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청하 백작가의 서재에는 늦은 밤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는데, 그 불빛 아래 앉아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이서윤이었고, 그녀는 두꺼운 장부와 관청에서 넘어온 서류 뭉치를 하나하나 손끝으로 짚어가며 대조하는 중이었다.
창밖으로는 이미 자정을 넘긴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고, 저택의 하인들도 대부분 잠자리에 든 시각이었으나, 이서윤은 촛대 세 개를 나란히 세워두고 그 불빛에 의지해 서류를 넘기는 일을 멈추지 않았는데, 이는 그녀에게 낮 동안 쌓인 피로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영지의 세수와 지출 내역을 정리하는 이 작업은 백작가의 다른 귀족 영애라면 손도 대지 않을 일이었으나, 이서윤에게는 오히려 숨을 고르게 만드는 유일한 시간이었고, 숫자와 조항 사이를 오가는 동안만큼은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기에 그녀는 늘 이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다른 영애들이 무도회의 드레스 색깔을 고민하고 정혼자와의 산책 일정을 조율하는 그 시간에, 이서윤은 소작료 징수 대장을 뒤적이며 관리들이 슬쩍 끼워 넣은 오차를 찾아내는 데 더 큰 안도감을 느꼈고, 그것은 그녀가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영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서류를 넘기던 손이 문득 멈춘 것은 가문 등록부 사본, 그중에서도 자신의 이름이 적힌 항목을 발견했을 때였는데, 배우자란에 낯선 이름 하나가 또렷하게 박혀 있는 것을 본 순간 그녀는 숨을 삼키고 말았다.
강태호.
청하 백작이자, 그녀의 할아버지 되는 이의 이름이 자신의 배우자란에 적혀 있다는 사실을 몇 번이나 다시 읽어봐도 글자는 변하지 않았고, '이게 대체... 무슨 서류지.' 하는 의문이 머릿속을 새하얗게 지워버렸다.
혹시 필사 과정에서 벌어진 단순한 착오는 아닐까, 관청 서기가 옮겨 적으며 항목의 순서를 잘못 배열한 것은 아닐까, 이서윤은 그렇게 몇 가지 가능성을 애써 떠올리며 스스로를 다독였으나, 눈앞의 문서는 그런 위안을 허락하지 않을 만큼 명확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서둘러 원본 대조 서류를 뒤졌지만 등록번호도, 서명란도 모두 정상적으로 처리된 것처럼 보여, 오류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완벽한 형태로 서류가 완성되어 있었다.
관인이 찍힌 위치, 서기의 필체, 심지어 접수 날짜의 인지印紙까지 하나도 어긋난 곳이 없었고, 이서윤은 그 완벽함이 오히려 더 큰 불안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서류가 조작되었다면 그 조작조차 흠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백작의 서재로 향했는데, 발걸음이 빨라질수록 심장은 더 크게 뛰었고, 손에 쥔 서류가 축축하게 젖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벽에 걸린 초상화들이 그녀를 내려다보는 듯했고, 그 오래된 초상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청하 백작가의 명예와 격식을 상징하는 얼굴들이었으며, 이서윤은 그 시선들 속에서 문득 자신이 이 가문에 어울리지 않는 이물질처럼 느껴지고 말았다.
"할아버님."
노크도 잊은 채 문을 열고 들어선 그녀 앞에서, 강태호는 안경을 고쳐 쓰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그 표정에는 평소의 온화함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그가 읽고 있던 다른 서류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고, 그 반듯한 정돈 상태가 오히려 지금 이서윤이 들고 온 혼란과 대비되어, 그녀는 자신의 손에 쥔 종이 뭉치가 유난히 초라하고 위태롭게 느껴졌다.
서류를 건네받은 그가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는 동안 서재 안에는 벽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또각.
또각.
그 규칙적인 소리가 마치 심판을 기다리는 시간처럼 느껴져, 이서윤은 손끝을 말아 쥐며 애써 침착함을 가장했다.
그녀는 강태호의 표정에서 무언가 실마리를 찾으려 애썼지만, 안경알 너머로 비치는 그 눈빛은 서류를 처음 읽을 때나 두 번째 문장을 넘어갈 때나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담담했고, 그 담담함이 오히려 이서윤의 초조함을 더 부풀리는 결과를 낳았다.
'제발... 오류라고 말해주세요. 그냥 서기의 실수라고, 그렇게만 말해주시면...'
속으로 애원하듯 되뇌었지만, 강태호의 손끝이 서류의 마지막 줄에 다다르고도 별다른 반박의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순간, 이서윤은 이미 최악의 답을 예감하고 말았다.
마침내 서류에서 눈을 뗀 강태호는, 안경 너머로 이서윤을 응시하다가,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이럴 수가... 손녀와 혼인을 한 셈이군."
그 한마디가 서재의 공기를 통째로 얼려버렸고, 문밖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시종 하나가 들고 있던 은쟁반을 놓치는 소리가 복도에 크게 울려 퍼졌다.
쨍그랑.
소리에 놀란 시종이 황급히 무릎을 굽혀 은식기를 주워 담았지만, 이미 그 소음은 저택 곳곳으로 스며들었을 것이 분명했고, 이서윤은 그 순간 자신의 인생이 또 한 번 방향을 잃었다는 것을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왜 하필... 왜 하필 지금.'
속으로 되뇌면서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청하 백작가는 오랜 세월 명예와 격식을 무엇보다 중히 여기는 가문이었고, 그 명예의 정점에는 후계 문제와 결혼 문제가 항상 얽혀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그 격식의 한복판에 던져진 지 이제 겨우 몇 해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이서윤은 문득 몇 년 전, 처음 이 저택의 문턱을 넘던 날을 떠올렸는데, 그날 저택의 하인들은 그녀를 두고 낯선 억양으로 수군거렸고, 오래된 가풍을 자랑하는 이 가문의 사람들은 그녀가 정식으로 족보에 오르기 전까지 좀처럼 온전한 시선을 주지 않았으며, 그 냉대의 시간을 견디게 해준 것이 바로 강태호의 온화한 말 한마디였다는 사실이 지금 이 순간 아프게 되살아났다.
그런 그가, 지금 자신의 이름을 배우자란에 나란히 두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서류상의 오류로 넘기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함의를 지니고 있었고, 만약 이것이 실제로 관청에 등록된 정식 문서라면, 청하 백작가의 명예는 이 한 장의 종이로 인해 뿌리부터 흔들릴 것이 분명했다.
강태호는 서류를 내려놓고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곧 사람을 불러 관청에 확인을 지시했지만, 그 목소리 어딘가에는 이미 최악의 상황을 예감한 듣는 이 특유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박정수를 불러오게."
그 이름이 서재의 정적을 가르며 울리는 순간, 이서윤은 그 이름의 무게를 곱씹었는데, 박정수라는 인물은 오래전부터 백작가의 안살림과 실무 전반을 도맡아온 수석 집사였고, 그가 직접 불려온다는 것은 이 사안이 결코 단순한 서기의 오기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이서윤은 자신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나, 그 떨림이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는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시종이 달려 나가는 발소리가 복도를 따라 멀어지는 동안, 서재에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고, 강태호는 이서윤을 향해 애써 안심시키려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그 미소마저도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흔들리고 있음을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서류 한 장이 앞으로 자신의 삶을 얼마나 뒤틀어놓을지, 지금 이 순간에는 누구도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