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박정수가 서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었는데, 백작가의 수석 집사답게 그는 사태를 파악하는 데 채 몇 분도 걸리지 않았고, 서류를 훑어본 얼굴은 이내 핏기를 잃었다.
똑, 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라 그의 손끝에서 서류 모서리가 떨리며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였다는 것을, 이서윤은 한참 뒤에야 알아차렸다.
"영애님, 이건... 관청의 실무자가 등본을 잘못 병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애써 감정을 억누른 침착함이 배어 있었지만, 서류를 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까지는 숨기지 못했고, 이서윤은 그 떨림을 보며 오히려 더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평생 백작가의 안살림을 도맡아온 사람이, 웬만한 일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던 사람이 저리도 손을 떨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일이 결코 단순한 오류가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으므로.
"단순한... 병합 오류라고 하셨죠."
이서윤이 겨우 입을 떼자, 박정수는 서류를 다시 한번 내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예, 그렇게 보입니다만... 확인이 필요합니다. 이런 사례는 저도 처음이라..."
말끝이 흐려지는 것을 이서윤은 놓치지 않았다. 그 흐려짐 속에 담긴 것이 확신 없는 위로라는 것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정정이 안 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 그녀는 문득 오래전 다인 자작령에서의 기억 하나를 떠올리고 말았다.
그것은 그녀가 아직 다인 자작가의 딸로 살아가던 시절, 겨우 열 살을 넘긴 무렵의 저녁 식사 자리였는데, 아버지인 다인 자작은 이도현의 새로운 교사가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그녀 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고, 그 옆에 앉은 계모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서윤이는 참 조용하죠." 라며 은근한 조롱을 흘렸다.
조용하다는 말이 실은 존재감이 없다는 뜻임을 그녀는 이미 그때부터 알고 있었고, 식탁 아래에서 몰래 주먹을 말아 쥐면서도 겉으로는 아무 표정도 짓지 않는 법을 배웠다.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를 긁는 소리, 이도현의 성취를 칭찬하는 목소리, 그 사이에서 그녀의 존재는 마치 벽지의 무늬처럼 지워져 있었고, 누구도 그녀에게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조차 묻지 않았다.
'나는 왜 이 집에 있는 걸까.'
그 어린 날의 물음은 답을 얻지 못한 채로 오래도록 그녀의 가슴속에 눌어붙어 있었다.
'이번만큼은... 제대로 인정받고 말겠어.'
다인 자작령을 떠나 청하 백작가로 오게 되었을 때, 강태호가 그녀의 손을 잡고 "너는 이 집안의 정식 후계자가 될 것이다." 라고 말해주었던 순간, 그녀는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온전히 필요한 존재로 여겨지는 기분을 느꼈고, 그 기억이 지금껏 그녀를 버티게 해준 유일한 뿌리였다. 강태호의 손은 크고 마디가 굵었으며, 그 손끝에서 전해지던 온기는 지금도 그녀의 손바닥에 남아있는 듯했고, 그날 이후로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이 누군가의 입에서 자랑스럽게 불리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뿌리마저 이상한 서류 한 장 때문에 흔들리려 하고 있었다.
박정수는 서류를 챙겨 들고는 다음날 아침 일찍 관청으로 달려가겠노라 다짐했으나, 물러나기 전 그가 남긴 한마디는 이서윤의 가슴을 더욱 서늘하게 만들었다.
"영애님, 이 일이 사교계에 알려지면... 단순한 오류로는 넘어가지 못할 겁니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서윤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청하 백작가의 후계자가 혼인 신고서상 자신의 조부와 부부가 되어 있다는 사실은,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그 자체로 웃음거리이자 스캔들이 될 것이었고, 사교계란 원래 진실보다 소문을 더 사랑하는 곳이었으니까. 사람들은 진실을 확인하기보다 재밌는 이야기를 더 오래 기억하는 법이었고, 한번 붙은 낙인은 정정 서류 한 장으로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약 이 이야기가 퍼진다면...'
이서윤은 자신이 사교계 무도회장에 들어서는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어떤 모양으로 자신을 훑을지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소곤거리는 귀부인들, 부채 뒤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 그리고 그 웃음소리 속에서 유독 크게 들려올 자신의 이름.
박정수가 서재를 나서고 문이 다시 닫히는 소리가 들렸을 때, 이서윤은 그제야 자신이 숨을 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끝.
아니, 끝이 아니었다. 그저 문이 닫히는 소리였을 뿐인데도, 그녀는 마치 무언가가 완전히 끝나버린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오순영이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을 때, 이서윤은 그 온기 앞에서야 비로소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쉴 수 있었다. 오순영의 손은 박정수의 손과는 다르게 부드러웠고, 어깨를 감싼 팔의 힘은 조심스러웠으나 그 안에 담긴 마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괜찮아요, 영애님. 저희가 어떻게든 해결할 거예요."
오순영의 다정한 말이 위로가 되긴 했으나, 이서윤은 그 다짐이 얼마나 무거운 대가를 요구할지 아직은 알지 못했다. 오순영의 목소리는 흔들림 없이 단단했지만,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에는 미처 감추지 못한 불안이 작은 물결처럼 일고 있었고, 이서윤은 그것을 보지 못한 척 애써 고개를 돌렸다.
"오순영... 만약 정정이 안 되면 어떡하죠."
"그럴 리 없어요. 관청의 실무자가 실수를 한 것뿐이니까요."
오순영은 그렇게 단언했지만, 그 말이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처럼 들린다는 것을 이서윤은 눈치채고 말았다.
다만 그녀는 창가로 걸어가 어두운 정원을 내려다보며, '이번에는 반드시... 내 존재를 증명하고 말겠어.' 하고 속으로 몇 번이나 되새겼는데, 창밖의 정원은 달빛조차 희미하게 스며든 어둠 속에 잠겨 있었고, 낮이면 만발했을 꽃들의 형체마저 흐릿하게 뒤엉켜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 다음날 아침, 관청에서 온 서신 한 통이 저택 전체를 다시 한번 얼어붙게 만들었다.
서신을 받아든 것은 박정수였고, 그는 그것을 읽는 내내 표정을 바꾸지 않으려 애썼지만, 서신을 접는 손끝에서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바스락.
그 소리에 복도에 서 있던 이서윤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서신의 내용은 단순했다. 정정 절차가 예상보다 훨씬 복잡하며, 그 절차가 마무리되기 전까지 이서윤은 공식적으로 '기혼자' 신분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혼자라니... 그것도 하필...'
이서윤은 서신을 든 박정수의 손이 다시금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며, 자신이 앞으로 마주해야 할 일이 결코 단순히 지나가는 소란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