번개처럼 지나갔고, 검을 쥔 손가락이 저절로 풀릴 뻔했다. '이거 진짜 죽을 수도 있겠는데.' 나는 이를 악물며 뒤로 밀려났고, 청아가 재빨리 손을 뻗어 붉은빛 결계를 순간적으로 펼치며 두 번째 공격을 막아냈다. 결계와 갑주가 충돌하는 순간 파열음과 함께 사방으로 붉은 불꽃 같은 파편이 튀었고, 그 열기가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주인님의 힘은 아직 완전히 각성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도주가 최선입니다." "싸우면 승산이 몇 퍼센트나 되는데?" "영에 가깝습니다." "그럼 도주가 최선이라는 말, 정정할 필요 없겠네." 청아가 다급히 외치는 동시에, 나는 검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뜨거운 기운을 느끼며 몸을 낮췄고, 수호 병기의 세 번째 공격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감각을 느꼈다. 머리카락 몇 올이 그 압력에 잘려나가는 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조금만 늦었어도 목이 아니라 머리 자체가 통째로 날아갔을 거라는 생각이 뒤늦게 등줄기를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반대편 통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발걸음마다 벽에 새겨진 붉은 문양들이 스치듯 지나갔고, 뒤에서 쫓아오는 수호 병기의 발소리는 조금씩 멀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삼천 년을 버틴 놈이 순간 스퍼트는 또 왜 이렇게 빠른 건지, 이쯤이면 계약직이 아니라 정규직 중에서도 에이스급 경비원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헛소리를 곱씹을 정신조차 없었다. 그 순간 세계 저편, 내가 있던 서울의 한빛고등학교 교실에서는 전혀 다른 종류의 위기가 소리 없이 번지고 있었다. 박지훈은 노트북 화면을 뚫어질 듯 바라보며 마우스를 딸깍거리고 있었는데, 화면에는 상대성이론과 웜홀에 관한 논문들이 어지럽게 열려 있었고, 창을 옮길 때마다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좌우로 움직였다. 책상 위에는 마시다 만 캔커피가 놓여 있었지만 이미 온도가 다 식은 지 오래였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해." 그가 혼자 중얼거리며 안경을 밀어 올리자,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서연이 답답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니까 도현이가 진짜로 다른 세계로 갔다는 거야?" 지훈은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키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목격자들 말로는 빛이 도현이를 통째로 삼켰다고 했잖아. 그게 만약 특이점 현상이라면, 시공간의 왜곡을 통해 다른 좌표로 순간 이동했을 가능성이 있어." "좌표라니, 무슨 게임 로딩화면 같은 소리 하네." 한소율이 팔짱을 낀 채 냉소적으로 끼어들었다. "영화를 너무 많이 봤네, 박지훈." 그 말에 지훈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반박했다. "그럼 네가 설명해봐. 사람이 눈앞에서 빛에 휩싸여서 사라지는 걸 어떻게 다르게 설명할 건데." 한소율은 대답 대신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그녀의 손끝이 책상 모서리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는데, 그 무심한 듯한 태도 뒤로 초조함이 얼핏 비쳤다. 김서연은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과학이든 초능력이든, 도현이가 어디 있는지 안다는 것도 아니잖아." 그 순간 교실 문이 벌컥 열리며 오하린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는데, 그녀의 손에는 휴대폰이 들려 있었고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숨이 가빠 어깨가 오르내렸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큰일 났어. 지윤이가..." 그녀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강지윤이 도현의 실종 소식을 뉴스로 접하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는 소식이 반 전체에 퍼져나갔다. 누군가 비명을 삼키듯 짧게 숨을 들이켰고, 몇몇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김서연은 입술을 깨물며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고, 박지훈은 하던 검색을 멈춘 채 멍하니 화면만 바라보았다. 정우빈은 그 소식을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가, 자신이 도현도 지윤도 아닌 유나를 먼저 떠올렸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며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짧은 순간의 죄책감이 얼굴에 스쳤지만, 아무도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최범수는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도대체!"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고, 책상 위에 놓인 필통이 진동에 튕겨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절박한 외침이 교실 전체를 뒤흔드는 그 순간, 이세계의 유적에서는 나와 청아가 좁은 통로 끝에 다다랐는데,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다리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 앞을 또 다른 수호 병기의 그림자가 서서히 가로막고 있었다. 그림자의 크기는 방금 우리가 도망쳐 나온 놈보다도 훨씬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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