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제가 전쟁광에게 시집갑니다

3화

쌍인제국의 수도는 언제나 대장간의 불빛과 병사들의 발소리로 가득했다. 밤이 깊어도 성벽을 따라 늘어선 화로에서는 붉은 불빛이 꺼지지 않았고, 그 불빛 아래 무기를 벼리는 대장장이들의 망치질 소리가 마치 심장 박동처럼 도성 전체에 울려 퍼졌다. 전쟁이 곧 국가의 존재 이유라고 믿는 이 제국에서, 평화란 다음 전쟁을 준비하는 짧은 숨돌림에 불과했으며, 백성들은 그 숨돌림을 축복이 아니라 불길한 조짐으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했다. 그리고 그 숨돌림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이가 바로 12대 황제 유겸이었다. 유겸은 열두 살에 첫 전투를 치렀고,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이미 세 번의 정복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결혼이란 전략서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 낱말이었으며, 사절단이 탐라국으로 떠난 뒤에야 자신의 이름으로 혼담이 오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그래서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선재하의 손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선재하와 유겸의 인연은 어릴 적 궁의 마당에서 시작되었다. 유겸이 아직 황자였던 시절, 검술 훈련장에서 늘 지는 쪽이었던 선재하는 흙바닥에 넘어져 코피를 흘리면서도 웃으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난 검으로는 널 못 이기니, 머리로 이기면 되지." 그날 유겸은 그 말이 오기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것은 오기가 아니라 선언이었다. 선재하는 전략과 언변으로 유겸의 곁에 남았고, 시간이 흘러 보좌관이 된 지금까지도 유겸이 놓치는 것들을 대신 챙기는 사람이었다. 전쟁터의 물자 보급부터 대신들의 눈치싸움까지, 선재하의 손을 거치지 않은 일이 드물었다. 다만 이번만큼은 그 챙김이 지나쳤다. "뭘 했다고?" 유겸이 집무실 책상을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되물었다. 그 소리에 촛대가 흔들렸고 촛불 그림자가 벽에 길게 늘어졌으나, 선재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태연히 서 있었다. 마치 이 순간을 미리 몇 번이나 연습해 본 사람처럼. "탐라국 공주에게 구혼장을 보냈고, 수락장을 받았으며, 지금 사절단이 그쪽으로 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선재하가 서류를 정리하며 덧붙였다. "말씀드리는 순서가 조금 뒤바뀐 것 같긴 합니다만." "내 허락은?" "필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선재하가 담담하게 답하자, 유겸의 진주색 눈동자가 순간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 눈빛만으로도 방 안의 시종들은 숨을 죽였고, 누군가는 슬그머니 문 쪽으로 몸을 옮겼는데, 선재하는 오히려 그 침묵을 즐기듯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결혼에 관심 없으신 걸 압니다. 하지만 3개월 뒤엔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셔야 하고, 그 전에 후계 문제라도 정리해 두어야 한다고 대신들이 매일같이 저를 찾아옵니다. 어제는 재무대신이, 오늘은 병부대신이, 내일은 또 누가 올지 모릅니다." "그래서 나 몰래 이런 일을 벌였다?" 유겸이 낮게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분노보다 더 무거운, 오래된 피로가 섞여 있었다. 전쟁이 삶의 전부였던 사람에게 결혼이란 낯선 개념이었고, 그 낯섦을 선재하가 강제로 떠안긴 셈이었기 때문이다. 유겸은 손끝이 저릿해지는 걸 느끼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스무 번의 전투는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종이 한 장짜리 혼담은 어째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 "제가 아니면 아무도 폐하께 이런 말을 못 할 테니까요." 선재하가 답하며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종이가 스치는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갈랐다. "공주는 열다섯입니다. 병약하다는 소문이 있지만, 스스로 수락장을 써 보낸 걸 보면 그렇게 약한 사람도 아닌 듯합니다. 필체도 단정하고, 문장에 두려움이 없더군요." "열다섯이라니." 유겸이 서류를 훑으며 짧게 내뱉었다. 그 말에는 냉소도 놀라움도 아닌, 이 상황 전체가 낯설다는 감정만이 담겨 있었다. 종이 위의 글자들은 낯선 나라의 낯선 필체로, 낯선 소녀의 다짐을 담고 있었다. "내가 스물여섯인데, 상대는 열다섯이라는 게 문제가 아니야." 유겸이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문제는 내가 이 혼담이 진행되는 걸 오늘 알았다는 거고." "그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선재하가 어깨를 살짝 들어 보이며 답했다. "폐하께 미리 말씀드렸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저를 감옥에 보내셨을 테니까요." "지금도 못 보낼 것 같나?" 유겸이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그러자 선재하가 처음으로 옅게 웃으며 답했다. "못 보내십니다. 사절단이 이미 국경을 넘었을 시각이라서요." 선재하는 유겸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웃음기를 거두지 않았다. "폐하, 이건 협박이 아니라 협상입니다. 이미 사절단은 떠났고, 되돌릴 방법은 없습니다." "협상이라니, 내 의견은 어디 있었지?" 유겸이 반문하자, 선재하는 짧게 답했다. "그건 나중에 알게 되실 겁니다." 그 말투에는 늘 그렇듯 여유가 배어 있었으나, 유겸은 그 여유 아래 무언가 숨겨진 계산이 있다는 걸 오래된 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말에 유겸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항복이 아니라는 걸 방 안의 누구도 몰랐다. 촛불이 흔들리며 그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를 만들었고, 시종들은 여전히 숨죽인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오히려 그는 이 강요된 혼담 뒤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더 있으리라는 예감에, 손끝으로 서류 귀퉁이를 조용히 구겨 쥐고 있었다. 선재하가 이렇게까지 서두를 이유가 무엇일까. 단순히 후계 문제 때문이라면, 이렇게까지 은밀하게 일을 처리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재하." 유겸이 낮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에는 오랜 세월 쌓인 신뢰와, 그 신뢰 위에 새로 얹힌 불안이 함께 묻어 있었다. "나한테 말 안 한 게 이거 하나뿐인가?" 선재하는 그 물음에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서류 뭉치를 정돈하며 잠시 시선을 내렸는데, 그 짧은 침묵이 유겸의 손끝을 다시 저릿하게 만들었다. 방 안의 촛불이 다시 한 번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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