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나는 숨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정원 나무 그늘 아래 서 있는 형체는, 사람처럼 보이면서도 어딘가 흐릿했다.
윤곽이 뿌옇게 흔들리는 게, 마치 물에 젖은 종이에 그려진 그림 같았다.
'설마, 귀신인가.'
나는 어릴 때부터 이상하게 사람이 아닌 것들을 볼 수 있었다.
남들은 못 보는 걸 나는 봤다.
처음엔 겁이 났지만, 십몇 년을 겪다 보니 이제는 그냥 무시하는 게 편했다.
말을 걸어도 안 좋은 일만 생겼으니까.
한번은 학교 화장실에서 목매달린 여자애를 봤다가 사흘 내내 가위에 눌렸다.
그 뒤로는 원칙을 세웠다.
보여도 안 본 척, 들려도 안 들린 척.
그게 지금까지 이 이상한 재능을 다루는 나만의 생존법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 형체가, 자꾸 내 창문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시하고 넘어가려 해도, 저쪽에서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오면 답이 없다.
'저러다가 밤새 서 있을 기세인데.'
나는 결국 이불을 걷고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발밑 나무 바닥이 서늘했다.
나는 창문을 조금 열었다.
찬 바람이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드디어 봤군요.』
낮고 울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입은 움직이지 않는데, 목소리는 분명히 들렸다.
마치 머릿속에 직접 울리는 것처럼.
'와, 미쳤다. 이 타이밍에 귀신이 말도 걸어?'
살면서 귀신이 먼저 대화를 시도한 적은 없었다.
대부분 그냥 서 있거나, 울거나, 나를 노려보는 게 전부였지.
이렇게 또렷하게, 대놓고 말을 거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누구세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애써 힘을 줬다.
『저는 이전에 이 궁에서 죽은 성녀입니다. 이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름이 안 중요하다니, 그럼 뭐라고 불러.'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겉으로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왜 지금 저에게 나타나신 건가요."
『당신의 보석이 반응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오랜만에 강한 정화의 힘이 흔들리는 걸 감지했지요.』
귀신, 아니 전대 성녀는 창가로 조금 더 다가왔다.
윤곽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긴 백발과, 슬픈 눈빛을 가진 여인이었다.
나이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투명한 피부 아래로 정원의 나무 그림자가 비쳐 보였고,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잔상이 한 발짝씩 늦게 따라왔다.
『당신, 곧 이 궁을 떠나게 되겠지요.』
'그것까지 알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아세요."
『이 궁에서 죽은 자는, 이 궁에서 벌어지는 일을 어느 정도 느낍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과 비슷한 운명을 겪었던 사람입니다.』
순간 나는 흥미가 생겼다.
비슷한 운명이라니.
이 세계에 나 같은 처지의 사람이 또 있었단 말인가.
"어떤 운명이었는데요."
『저 역시 이 보석을 정화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사람들의 오해와 질투 속에서 궁을 떠나야 했지요.』
『다만 저는 당신과 다르게,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말 한마디마다 무게가 실려 있어서,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떠난 후에는 어떻게 됐나요."
『제가 떠난 지 반년 만에, 보석의 봉인이 풀렸습니다. 왕국의 절반이 악마의 힘에 잠식당했지요. 그 후 저는, 죽어서도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럼 이 사람이 진짜로 나한테 경고하러 온 거네.'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소설 속 이야기와 정확히 겹치는 부분이었다.
서은하가 추방된 후, 왕국이 악마에 잠식되기 시작하는 전개.
그 전개가 소설 속 문장 몇 줄로만 스쳐 지나갔던 걸 기억한다.
'그 몇 줄이, 이 여자한텐 평생이었단 거네.'
죽어서도 못 떠나는 신세라니.
소설 밖에서 실물로 마주하니 등골이 다르게 서늘했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추방을 피할 방법은 없나요."
『이미 정해진 판결의 흐름을 완전히 뒤집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다만……』
그녀가 잠시 말을 멈췄다.
정원의 바람이 그녀의 백발을 흔드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보이도록, 그녀의 형체가 스스로 흔들리고 있는 것뿐이었다.
『완전한 추방이 아니라, 유예를 만들 방법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나라에는 성녀의 힘을 시험하는 오래된 의식이 있었지요. 그 의식을 통해 당신의 힘을 증명한다면, 판결을 미룰 여지가 생길 겁니다.』
'의식이라니, 그런 게 있었어?'
소설에는 그런 언급이 없었다.
당연했다.
이건 소설 밖의 정보, 진짜 이 세계에만 존재하는 사실이었다.
원작 소설을 몇 번이나 정독했는데도, 이런 의식 얘기는 각주로도 나온 적이 없었다.
그 말은 이 정보가 내가 가진 유일한 무기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 의식은 어떻게 치르는 건가요."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고 다급함을 눌러 담아 물었다.
『자세한 건 궁정 서고의 오래된 문서에 남아 있을 겁니다. 다만, 그 의식을 아는 사람은 지금 이 궁에 거의 없을 겁니다. 왕실도 잊은 지 오래된 관습이니까요.』
'서고라니, 거기 얼마나 넓은데.'
궁정 서고는 내가 이곳에 온 뒤로 딱 한 번 가봤던 곳이었다.
책장이 천장까지 닿아 있고, 그 책장이 미로처럼 뻗어 있는 곳.
거기서 오래된 문서 하나를 찾으라니, 막막함이 먼저 몰려왔다.
나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시작했다.
사흘.
서고에서 문서를 찾고, 의식의 방법을 알아내고, 그걸 실행할 시간까지.
턱없이 부족했다.
당장 서고 관리인한테 뭐라고 핑계를 대야 그 방대한 서가를 뒤질 수 있을지도 문제였다.
'성녀의 힘을 시험하는 의식을 찾으러 왔다고 하면 바로 소문나겠지.'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추방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고맙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저는 당신을 돕는 게 아닙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차가워졌다.
『저는, 이 왕국이 다시 그런 지옥을 겪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게 결국 나를 돕는 거잖아.'
나는 속으로만 그렇게 대꾸했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서 저 슬픈 얼굴을 더 차갑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녀의 형체가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윤곽이 다시 물에 젖은 종이처럼 풀어지고 있었다.
『하나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작아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창문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한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보석을 노리는 자가, 이 궁 안에 있습니다. 당신의 추방을 원하는 이유가, 단순한 질투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머릿속에서 몇 사람의 얼굴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누가요."
나는 창밖으로 몸을 반쯤 내밀 듯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완전히 사라진 뒤였다.
창밖의 정원에는, 나무 그늘만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 한 줄기가 아까와 똑같은 자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이제 그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그녀가 사라진 나무 그늘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였다.
당연히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창문을 닫고, 손바닥 위의 보석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검은 보석이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방금까지는 그저 목에 걸린 장신구처럼 느껴졌던 그것이, 이제는 완전히 다른 무게로 느껴졌다.
'노리는 자가 있다니.'
소은일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일까.
소은의 얼굴을 떠올리자 속이 뒤틀렸다.
그 애라면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소은은 그저 질투에 미친 조연이었을 뿐, 보석을 노릴 만한 배경이나 능력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럼 다른 누군가라는 뜻인데.
소설에는 이런 내용이 없었다.
이건 완전히 새로운 정보였고, 그만큼 불안했다.
원작의 흐름을 알고 있다는 게 나의 유일한 우위였는데, 이제 그 우위가 반쪽짜리로 느껴졌다.
내가 알던 이야기 밖에서, 뭔가가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목걸이를 다시 목에 걸었다.
차가운 보석이 목덜미에 닿는 감촉이 낯설게 느껴졌다.
사흘.
판결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더 급박하게 느껴졌다.
서고로 가야 한다.
오래된 의식의 문서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 보석을 노리는 자가 누구인지도 알아내야 한다.
할 일이 너무 많았고, 시간은 너무 적었다.
나는 창밖의 어두운 정원을 다시 한번 바라보며, 조용히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그리고 그 순간, 방문 밖에서 낮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조심스러운, 그러나 분명히 누군가의 발소리였다.
나는 숨을 삼키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