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그날 밤, 잠이 든 것도 아니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에서 한서이는 다시 그 낯선 방으로 돌아갔는데, 이번에는 시작부터 훨씬 선명했다.
대리석 바닥의 차가움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감각부터, 허리를 조이는 비단끈의 압박감, 그리고 등 뒤에서 낮게 깔리는 시녀들의 숨죽인 목소리까지, 마치 처음부터 그 안에 있었던 것처럼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옷깃에서 옅은 향유 냄새가 났고, 그 냄새조차 낯설지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낯설게 느껴졌다.
'이건 분명 처음 겪는 냄샌데, 왜 익숙하지.'
그런 의문이 스치는 사이에도 손끝은 이미 저 혼자 옷자락을 매만지고 있었고, 한서이는 그저 그 손의 움직임을 관찰자처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설란 후작 영애, 이설화.'
이름을 되짚는 순간 옆에서 누군가 옷매를 다급히 매만지며 낮게 속삭였다.
"아가씨, 곧 전하께서 드십니다. 표정 관리하셔야 해요."
시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지만 그 안에 감춰진 긴장은 오히려 더 선명하게 전해졌고, 방 안을 채운 다른 시녀들의 손길도 덩달아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누군가는 머리 장식을 다시 매만졌고, 누군가는 치맛단의 주름을 손으로 눌러 폈다. 그 모든 움직임이 마치 무대 뒤에서 배우를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스태프들 같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이설화의 몸은 그 소란 속에서도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
전하, 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한층 무거워지는 것이 느껴졌고, 몸속 어딘가에서 이설화라는 여자의 오래된 긴장이 그대로 되살아나는 듯했다. 심장이 뛰는 자리가 어딘지도 모른 채, 그저 빠르게, 점점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커다란 남자의 그림자가 방 안으로 성큼 들어섰는데,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그 형체는 마치 세트장의 조명을 가리는 배우처럼 방 안의 빛을 통째로 삼켜버리는 것 같았다.
발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그 걸음마다 바닥이 무겁게 눌리는 듯한 압박감이 전해졌고, 시녀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인 채 뒤로 물러섰다.
검은 관복 차림에 은실로 수놓인 문양이 촛불에 반사되어 번뜩였고, 얼굴선은 지나치게 단정하다 못해 냉정해 보였으며, 눈매는 상대를 재는 듯 짧게 훑고 지나갔다.
강윤제, 제2왕자.
이름 역시 저절로 떠올랐고, 그와 함께 이설화의 심장이 뛰는 속도가 자기 것인지 남의 것인지 구분이 안 될 만큼 빨라졌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옷에서 은은한 나무 향이 났는데, 그 향은 향유의 단내와는 전혀 다른, 서늘하고 건조한 냄새였다. 한서이는 그 냄새를 맡으며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남자, 향까지 계산해서 입는 건가.'
그런 실없는 생각이 스치는 것과 동시에, 강윤제의 시선이 이설화의 얼굴에 닿았다.
"국서에서 이미 알렸을 것이오."
낮고 단조로운 목소리가 방 안을 채웠고, 그 어조에는 감정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조금도 섞여 있지 않은 것처럼 들렸다. 목소리가 낮게 깔릴 때마다 방 안의 촛불이 흔들리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설란 후작가와 왕실의 혼약을 이번 달 안에 정식으로 체결하겠소."
혼약이라는 두 글자가 떨어지는 순간, 이설화의 몸은 미세하게 굳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흔들림 없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서이는 그 몸 안에서, 이설화가 지금 이 순간 얼마나 많은 말을 삼키고 있는지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목 안쪽이 조여드는 감각, 손끝이 차가워지는 감각, 그 모든 것이 겉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은 채 안에서만 요동치고 있었다.
'대체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하지.'
그런 생각이 스치는 사이에도 몸은 이미 익숙한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치 수백 번 연습한 대본을 읽는 배우처럼, 이설화의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다.
"영광입니다, 전하."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서늘하고 흔들림이 없었지만, 그 말 뒤에 숨은 감정은 전혀 다른 색이었다는 걸 한서이만은 알 수 있었다.
강윤제는 그 대답을 듣고도 표정을 조금도 바꾸지 않은 채, 잠시 이설화를 내려다보았는데, 그 시선에는 호기심도 배려도 없이 그저 조건을 확인하는 듯한 무심함만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계약서의 마지막 문구를 검토하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한서이는 그 시선을 마주하며, 이상하게도 화가 나기보다는 서글퍼졌다. 이설화의 감정인지 자신의 감정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든 씁쓸한 맛이 입안에 감도는 것 같았다.
"혼약이 성립된 후에도, 서로의 감정을 강요할 생각은 없소."
그가 덧붙인 그 한마디는 배려처럼 들릴 수도 있었지만, 이설화의 몸은 그 말을 오히려 선고처럼 받아들이며 손끝을 더 세게 말아 쥐었다.
감정을 강요하지 않겠다는 말은 곧, 감정을 기대하지도 않는다는 뜻으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저 사람은 그게 다정한 말인 줄 아는구나.'
한서이는 그 생각을 하며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이설화의 얼굴은 여전히 아무런 흔들림도 내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조금 더 숙여, 그 말에 감사하다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그 순종적인 몸짓 뒤에 숨은 서늘함을 강윤제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강윤제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관복 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갈랐고, 그 소리가 멀어질수록 이설화의 어깨에서 조금씩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방을 나서는 강윤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설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눈이 내리는 창밖을 응시했고, 그 침묵을 지켜보던 시녀들 중 누군가가 안도의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이에요, 아가씨. 전하께서도 흡족하신 듯 보이셨어요."
그 말에 이설화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창밖의 눈송이가 하나둘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 시선 속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는 오직 한서이만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침묵이 흡족함으로 오해받고 있다는 걸, 이설화 자신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을 굳이 바로잡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마치 오해받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는 듯, 입을 다문 채 그 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한서이는 그 순간, 이설화의 시선이 자신의 시선과 완전히 겹쳐지는 걸 느끼며 눈을 떴다.
천장은 다시 익숙한 오피스텔의 흰 천장이었고, 창밖은 서울의 새벽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방 안의 공기는 건조했고, 어딘가에서 냉장고가 낮게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극히 평범하고 지극히 현실적인 소음이었지만, 그마저도 이상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심장이 아직도 빠르게 뛰고 있었고, 손끝에는 그 서늘한 방의 냉기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한서이는 자신의 손끝을 들여다보며, 그 손이 정말 자신의 것인지 몇 번이나 확인하듯 손가락을 접었다 펴보았다.
'이게 정말 꿈이 아니라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는 순간, 휴대폰 진동이 울리며 오늘 스케줄을 알리는 문자가 화면 위에 떠올랐고, 그녀는 그 문자를 몇 번이나 다시 읽으면서도 좀처럼 현실감을 되찾지 못했다.
화면 속 글자들은 분명 한국어였고, 지극히 익숙한 오늘의 일정이었는데도, 그 문자를 읽는 눈이 자꾸만 방금 전 그 방의 촛불과 은실 문양을 떠올리고 있었다.
'강윤제.'
이름을 다시 떠올리는 순간, 한서이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 무심한 눈빛과, 그 눈빛을 마주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했던 이설화의 심정이, 아직도 자신의 것처럼 남아 있는 듯했다.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나 앉은 한서이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서울의 아침 하늘은 여전히 흐릿한 회색빛이었지만, 그 위로 문득 눈이 내리던 그 낯선 창밖 풍경이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이게 단순한 꿈이라면 이렇게까지 선명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만약 꿈이 아니라면, 오늘 밤에는 또 무엇을 보게 될지, 한서이는 그 답을 알 수 없어 손끝이 다시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