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파멸 예정 성녀 영애

1화

연회장의 샹들리에가 유독 눈부시다고 생각한 순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오늘, 여기서 모든 게 무너진다는 걸. '설마.' 아니, 설마가 아니다. 나는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향수와 술, 그리고 위선이 뒤섞인 궁정 특유의 냄새. 서은하로 살아온 열여섯 해 동안 수백 번은 맡아본 냄새인데, 오늘따라 유난히 역했다. 코끝이 아릴 정도로. 샹들리에 아래 놓인 은쟁반 위 와인잔들이 반짝였다. 시종들이 그 사이를 오가며 허리를 숙였다. 다들 웃고 있었다. 이 나라 귀족들은 웃는 데 도가 텄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 겉으로는 늘 웃었다. 나도 그중 하나였고. '저 웃음들, 오늘 밤 지나면 다 저 여자한테로 옮겨가겠지.' 왕태자 이시우가 단상 위로 올라섰다. 갈색 머리를 단정히 넘긴 그가, 자주색 눈으로 좌중을 훑었다. '저 표정. 저거 저거, 뭔가 결심한 표정인데.' 나는 부채를 살짝 접으며 등을 곧게 세웠다. 이럴 때는 표정을 관리하는 게 우선이다. 십 년 넘게 왕비 교육을 받아온 몸이 자동으로 반응했다. 어깨는 펴고, 턱은 살짝 당기고, 눈은 정면을 응시한다. 배운 대로. '그런데 이 배운 것들이, 오늘은 다 무용지물이 되겠구나.' 이상하게도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두려움보다 먼저. "오늘, 이 자리에서 발표할 것이 있습니다." 이시우의 목소리가 홀을 갈랐다.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진짜로.' 악단이 연주를 멈췄다. 활을 켜던 바이올리니스트의 손이 허공에서 멈춘 채였다. 그 정적이 얼마나 무겁던지, 숨소리마저 죄스럽게 느껴졌다. 그가 손을 뻗어 옆에 있던 여자의 손을 잡았다. 회색 머리를 하프업으로 올리고, 분홍빛 눈을 살짝 내리깐 채 부끄러운 척 웃고 있는 여자. 소은. 내 의붓동생. 소은은 오늘 유독 화려하게 꾸미고 나왔다. 연분홍 드레스에, 목에는 처음 보는 목걸이까지. 저건 또 누구한테 받은 건지. 평소라면 궁금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정신이 없었다. "저는 서은하 양과의 혼약을 파기하겠습니다." 순간 홀 전체가 얼어붙었다. 누군가의 와인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났다. 쨍그랑. 그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와, 이 새끼 진짜 하네.' 속으로는 욕이 나왔지만 겉으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게 문제였다. 나는 늘 이런 식이었다. 화가 나도, 슬퍼도, 절박해도 표정이 먼저 나서서 감정을 감춰버렸다. 열두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에도 나는 울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걸 두고 냉정하다고 했다. 나는 그저 우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이었을 뿐인데. 소은이 이시우의 어깨에 얼굴을 살짝 기댔다. "태자님……" 작게 흘러나오는 그 목소리가 얼마나 애처롭게 들리는지, 주변 귀족들의 눈빛이 벌써 그녀를 향한 동정으로 물들고 있었다. '저 년, 연기 진짜 늘었네.' 떨리는 어깨, 살짝 젖은 눈가, 입술을 깨무는 타이밍까지. 완벽했다. 흠잡을 곳이 없었다. 저게 정말 연기인지, 아니면 그동안 내가 몰랐던 소은의 진짜 얼굴인지, 순간 헷갈릴 정도로. 나는 그 순간, 뭔가 아주 익숙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 장면. 샹들리에 아래, 왕태자가 손을 든 순서, 회색 머리 여자가 짓는 저 표정까지. 나는 이걸,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 나는 이 이야기를 소설로 읽었다. 『심연의 성녀』. 악마의 힘을 정화하는 성녀와 그 힘을 시기한 의붓언니가 등장하는 이야기. 그 악역 언니의 이름이 서은하였다. '설마, 설마, 설마.' 나는 세 번을 되뇌었지만, 세 번 다 답은 같았다. 지금 이 순간이, 소설 3장의 시작이다. 혼약 파기와 함께 시작되는, 악역 영애의 몰락. 결말은 뻔했다. 온 나라가 그녀를 손가락질하고, 그녀는 결국 국외로 추방당한다. 그리고 그 후, 소은은 이시우와 결혼해 다온 왕국의 왕비가 된다. 나는 열두 살 무렵부터 이 기억을 갖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태어날 때부터 흐릿하게 있었던 것이 열두 살 무렵 갑자기 선명해졌다. 열이 펄펄 끓던 어느 밤, 침대에서 눈을 떴는데 낯선 기억들이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마치 오랫동안 잠겨 있던 문이 갑자기 열린 것처럼. 전생의 나는 이 나라도, 이 이름도 모르는 곳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었다. 고아원에서 자라 책만 읽던 사람. 형광등 불빛 아래서 밤새 페이지를 넘기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즐겨 읽던 소설이 바로 『심연의 성녀』였다. 완결까지 세 번은 넘게 읽었다. 서은하가 처형당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박수까지 쳤던 것 같다. '하필, 하필 내가 이 소설 속 악역으로 태어날 게 뭐야.' 원망할 곳도 없었다. 그냥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는 게 편했다. 신을 원망해봤자 답도 없고, 이 세상 누구한테 하소연해봤자 미친 사람 취급받을 게 뻔했으니까. "서은하 양." 이시우의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할 말 있으신가요." 최대한 담담하게 물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부채로 가려져 아무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시우의 자주색 눈이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저 눈에 담긴 감정이 뭔지, 나는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죄책감인가. 아니면 그냥 형식적인 예의인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결과는 똑같으니까. "혼약을 파기하는 이유는, 서은하 양이 소은 양을 오랫동안 학대해왔다는 증언들이 있어서입니다." 그 말에 나는 실소가 나올 뻔했다. '학대? 내가?' 내가 소은한테 해준 게 뭐가 있었더라. 생일마다 선물을 챙겨주고, 예법 수업 때 몰래 답을 알려주고, 아버지한테 혼날 때 대신 감싸준 것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는데. 하지만 그 순간, 홀 곳곳에서 영애들이 하나둘 일어섰다. 입을 맞춘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저도 봤어요. 서은하 영애가 소은 영애를 밀치는 걸요." "소은 영애가 다리를 절뚝이시는 걸 본 적이 있어요, 아마 그때……" "저는 소은 영애가 우는 걸 위로해준 적이 있어요. 언니가 너무 무섭다고 하셨죠." 한 명, 두 명, 세 명. 증언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나는 낯익은 얼굴들을 훑어봤다. 지난달 다과회에서 나랑 웃으며 차를 마셨던 백작 영애도 있었다. 그때는 내가 골라준 찻잎이 향이 좋다며 몇 번이나 칭찬했었는데. 오늘은 그런 적 없다는 얼굴로, 나를 마치 처음 본 사람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게 좀 잘 살지.' 누군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건 아마 나였을 거다. 근데 그 대상이 나라는 게 좀 서글펐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게 시작이구나.' 소설 속 그 장면이, 정확히 이 자리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페이지 위의 글자로만 읽었던 장면을, 지금 나는 그 한가운데 서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 마치 내가 서은하가 아니라, 서은하를 연기하는 배우가 된 것 같은 기분. 악마의 보석을 목에 걸고, 홀로 왕국을 지켜온 여자가, 오늘 밤 파멸의 첫 계단을 밟는다. 그리고 나는, 그 소설의 결말을 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 순간을 버텨야 했다. 증언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대담해졌다. 누군가는 내가 소은의 손목을 잡아 비틀었다고 했고, 누군가는 내가 소은의 드레스를 일부러 찢었다고 했다. 있지도 않은 이야기들이 마치 목격담처럼 술술 나왔다. 이시우는 그 증언들을 하나씩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처음 듣는 이야기인 척, 마치 그 자신도 놀란 척. '저 새끼, 이거 다 알고 짜놓은 거잖아.' 나는 그제야 이시우의 자주색 눈을 다시 바라봤다. 방금까지 죄책감처럼 보였던 그 눈빛이, 이제는 다르게 읽혔다. 저건 죄책감이 아니라, 각본대로 흘러가는 무대를 지켜보는 연출가의 눈이었다. 소설 속에서도 그랬다. 이시우는 처음부터 소은의 편이었다. 그리고 서은하는, 그 사실을 마지막까지 몰랐다. '그런데 나는 알잖아.' 이 생각이 나를 조금 진정시켰다. 적어도,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알고 있었다. 증언이 잦아들 무렵, 이시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증명된 것 같군요." 그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나는 부채를 접었다. 소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떠는 게 보였다. 울음을 참는 척, 아니면 정말 참는 것일 수도. '이제, 나는 뭘 해야 하지.' 소설 속 서은하는 이 순간 소리를 지르며 결백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 절규는 오히려 그녀를 더 흉악한 인물로 만들었다. 화를 낼수록, 사람들은 그녀가 죄를 지었다고 믿었다. 나는 입을 열려다 다시 다물었다. '말을 아껴야 해. 지금은.' 홀 안의 시선들이 전부 나에게 꽂혀 있었다. 기대, 경멸, 호기심. 그 시선들 속에서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그냥 아무 표정도 짓지 않기로 했다. 그때, 소은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언니…… 저는 그래도 언니를 미워하지 않아요." 그 한마디에 홀 안이 웅성거렸다. 몇몇은 감동한 얼굴로 손수건을 꺼냈다. '와.' 나는 정말로, 진심으로 웃음이 나올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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