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1인 2역, 파혼 선언

5화

촬영이 늦게 끝난 밤, 한서이는 매니저 차 안에서 오래 참아왔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저, 이번 주말에 하루만 시간 좀 낼 수 있을까요." 박준혁은 운전대를 잡은 채 백미러로 그녀를 슬쩍 보다가, 곧바로 스케줄표를 떠올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신호가 걸려 차가 멈춘 틈에 그는 조수석에 놓아둔 태블릿을 힐끗 확인하기까지 했는데, 그 짧은 손짓 하나에도 관리자의 습관이 그대로 묻어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어요? 인터뷰나 화보 스케줄 안 잡혀 있는데." "그냥…… 조부모님 뵈러 가고 싶어서요." 그 말을 하는 동안 한서이는 자신이 왜 이렇게 조심스러워지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마치 허락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오래된 습관이 몸에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이 차창에 부딪혔다가 미끄러지듯 사라지는 걸 바라보며, 그녀는 손끝으로 무릎 위의 가방끈을 만지작거렸다. 별것 아닌 부탁인데도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는 걸 느끼며, '이런 걸로 긴장할 필요는 없는데' 하고 속으로 되뇌었지만 소용없었다. 박준혁은 잠시 말이 없다가, 결국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호가 풀리자 다시 앞을 보며 액셀을 밟는 그의 옆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는데, 그게 오히려 한서이를 더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어머니께는 제가 말씀드릴게요. 대신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다녀와요." "고맙습니다." 허락이라기보다는 관리의 언어였지만, 한서이는 그것만으로도 이상하게 안도했다. 창에 이마를 살짝 기대며 눈을 감자, 하루 종일 세트장 조명 아래 서 있던 피로가 뒤늦게 몰려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은 벌써 주말을 향해 조금씩 앞서가고 있었다. 집에 도착해서도 조미란은 여전히 거실 소파에 앉아 태블릿으로 시청률 그래프를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딸이 들어오는 소리에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거실 조명은 낮게 깔려 있었고, 소파 옆 테이블에는 다 식은 찻잔이 그대로 놓여 있어서 조미란이 얼마나 오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엄마, 저 주말에 할머니 할아버지 댁 다녀올게요." 한서이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자, 조미란은 그제야 태블릿에서 눈을 떼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 시선이 딸의 얼굴이 아니라 딸의 옷차림,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시계를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아서, 한서이는 순간 자신이 사람이 아니라 스케줄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거기 왜 갑자기." "그냥…… 오랫동안 못 갔으니까요." "쓸데없는 감성 팔이 하지 말고, 요즘 이미지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 사고 이후로 여론이 예민해." 조미란의 말투에는 딸의 마음을 궁금해하는 기색이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고, 그 무심함이 오늘따라 유난히 날카롭게 파고드는 것 같았다. 한서이는 문득 어릴 때도 이런 식으로 대화가 끊겼던 기억을 떠올렸는데, 그때도 지금도 조미란의 눈은 딸이 아니라 그 너머의 무언가—그래프, 숫자, 여론—를 향해 있었다. 한서이는 순간 목 끝까지 무언가 차오르는 걸 느꼈지만, 그것을 애써 삼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딱 하루예요. 사진도 안 찍히게 조용히 다녀올게요." 조미란은 잠시 한서이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시선을 다시 태블릿으로 돌렸다. 그 짧은 순간의 응시가 딸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다음 스케줄을 계산하기 위한 잠깐의 정지였는지 한서이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준혁이한테 확인하고 다녀와. 대신 인터뷰 자료 미리 외워놓고." "네." 허락도 아니고 거절도 아닌 그 모호한 대답이, 한서이에게는 뜻밖에도 작은 승리처럼 느껴졌다. 방으로 들어가는 계단을 오르며 그녀는 손끝이 조금 떨리는 걸 느꼈는데, 그것이 안도인지 서운함인지는 스스로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었다. 방문을 닫고서야 비로소 숨을 크게 내쉬었다. 씻고 침대에 눕기 전, 한서이는 휴대폰으로 조부모님 댁까지의 거리를 다시 검색해보았다. 차로 두 시간 남짓. 마지막으로 찾아간 게 언제였는지 손가락으로 날짜를 세어보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세는 것 자체가 서글퍼질 것 같았다. 그날 밤 다시 잠이 들었을 때, 한서이는 또 그 별궁으로 돌아갔는데, 이번에는 겨울 정원을 홀로 걷는 이설화의 시선을 따라가고 있었다. 한소이의 일이 있고 며칠 뒤, 이설화는 처음으로 유모에게 부탁해 궐 밖으로 짧게 외출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아낸 참이었다. 유모는 처음엔 완강히 고개를 저었지만, 이설화가 며칠째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정원만 서성이는 걸 지켜보다 못해 결국 마음을 돌린 것이었다. "딱 반나절입니다, 아가씨. 그 이상은 후작님께 야단맞아요." 유모의 걱정스러운 말에 이설화는 옅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에 올랐고, 궐의 담을 벗어나는 그 짧은 순간, 처음으로 숨을 크게 들이쉬는 자신을 느꼈다. 마차 안은 좁고 흔들렸지만, 그 흔들림조차도 갇혀 있던 시간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어서 이상하게 반가웠다. 담장 밖의 공기는 안쪽과 다를 게 없었을 텐데도, 이상하게 더 가볍게 느껴졌다. 창을 살짝 열자 흙냄새와 마른 나뭇가지 냄새가 섞여 들어왔고, 그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이설화는 조금 웃었다. 궐 안에서는 좀처럼 웃을 일이 없었다는 걸, 그 웃음을 짓고서야 새삼 깨달았다. 한서이는 그 감각을 고스란히 느끼며, 이설화가 얻어낸 이 작은 자유가 얼마나 사소하면서도 절실한 것인지를 새삼 실감했다. 자신에게는 별궁 담장이 있었고, 한서이에게는 조미란의 태블릿과 스케줄표가 있었다는 걸, 꿈속에서조차 이상하게 겹쳐 보였다. 마차가 시장 거리를 지날 무렵, 창밖으로 붉은 등불이 줄지어 걸린 골목이 눈에 들어왔고, 골목 어귀에서는 좌판을 늘어놓은 상인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으며, 어디선가 구운 밤 냄새가 옅게 풍겨왔다. 이설화는 창에 뺨을 가까이 대고 그 풍경을 눈에 담다가, 그 골목 끝에서 낯익은 은실 문양의 옷자락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한소이였다. 그런데 그 곁에는, 평상복으로 갈아입긴 했지만 분명 낯익은 체형의 남자가 있었다. 강윤제였다. 두 사람은 다정하게 어깨를 스치며 걷고 있었고, 그 모습이 마차 창을 통해 스치듯 지나가는 그 몇 초 동안, 이설화의 표정이 어떻게 변했는지 한서이 자신조차 명확히 느낄 수 없었다. 다만 심장 어딘가가 쿵,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감각만은 분명했다.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도, 숨이 잠깐 멈추는 것도. 마차는 그대로 골목을 지나쳐 갔고, 이설화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창밖의 다른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모가 옆에서 무어라 말을 건넸지만 그 말이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고, 이설화는 그저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담담함이 진짜인지 아닌지, 한서이는 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오랫동안 확신할 수 없었다. 창밖으로 서울의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는데, 그녀는 이불을 움켜쥔 채 그 골목의 붉은 등불과, 나란히 걷던 두 사람의 뒷모습을 몇 번이나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이설화가 그 순간 느꼈을 것이 서운함인지 안도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무언가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어서, 한서이는 천장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눈을 감지 못했다. 문득 휴대폰 알람이 울렸고, 화면에는 오늘 스케줄이 빼곡히 떠 있었다. 한서이는 그것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감고 그 골목의 붉은 불빛을 떠올렸다. 꿈이었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그 붉은빛이 눈꺼풀 안쪽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한서이는 낯선 위화감 하나를 뒤늦게 알아차렸다. 강윤제와 나란히 걷던 그 남자의 걸음걸이가, 어딘가 이상하게 눈에 익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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