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촬영이 재개된 것은 사흘 뒤였다.
병원에서는 정밀 검사 결과 특별한 이상이 없다고 했고, 매니저는 그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며 안심하라 했지만, 한서이는 그 이후로도 매일 밤 같은 방으로 돌아가는 걸 멈추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그곳이었다. 후작가의 어느 복도, 어느 정원, 어느 창가.
깨어나면 다시 서울이었고, 매니저의 목소리가 들리고, 대기실 냉장고의 웅웅거리는 소음이 들리고, 그렇게 현실로 돌아왔다는 걸 확인해야만 겨우 숨을 고를 수 있었지만, 그 반복이 벌써 며칠째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말한다고 해서 믿어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또 이러다 방송국 갈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밤이 되면 결국 눈을 감았고, 감으면 또 그곳이었다.
이번에 떠오른 기억은 좀 더 뒤의 시간, 혼약이 정식으로 발표된 이후의 어느 오후였다.
후작가 별채의 정원, 겨울 장미가 서리에 덮인 채로도 붉은 빛을 잃지 않고 피어 있는 그 사이로, 이설화는 산책을 나섰다가 시녀 하나가 부축을 받으며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했다.
발걸음을 멈춘 것은 반사적인 일이었다. 걸음을 멈추고도 몇 초간, 이설화는 그 광경이 눈에 들어오는 걸 미처 이해하지 못한 채로 서 있었다.
그 시녀의 이름이 한소이라는 것을, 이설화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낮은 신분으로 궐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강윤제 곁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존재였는데, 언제부턴가 그녀의 소맷단에는 왕실에서만 쓸 수 있는 은실 문양이 슬쩍슬쩍 비쳐 보이곤 했다.
처음 그 문양을 발견했을 때, 이설화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시녀가 하사품을 받는 일이야 흔했으니까.
하지만 그 문양이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설화의 마음속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조용히 쌓이기 시작했다.
"아가씨…….."
한소이가 이설화를 발견하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는데, 그 몸짓이 지나치게 서두르는 듯 보여 오히려 부자연스러웠다.
옷자락을 붙잡은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그 떨림조차 어딘가 계산된 것처럼 느껴져서, 이설화는 자신의 그런 의심이 스스로도 낯설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지?"
이설화가 짧게 묻자, 한소이는 눈물을 훔치며 더욱 작게 몸을 웅크렸다.
그 웅크림이 지나치게 작고 지나치게 애처로워서, 마치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를 보는 듯한 인상마저 들었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그저…… 제가 아가씨의 다과상을 실수로 늦게 올려서, 시녀장님께 혼이 났을 뿐이에요."
말끝을 흐리며 억울함을 애써 감추는 듯한 그 태도에, 곁에 있던 다른 시녀들이 안타까운 눈빛을 주고받는 것이 보였다.
그 눈빛들이 하나같이 이설화를 향해 있다는 것을, 그녀는 눈치채지 못한 척 넘기려 했지만 이미 등줄기가 서늘해지고 있었다.
'왜 다들 나를 보지.'
다과상이 늦은 게 무슨 큰일이라고, 그것 때문에 저렇게 눈물을 쏟는단 말인가. 이설화는 그 물음을 속으로 삼키며, 자신이 지금 이 순간 이상하게 몰리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이설화는 그 장면을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다가, 우연히 정원 회랑 뒤편에서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바람이 방향을 바꾸며 목소리를 실어 온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 우연이 아니었다면 이설화는 아무것도 모른 채 방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렇게 서럽게 울면 다들 후작 영애가 못되게 군 줄 알 거 아니야."
또 다른 시녀의 은근한 웃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웃음 안에는 조롱과 다정함이 뒤섞여 있어서, 이설화는 그 이중적인 어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안 그래도 요즘 전하께서 후작 영애를 어려워하시는데, 잘하면……"
뒷말은 흐려졌지만 그 의미는 명확했다.
이설화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회랑 벽 너머로 이어지는 낮은 웃음소리를 들었다. 웃음소리 사이로 한소이의 이름이 몇 번 더 언급되었고, 전하라는 말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한소이의 눈물이, 실은 다과상 따위와는 아무 상관 없는 계산된 연출이라는 걸, 이설화는 그제야 뒤늦게 깨달았다.
깨달음이 늦은 만큼 그 여파는 더 크게 밀려왔다. 지금까지 그녀가 한소이에게 베풀었던 작은 배려들, 시녀장의 꾸짖음을 대신 무마해 주었던 일들,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우스운 것으로 뒤바뀌는 기분이었다.
한서이는 그 기억을 지켜보며, 이설화의 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이 분노인지 허탈함인지 명확히 구분할 수 없었지만, 몸이 저절로 걸음을 옮겨 회랑을 벗어나고 있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발끝이 무거웠다. 걸음마다 정원의 자갈이 밟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고,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의 심장 소리처럼 느껴졌다.
'저게 진짜였구나.'
드라마 대본에서라면 몇 줄의 지시문으로 처리될 법한 장면이었지만, 직접 그 감정 안에 들어와 있으니 그 배신감이 훨씬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대본을 읽을 때는 그저 '악역의 계략' 정도로 지나쳤을 장면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설화의 눈으로 그 순간을 바라보고 있자니, 배신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무겁고 구체적인 것인지 뒤늦게 실감이 났다.
이설화는 그 자리에서 아무런 항변도 하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창가에 앉아 눈 내리는 정원을 오래도록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항변해도 믿어줄 사람이 없다는 걸, 이미 몸으로 알고 있는 사람의 침묵이었다.
그 침묵이 얼마나 익숙한 것인지, 이설화의 어깨선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화를 내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그저 창밖의 눈송이가 하나씩 떨어지는 것을 눈으로 따라갈 뿐이었다.
그 침묵을 지켜보던 늙은 유모만이, 낮게 한숨을 쉬며 이설화의 어깨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담요의 무게가 어깨에 닿는 순간, 이설화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아가씨, 그런 애 하나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유모의 말에 이설화는 옅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끄덕임 뒤에 숨은 감정은 신경 쓰지 않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신경 써도 소용없다는 체념이었다.
유모는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 화로에 숯을 더 넣으며 방을 데우는 데만 신경을 썼다. 방 안이 점점 따뜻해졌지만, 이설화의 손끝은 여전히 차가웠다.
'전하께서 나를 어려워하신다고.'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어려워한다는 것과 마음이 없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일 텐데도, 이설화는 그 두 가지가 결국 같은 결말로 이어질 것 같다는 예감을 떨쳐내지 못했다.
장면이 흐려지며 다시 서울의 천장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한서이는 이불을 걷어차며 몸을 일으켰다.
숨이 가빴고, 이상하게도 눈시울이 뜨거웠다.
방 안은 어두웠고, 협탁 위의 시계는 새벽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창밖에서는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지만, 그 소리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왜 내가 억울해.'
이설화의 일인데,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인데, 그런데도 가슴 한쪽이 뻐근하게 조여왔다.
한서이는 물 한 잔을 마시려 침대에서 내려섰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잠시 벽을 짚어야 했다. 손바닥에 닿는 벽의 냉기가 그나마 현실감을 붙잡아 주는 유일한 감각이었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SNS 실시간 검색어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 있었는데, 클릭해 보니 며칠 전 사고 당시의 영상이 편집되어 퍼지고 있었고, 댓글창은 벌써 그녀를 향한 조롱과 비난으로 가득했다.
『역시 실제로도 독한 여자니까 저렇게 살아남지』
댓글 하나를 읽던 한서이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다음 댓글, 그다음 댓글도 비슷한 어조였다. 누군가는 그녀의 과거 인터뷰를 캡처해 억지로 갖다 붙였고, 누군가는 근거 없는 소문을 사실처럼 단정 지어 적어놓았다.
읽지 않으려 해도 손가락이 저절로 스크롤을 내렸다. 마치 자신을 향한 매질을 스스로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현생에서도, 전생에서도, 아무도 진짜 자신의 마음을 궁금해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설화가 정원에서 홀로 눈을 바라보던 그 침묵과, 지금 자신이 휴대폰 화면 앞에서 굳어 있는 이 순간이 어딘가 겹쳐 보였다.
시대도 다르고 이름도 다른데, 어째서 이렇게 똑같은 방식으로 외로워지는 걸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어서, 한서이는 더 답답했다.
그 생각이 너무 선명해서, 그녀는 한동안 휴대폰 화면을 끄지도 못한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방 안의 정적 속에서 휴대폰 화면의 빛만이 그녀의 얼굴을 하얗게 비추고 있었고, 그 빛 아래에서 그녀는 문득 이설화의 창가와 지금 자신이 앉아 있는 이 침대 위가 그리 멀지 않은 자리처럼 느껴졌다.
'다음엔 또 무슨 장면일까.'
두려움과 궁금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알고 싶지 않은데도, 눈을 감으면 결국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것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