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결계의 중심에 서서 두 손끝으로 마력을 흘려보내는 이 순간이, 오늘로 정확히 삼천육백오십 번째라는 걸 세어본 사람은 나 말고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새벽마다 신전 첨탑에 올라 명운국 전역을 뒤덮은 반투명한 막에 마력을 밀어넣으며, 나는 이 일을 시작한 여덟 살 때부터 지금 열여덟 살이 되기까지 단 하루도 거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손끝의 저림으로 매번 확인했다. 마력이 빠져나갈 때는 늘 같은 순서로 감각이 사라지는데, 먼저 손가락 끝이 저리고, 그다음 손목이 무거워지고, 마지막으로는 어깨부터 등뼈를 타고 내려가는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십 년을 반복하니 이제는 그 순서를 눈을 감고도 예측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월급이라도 제때 나오면 이 정도 야근은 참겠는데.' 물론 성녀에게 월급이라는 개념은 없고 대신 왕궁 거처와 화구 몇 개를 하사받았을 뿐이지만, 그 화구조차 요즘은 붓을 쥘 힘도 남지 않아 방치해둔 지 오래였다. 처음 화구를 받았을 때는 신이 나서 매일 밤 첨탑에서 내려온 뒤 그림을 그렸는데, 언제부턴가 붓을 드는 대신 침대에 쓰러지는 게 일상이 되었고, 캔버스에는 이제 먼지만 얇게 앉아 있었다.
결계가 유지되는 동안 국경 너머 몬스터 웨이브도, 이웃 나라의 침략도 명운국을 건드리지 못했으니 이것이 나라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문제는 이 나라 사람 중 누구도 그 대가를 정확히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결계를 유지하는 성녀의 마력이 매일 조금씩 갈려나가고, 그 자리를 회복할 시간도 없이 다시 다음 날 아침이 온다는 사실 같은 건, 왕궁 연회에서 회자되기엔 너무 지루한 이야기였을 테니까. 사람들은 결계가 있다는 것만 알았지, 그 결계를 유지하기 위해 매일 새벽 누군가의 마력이 조금씩 깎여나간다는 사실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건 마치 수도관에서 물이 나온다는 사실만 알고, 그 물을 끌어오기 위해 어딘가에서 누군가 밸브를 조이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것과 비슷했다.
나는 첨탑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잠시 눈을 감았다가, 아래쪽 궁정 뜰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다시 눈을 떴다. 그 웃음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굳이 내려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는데,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접듯이 휘며 웃는 그 목소리는 이 궁 안에서 단 한 사람, 내 이복동생 서미래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래의 웃음소리는 늘 청량했고, 그 청량함이 새벽마다 저려오는 내 손끝과 대비되어 유독 크게 들렸다. '오늘도 왕세자님과 다과회라니, 부지런하시네.' 나는 그 말을 속으로만 삼키고 다시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는데, 그 순간 옷자락에서 마력이 다 빠져나간 자의 특유의 서늘한 피로감이 스며 나오는 걸 느끼며 이게 벌써 며칠째인지 헤아려보다가 그만두었다. 헤아려봐야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십 년째 배워온 사람답게, 나는 감정보다 먼저 계산을 하는 버릇이 들어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마다 관절이 시큰거렸지만, 그것도 곧 익숙해질 통증이라는 걸 알기에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국왕 폐하께서 나를 최고 성녀로 임명하며 내려주신 거처는 궁의 가장 외진 별채였고, 그 별채의 창문으로는 미래의 처소에서 밝게 새어 나오는 불빛이 매일 밤 보였다. 처음 몇 년은 그 불빛이 부러웠고, 그다음 몇 년은 화가 났고, 이제는 그저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당연하게 느껴졌다. 미래의 처소에는 늘 사람이 드나들었다. 시녀들, 귀족 자제들, 그리고 요즘 들어서는 강태민까지. 반면 내 별채에는 새벽마다 첨탑에서 돌아오는 내 발소리와, 가끔 마력 소모량을 체크하러 오는 신전 관리 하나뿐이었다. '어차피 결계가 무너지지 않는 한 나는 이 나라에 필요한 사람이니까.' 그 생각 하나로 버텨온 게 십 년이었다. 필요하다는 것과 사랑받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둘을 애써 구분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구분하는 순간 견딜 수 없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날 오후, 나는 국왕 폐하의 부름을 받아 접견실로 향하던 중 복도에서 강태민과 마주쳤다. 그는 내 약혼자였고, 갈색 머리에 파란 눈동자를 가진, 열여섯 살답지 않게 늘 피곤한 표정을 짓는 왕세자였다. 그의 걸음걸이는 언제나 일정한 속도를 유지했는데, 그 속도가 나를 향할 때나 미래를 향할 때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게도 신경 쓰였다. "성녀는 요즘 민원 청취를 소홀히 한다는 얘기가 있던데." 인사도 없이 던진 그 말에 나는 잠깐 걸음을 멈췄다가, 결계 유지에만 하루의 대부분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그가 모를 리 없다는 걸 알기에 반박할 힘도 아꼈다. 그가 그 말을 꺼낸 진짜 이유가 민원 청취 때문이 아니라는 것쯤은 눈치로 알 수 있었지만, 그 속내를 캐물을 기력조차 지금은 남아 있지 않았다. "결계를 안정시키는 데 시간이 더 필요해서요." 대답을 들은 그의 표정에서 어떤 감흥도 찾을 수 없었는데, 그건 마치 결재 서류를 대충 훑고 도장을 찍듯 내 말을 흘려듣는 상사의 얼굴과 똑같았다. '내가 신전 소속 공무원이었으면 진작 노동청에 신고했을 텐데.' 그는 나를 지나쳐 미래의 처소 방향으로 걸어갔고,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이 혼약이 애초에 감정 하나 없는 정치적 계약서일 뿐이라는 걸 다시 확인했다. 계약서에는 도장이 찍혀 있었지만 그 안에 '애정'이라는 조항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걸, 나는 열여덟이 되어서야 완전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접견실에 들어서자 국왕 폐하는 서류를 살피던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나를 흘긋 보시고는, 결계 안정화 보고서를 다음 정기 감사 때까지 정리해오라고만 짧게 명하셨다. 그 말투에는 위로도 격려도 없었고, 그저 결과물을 요구하는 상급자의 사무적인 어조뿐이었다. "예, 폐하." 나는 짧게 답하며 고개를 숙였는데, 그 순간에도 손끝은 여전히 저려왔고, 그 저림이 마치 내가 살아있다는 유일한 증거처럼 느껴져 오히려 조금 안심이 되었다. 국왕 폐하의 시선은 서류로 돌아간 지 오래였고, 나는 그 앞에서 몇 초를 더 서 있다가 결국 절을 하고 물러났다. 물러나는 발걸음에는 미련도, 서운함도 담기지 않았다. 이런 대우가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물러나며, 창밖으로 미래와 강태민이 나란히 정원을 걷는 모습을 보았는데, 두 사람이 무언가를 소곤거리며 서로의 손등을 살짝 맞대는 장면이 눈에 걸렸다. 미래는 여전히 그 청량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고, 강태민은 복도에서 보인 무표정과는 전혀 다른, 부드러운 얼굴로 그 웃음을 받아주고 있었다. 그 대비가 너무도 명확해서,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때는 그것이 그저 다정한 남매 같은 우정이라고만 여겼지, 그 손끝에서 이미 내 자리를 빼앗을 계획이 오가고 있었을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그 순간의 위화감을 애써 무시한 채 접견실을 벗어나 다시 첨탑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고, 그날 밤에도 여느 때와 같이 마력을 흘려보내며 결계를 다잡았다. 손끝이 저려오는 순서는 그날도 변함이 없었지만, 어쩐지 그 저림 속에 처음으로 낯선 불안이 섞여드는 걸 나는 눈치채지 못한 채 넘겨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