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이도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서윤은 자신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윤아라라는 이름이 그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마치 누군가 가슴 한복판을 얇은 바늘로 슬쩍 찌른 듯한 통증이 스쳤고, 이서윤은 그 통증의 원인을 애써 외면하며 곧바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잘 어울리네."
짧게 답한 그 한마디 속에는 그녀가 감추고 싶은 수많은 감정이 눌려 담겨 있었으나, 겉으로는 조금의 흔들림도 내비치지 않았다.
이도현의 옆에 서 있던 윤아라는 조용한 인상의 여인이었는데, 은빛에 가까운 담갈색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틀어올려져 있었고, 다소곳이 내려뜬 눈매는 차분한 호수처럼 잔잔했으며, 옷차림 하나하나에서 흠잡을 데 없는 격식이 배어 나왔다.
'저 사람은... 조건이 완벽한데. 나는 왜.'
그 물음은 스스로에게 던진 것이었지만, 답을 찾을 수 없어 더욱 씁쓸했다.
이서윤은 그 이름과 조용한 인상을 마음속 깊은 곳에 새겨둔 채 서둘러 연회장을 빠져나왔는데, 마차에 오르는 그 짧은 순간마다 자꾸만 이도현의 옆에 서 있던 윤아라의 모습이 눈앞에 되풀이해 떠올라 그녀를 괴롭혔다.
덜컹, 덜컹.
마차가 자갈길을 지날 때마다 흔들리는 몸과 함께 마음도 함께 흔들렸으나, 그녀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애써 그 감정을 억눌렀다.
저택 문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이미 박정수와 오순영이 초조한 얼굴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두 사람의 표정만 보아도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관청에서 답변이 왔습니다."
박정수가 건넨 서류를 펼쳐본 이서윤의 손끝이 다시금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고, 그 내용은 그녀가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가혹했다.
혼인 등록을 정정하려면 최소 반년 이상의 재조사 기간이 필요하며, 그동안 청하 백작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서윤이 공식적으로 강태호의 '양자' 신분으로 등록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양자라는 신분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후계자로서의 위치는 유지시켜주었으나, 동시에 그녀가 강태호의 친손녀임을 서류상 부인하는 것과 다름없었으며, 이는 곧 그녀가 스스로의 혈연조차 명예를 위해 잠시 접어두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만 셈이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는 겁니까."
이서윤이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그 목소리 끝에는 감추지 못한 미세한 흔들림이 배어 있었다.
박정수는 시선을 피하며 낮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영애님. 관청 내부에서도 이 사안을 두고 이미 말이 많이 돈 모양입니다. 조용히 처리하려면 이 방법뿐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서윤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다인 자작령의 저녁 식사 자리가 다시금 떠올랐다.
"서윤이는 진짜 우리 핏줄이 아니잖니. 그러니 그런 자리에 어울리려면 애를 더 써야지."
계모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조롱하던 그 순간, 그리고 그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무기력한 표정까지 선명하게 되살아났는데, '결국 여기서도... 나는 진짜가 아니라는 거군.' 하는 생각이 가슴을 뻐근하게 짓눌렀다.
그때는 어렸고, 힘이 없었고, 저항할 방법조차 몰랐지만, 지금은 다르지 않은가.
그런데 왜 이토록 똑같은 무력감이 그녀를 다시 짓누르는 것인지, 이서윤은 스스로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오순영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을 때, 이서윤은 비로소 참았던 눈물이 눈가에 차오르는 것을 느꼈으나, 결코 흘리지는 않았다.
"영애님, 이건 잠시일 뿐입니다. 백작님께서도 이 결정을 내리시며 많이 괴로워하셨습니다."
오순영의 손은 따뜻했고, 그 온기가 조금씩 이서윤의 차가워진 손끝으로 전해졌다.
그 말에 이서윤은 고개를 들어 서재 쪽을 바라보았는데, 마침 강태호가 지팡이를 짚은 채 천천히 문가에 서 있었고, 그 얼굴에는 평소의 온화함 대신 짙은 자책이 드러나 있었다.
지팡이를 짚은 그의 걸음걸이는 평소보다 더 무거워 보였고,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마룻바닥이 나직하게 울렸다.
"내가... 너를 지켜주지 못하는구나."
낮게 흘러나온 그 한마디에 이서윤은 오히려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는데, 누군가의 자책보다는 스스로의 힘으로 이 상황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결심이 그녀의 안에서 더 크게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반드시... 이 상황을 뒤집어야 해. 누군가의 동정이나 자책으로 지켜지는 자리 따위, 나는 원하지 않아.'
"괜찮아요, 할아버님. 저는... 제 방식대로 해결할게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이미 다른 계획이 조용히 움트고 있었다.
강태호는 그런 손녀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는데, 그 눈빛에는 미안함과 동시에 알 수 없는 기대감이 뒤섞여 있었다.
"너는... 정말 강한 아이구나."
그 말에 이서윤은 옅게 웃어 보였을 뿐,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며칠 뒤, 저택으로 날아든 초청장 하나가 그녀의 각오를 다시 시험에 들게 했다.
바스락.
봉투를 열어보는 손끝에서 나는 그 작은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는데, 그것은 청하 백작가의 영지 경영 성과를 공식적으로 평가하는 사교 행사에, 그녀가 '양자 신분'으로 참석해야 한다는 통지였다.
초청장 하단에는 이미 참석자 명단이 적혀 있었는데, 그 명단을 훑어 내리던 이서윤의 시선이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추고 말았다.
이도현과 윤아라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던 것이다.
그 두 이름을 나란히 바라보는 순간, 이서윤의 가슴 한복판에서 무언가가 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했으나, 그녀는 그 통증의 정체를 애써 외면한 채 초청장을 조용히 접어 서랍 속에 밀어 넣었다.
'양자... 그리고 그 자리에 저 두 사람이 함께 있겠지.'
그날 밤, 이서윤은 오래도록 잠들지 못한 채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았고, 그 어둠 속에서 자신이 앞으로 마주해야 할 시선들이 얼마나 차갑고 날카로울지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