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고백 대신 염제로 각성했다

5화

통로 끝에서 마주친 두 번째 수호 병기는 앞서 것보다 한층 더 거대해서, 천장에 닿을 듯한 키에 어깨는 통로 양쪽 벽을 거의 채울 정도였다. 갑주 표면에 새겨진 문양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붉게 맥동하고 있었고, 그 박동이 마치 심장 소리처럼 통로 전체를 울리게 만들었다. '이거 보스몹인가.' 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검을 고쳐 쥐었는데, 손바닥에 흐르는 땀 때문에 손잡이가 미끄러워지는 걸 느끼며 마음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게임이었다면 여기서 세이브라도 하고 왔을 텐데, 여기는 그런 배려 따위 없는 곳이라는 게 참으로 야박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청아가 내 앞을 가로막으며 결계를 펼쳤다. 그녀의 손끝에서 뻗어나간 푸른 문양이 허공에 겹겹이 쌓이며 방벽을 이루었지만, 그녀의 얼굴에 미세하게 스치는 긴장이 이번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평소라면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던 그녀였다. "주인님, 뒤로." 그녀가 짧게 외쳤지만, 수호 병기의 주먹이 결계를 뚫고 들이닥치는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막았고, 그 충격으로 몸이 통로 벽까지 튕겨나가며 등이 세게 부딪혔다. 뼈와 벽돌이 부딪히는 소리가 내 몸에서 났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갈비뼈 어딘가에서 둔탁한 통증이 치솟아 올랐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섰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옆구리가 뜨겁게 저려왔지만, 여기서 주저앉으면 다음은 청아가 대신 맞을 거라는 생각에 억지로 다리에 힘을 줬다. 그 순간 시야가 갑자기 흐릿해지면서 머릿속으로 강렬한 이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 내 귓속에 종을 매달고 마구 흔드는 것 같은 소리였다. '뭐야, 이거.' 나는 그렇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릎이 꺾였고, 청아가 다급히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걸 느끼며 의식이 완전히 끊어졌다. 깨어난 곳은 조금 전까지 있던 유적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 사방이 온통 붉은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발밑에는 끝없이 펼쳐진 불꽃의 들판이 지평선까지 이어져 있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뜨거운 기운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지만 이상하게도 화상을 입지는 않았다. '여기가 저승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는데, 죽어서 이런 곳에 온 거라면 최소한 시원한 그늘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부질없는 불만이 스쳤다. 그 순간 저 멀리서 붉은 갑옷을 걸친 사내의 형상이 서서히 다가오는 게 보였다. 발걸음마다 불꽃의 들판이 갈라지듯 파문이 일었고, 그 위로 갑주가 부딪히는 낮은 금속음이 들판 전체에 잔향처럼 퍼져나갔다. 그 얼굴은 놀랍게도 조금 전 유적에서 보았던 파편적 기억 속의 인물과 완전히 일치했다. "그대가 나의 환생인가." 사내의 목소리가 불꽃의 들판 전체에 울려 퍼졌고, 나는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눌려 뒷걸음질 쳤지만, 발이 땅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목소리 하나로 이 정도 무게감을 낼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왕년에 회사 상무님 목소리에도 이 정도로 위축된 적은 없었는데. "당신이... 염제인가요?"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들어 불꽃의 들판 전체를 가리켰다. "나는 치우와의 싸움 끝에 신검을 남기고 소멸했다. 하나 나의 혼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삼천 년을 기다려 그대의 몸에 깃들었다." 그 말이 끝나자 내 가슴 한가운데서 뜨거운 기운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고, 나는 그 열기에 압도되어 무릎을 꿇으며 신음했다. 심장이 마치 화로 속에 들어간 것처럼 뜨겁게 뛰기 시작했고, 그 진동이 손끝까지 퍼져 손가락이 저절로 떨렸다. 눈앞으로 파편처럼 쏟아지는 기억들이 이번에는 더 선명하게 이어졌다. 황제와 함께 검을 벼리던 대장간의 풍경이 먼저 떠올랐는데, 풀무질하는 손등에 튀는 불티, 벌겋게 달아오른 쇳덩이를 두드리는 소리, 그리고 그 곁에서 웃던 누군가의 옆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이어서 구려족과의 전투에서 검을 휘두르던 순간이 이어졌다. 함성과 비명이 뒤섞인 전장, 피와 흙이 뒤엉킨 냄새, 그리고 손에 쥔 검이 살을 가르는 감각까지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뢰하던 누군가에게 등을 찔린 채 쓰러지는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누군가에게 배신당해서 죽었다고?' 나는 그 마지막 장면에서 심장이 조여드는 감각을 느끼며 눈을 부릅떴는데, 그 배신자의 얼굴만은 이상하게도 흐릿하게 가려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지워놓은 것처럼, 윤곽선만 남고 그 안은 텅 빈 여백이었다. "그 힘을 되찾을 준비가 되었는가." 사내가 나를 향해 손을 뻗으며 물었다. 그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열기가 마치 나를 삼킬 듯 다가왔지만,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나는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 순간 온몸이 불꽃에 통째로 휩싸이는 감각과 함께 의식이 다시 한번 아득해졌다. 그 열기 속에서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사내의 낮은 웃음소리였는데, 그것이 반가움인지 비웃음인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유적의 통로 바닥에 누워 있었고, 청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인님, 깨어나셨습니까."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전과 다르게 미세한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그 짧은 문장 하나에 담긴 감정이 낯설어서, 나는 순간 그녀가 정말 걱정을 한 건지 되묻고 싶어졌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는데, 그 순간 손바닥을 타고 흐르는 열기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선명해져 있다는 걸 느끼며 검을 내려다보았다. 검신의 불꽃 문양이 이제는 완전히 살아난 것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었고, 그 열기가 내 심장과 완전히 동조하는 감각이 들었다. 손끝으로 검신을 살짝 쓸어보니,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나... 뭔가 달라진 것 같은데." 내가 중얼거리자 청아는 나를 유심히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염제의 힘이 일부 각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 이는 시작일 뿐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건조했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빛만은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완전한 각성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내가 묻자 청아는 잠시 침묵했다. "그것은 저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주인님이 잃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 말이 유독 무겁게 들렸지만, 나는 애써 가볍게 넘기려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조금 전까지도 나를 압도했던 수호 병기의 잔해가 통로 곳곳에 흩어져 있는 걸 발견하고서야 내가 의식을 잃은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부서진 갑주 조각들이 아직도 희미하게 열기를 내뿜고 있었고, 통로 벽에는 커다란 손자국 같은 균열이 깊게 파여 있었다. '내가 이걸 부순 건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살면서 이렇게 압도적인 파괴력을 낸 적은 없었는데, 이걸 좋아해야 할지 무서워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서울에서의 기억들, 강지윤의 얼굴,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마치 다른 사람의 기억처럼 아득하게 멀어지는 걸 느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떠오르던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흐린 유리창 너머로 보는 것처럼 윤곽만 남아 있었다. '설마 이대로 돌아갈 수 없게 되는 건가.' 나는 그 불길한 예감을 애써 떨쳐내며 청아를 향해 걸음을 옮겼지만, 그녀는 대답 대신 조용히 시선을 돌려 통로 저편의 어둠을 응시했다. 그 어둠 속에서 또 다른 무언가가 낮게 웅웅거리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나는 그 순간 온몸의 감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청아의 손이 소리 없이 검집으로 향하는 걸 보며, 나는 다시 한번 검을 고쳐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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