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샹들리에 불빛이 유난히 하얬다.
수백 개의 크리스털이 매달린 그 불빛 아래, 삼백 명 가까운 사람들이 들어찬 대연회장. 시녀들이 나흘 밤낮을 매달려 준비했다는 이 봄맞이 연회의 한복판에서, 이헌 왕자가 내 손을 놓았다.
손을 놓았다는 표현은 사실 부족하다. 그는 내 손을 마치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듯 툭 떨어뜨렸다. 방금까지 다정하게 얹혀 있던 그 손이, 순식간에 남의 것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서윤 양."
존댓말이었다. 삼 년 만에 처음 듣는 존댓말이었다.
열여섯 살에 정혼자가 되고 나서부터, 그는 늘 나를 "서윤아"라고 불렀다. 화가 났을 때도, 취했을 때도, 아무 감정 없이 부를 때도 그랬다. 그런데 지금,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는 나를 마치 처음 소개받은 귀족 영애처럼 불렀다.
그 호칭 하나에서 이미 알 수 있었다. 오늘은 평범한 날이 아니라는 걸.
"오늘부로 우리의 혼약은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음악이 멈췄다. 누가 신호를 준 것도 아닌데 악단이 일제히 활을 내렸다. 첼로 소리 하나가 어색하게 늘어지다 끊겼고, 그 정적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 표정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뿐이었다.
수백 개의 시선이 내 얼굴로 쏟아지는 걸 느꼈다. 부채 뒤에서, 잔 너머로, 서로의 어깨 사이로. 누군가는 숨을 들이켰고, 누군가는 옆 사람의 팔을 잡았다. 나는 그 모든 시선의 무게를 등으로도, 목덜미로도, 손끝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전하."
내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게 나왔다. 스스로도 신기했다. 삼 년간 이 남자의 일정표를 짜고, 그의 실수를 대신 수습하고, 그가 잠든 새 상소문 열댓 개를 대신 읽어치웠던 시간이 이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게, 우습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했다.
작년 겨울, 그가 국경 지역 세율 조정안에 서명하기 전날 밤, 나는 촛불 세 개를 켜놓고 밤새 문서를 다시 정리했었다. 그가 실수로 서명하면 곤란해질 조항 두 개를 찾아내서 미리 빼놓았고, 다음 날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유능한 왕자로 칭송받았다.
그런 시간이, 이 한마디로.
"이유를 여쭐 수 있을까요."
그가 픽 웃었다. 그 웃음이 얼마나 가벼웠는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입꼬리만 슬쩍 올라가는, 재미있는 걸 봤다는 듯한 그런 웃음.
"당신은 너무 완벽해서 지루합니다."
지루하다.
삼 년을 그렇게 정리하다니, 짧다면 짧고 야박하다면 야박한 평가였다. 마치 오래 쓴 서류철을 버리듯, 한 마디로 정리해버리는.
"완벽함을 강요당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실수 한 번 안 하는 사람 곁에 있으면, 나도 실수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실수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라니.
그가 자기 실수를 내가 얼마나 많이 대신 처리해줬는지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니, 알아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이 남자에게 나는 그런 것까지 챙길 필요 없는 배경이었을 테니까. 가구처럼, 벽에 걸린 그림처럼, 늘 그 자리에 있어서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존재.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군요."
내가 되물었다. 목소리에 떨림이 섞이지 않도록, 나는 숨을 아주 조금씩만 나눠 내쉬었다.
"저는 언제든 시간과 장소를 따로 마련해드릴 수 있었는데요."
"이게 더 확실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확실하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나를 앞에 두고 삼백 명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이 말을 하는 게 더 '확실'하다고 판단한 거였다. 효율적이고 확실한 방법. 어쩌면 이것도 내가 그동안 가르친 습관인지도 몰랐다. 확실한 방법을 택하라고, 애매하게 굴지 말라고, 그렇게 조언했던 게 몇 번이었더라.
그때 연회장 뒤쪽에서 걸어 나온 여자가 있었다. 붉은 드레스, 드러난 어깨, 화려하게 틀어 올린 금발. 촛불에 비쳐 반짝이는 목걸이까지, 마치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한 것처럼 완벽한 등장이었다. 한소희였다.
그녀가 이헌의 팔에 손을 얹었다. 익숙한 손짓이었다. 처음 하는 접촉이 아니라는 걸, 그 손의 각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다들 알고 있었다는 듯, 놀란 사람은 오직 나 하나였다는 듯, 사방에서 조용한 웅성거림이 번졌다.
"전하께서 오랫동안 힘들어하셨어요."
한소희가 나를 보며 웃었다. 그 웃음에는 동정과 조롱이 정확히 반씩 섞여 있었다. 입술 끝은 웃고 있는데 눈은 나를 위아래로 훑고 있었다.
"이서윤 양이 워낙 완벽하시니까, 전하께서 숨이 막히셨나 봐요."
완벽하다는 말이 오늘 밤 나를 죽이는 칼이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웃었다. 정확히 웃는 각도, 웃는 시간, 웃는 온도를 계산해서, 아무 상처도 받지 않은 사람처럼 웃었다. 입꼬리를 몇 도쯤 올릴지, 눈은 얼마나 접을지, 심지어 숨을 얼마나 천천히 내쉴지까지 계산이 끝난 웃음이었다.
삼 년 동안 배운 게 있다면, 이 궁의 사람들 앞에서 절대로 진짜 표정을 보여줘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전하."
인사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짧고 담백하게, 원망이나 미련 같은 건 한 톨도 섞지 않고. 나는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등을 돌려 걸어 나가는 그 짧은 거리가, 살면서 걸었던 가장 긴 복도였다. 대리석 바닥에 내 구두 소리만 또각또각 울렸다. 삼백 명의 시선이 등 뒤에 꽂혀 있었고,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고, 그 침묵이 오히려 더 크게 느껴졌다. 문까지의 거리가 몇 걸음인지, 나는 세고 있었다. 그렇게 숫자를 세지 않으면 다리가 꺾일 것 같아서.
복도를 나서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벽을 짚었다. 서늘한 대리석의 감촉이 손바닥에 닿는 순간, 그제야 참았던 게 터졌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야 겨우, 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숨이 떨렸다. 손끝도 떨렸다. 방금까지 계산했던 웃음의 각도 같은 건 다 사라지고, 그냥 숨만 겨우 붙잡고 있는 사람이 거기 서 있었다.
삼 년이었다.
그의 일정, 그의 사람, 그의 실수, 그의 명성까지, 내가 다 만들어준 삼 년이었다. 그가 무능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밤을 새워 문서를 정리하고, 그가 화를 낼 만한 자리에서는 대신 웃어주고, 그가 놓친 인사말을 대신 챙기고, 그렇게 삼 년을 살았다.
그리고 그 삼 년의 대가는 '지루한 여자'라는 평가 하나였다.
하.
웃음이 나왔다. 이번엔 계산된 웃음이 아니었다. 목 안쪽에서부터 저절로 새어 나오는, 허탈함과 어이없음이 뒤섞인 웃음이었다. 벽을 짚은 채로 나는 한참을 그렇게 웃었다. 지나가던 시녀 한 명이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
간신히 다리에 힘을 주고 마차까지 걸었다. 마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이미 연회장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문이 다 퍼졌을 테니까.
그날 밤, 나는 마차 안에서 창밖을 보며 한 가지를 확신했다. 오늘부로 나는 설영 후작가의 완벽한 영애가 아니라, 사교계 전체가 손가락질할 '상처입은 여인'이 되었다는 것을.
내일이면 이 이야기가 온 궁을 돌 것이고, 모레면 이웃 영지까지 퍼질 것이다. 삼 년을 바쳐 만들어놓은 '완벽한 정혼녀'라는 평판은 하룻밤 사이에 '버려진 여자'로 바뀔 것이다.
그리고 그 낙인은, 내가 아무리 침착하게 웃어도 지워지지 않을 거라는 것을.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창밖 가로등 불빛이 얼굴 위로 지나갔다. 밝았다가, 어두웠다가. 나는 그 리듬에 맞춰 숨을 쉬려고 애썼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지금 이 순간의 나를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차가 후작가 저택 앞에 멈춰 섰을 때, 나는 문득 어떤 예감이 들었다.
이 밤이, 오늘의 이 굴욕이, 어쩌면 끝이 아니라 시작일지도 모른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