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서재는 원래 자작가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지어진 방이었다. 천장까지 닿는 책장에는 가죽으로 장정된 고서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고, 벽에는 왕실 인사들과 나란히 찍은 조명환 자작의 그림들이 금테 액자 속에서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서랍을 열어 보면 오래된 장부와 밀린 청구서들이 가득 차 있어, 겉모습과 실제 사정이 얼마나 다른지를 소이는 그 방에 들어서는 순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부엌에서 식재료를 아끼며 살아온 세월 동안, 소이는 이 저택의 화려함이 어디까지 진짜고 어디부터 허세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냅킨 한 장까지 세어 쓰던 살림살이와 벽에 걸린 초상화 속 자신만만한 표정 사이의 거리, 그것이 바로 이 집안의 실체였다.
"앉아라." 자작이 말했다. 목소리에는 위엄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배어 있었으나, 그 아래로 피곤함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소이는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방석은 낡아 있었고, 팔걸이의 니스는 오래전에 벗겨져 있었다. 자작은 잠시 서류를 뒤적였는데, 그 손짓이 유난히 느렸다. 마치 말을 꺼내기까지 시간을 벌려는 것처럼.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여진이의 방벽 마법이 사라진 지금, 이 집안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아느냐."
그 질문은 소이를 향한 것이 아니라, 자작 자신을 향한 한탄처럼 들렸다. 그는 소이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왕실에서 나온 후원금은 여진이의 이름으로 지급되던 것이었다. 방벽 마법사의 가문이라는 이유로. 그게 끊기면, 이 저택도 오래 못 버틴다. 하인들 월급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무너질 거다."
소이는 그 말에서 자작이 진짜로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딸의 실종이 아니라, 그 실종이 초래할 몰락이었다. 여진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라는 걱정보다도 후원금이 끊긴 이후의 계산이 먼저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그러니 소이야, 라고 자작이 목소리를 낮추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을 때, 소이는 이미 다음 말이 무엇일지 예감하고 있었다.
"네가 이번 조사에서 진술을 잘해 주어야 한다. 네가 아무것도 몰랐다고, 밀회 같은 건 본 적도 없다고 말해야 해."
그 말에 소이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이건 딸을 보호하려는 말이 아니라, 거짓 증언을 시키려는 것이었다. 부엌에서 자작의 서재까지 오가며 심부름을 하던 자신이, 여진의 방문 앞을 지나며 낮은 목소리와 웃음소리를 들었던 밤들을 자작이 모를 리 없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라는 것이었다.
"그건 거짓말이잖아요." 소이가 겨우 입을 열었다.
"거짓말이 아니라, 가문을 지키는 일이다." 자작이 딱딱하게 답했다. 그의 눈은 소이를 보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 너머의 무언가 — 왕실의 후원 서류, 채권자들의 얼굴, 무너지는 저택의 이미지 — 를 보고 있는 듯했다. "네가 계속 침묵했다는 게 알려지면, 조사관들은 너를 공모자로 몰 거야. 그러니 처음부터 아예 아무것도 몰랐다고 하는 게 너한테도 이롭다. 이건 널 위한 것이기도 해."
널 위한 것. 그 말이 소이의 귓가에 오래 맴돌았다. 널 위한 것이라는 말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정당화되어 왔던가. 유모에게 맡겨진 것도, 부엌 일꾼들 사이에서 자란 것도, 전부 누군가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으면서 늘 소이를 위한 것이라 불렸다.
소이는 그 순간 이 집안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다시 확인했다. 이용당하기 위한 도구. 명예를 지키기 위한 방패. 자작에게 소이는 딸이 아니라, 이번 위기를 넘기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그 계산이 너무나도 명백해서, 소이는 오히려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명예. 방패. 도구. 그 세 단어가 머릿속에서 차례로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그날 밤, 소이는 부엌 옆 작은 방에 갇힌 듯 머물러야 했다. 문이 잠긴 것은 아니었지만, 저택 곳곳에 배치된 사병들의 눈초리가 사실상의 감금이었다. 창밖으로 순찰하는 발소리가 규칙적으로 지나갔고, 그 발소리가 멈출 때마다 소이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죄어들이는 자신을 발견했다. 침대는 좁았고, 이불에서는 오래된 습기 냄새가 났다. 손끝이 차가웠다. 화가 나서인지, 두려워서인지 스스로도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 어둠 속에서 소이는 문득 한미연이 자신을 처음 이 집에 데려왔던 날을 떠올렸다. 그것은 소이 자신의 기억이 아니라, 하인들 사이에서 흘러나온 이야기였다. 소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한미연은 산파를 불러 아이의 마력 반응을 확인하게 했는데, 그 결과가 완전한 무반응으로 나왔을 때 한미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는 것이었다. 방 안에 있던 유모가 그 표정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고, 나중에 그 유모가 소이에게 지나가듯 흘린 적이 있었다.
여진을 낳았을 때는 이미 방벽의 씨앗이 보였다는 소문이 저택 안에 자랑처럼 돌았다는데, 그 소문과 대조되어 소이의 무반응은 곧 가문의 결함으로 낙인찍혔다. 마력이 없는 딸. 자작가의 핏줄이면서 자작가의 능력을 물려받지 못한 아이. 그 낙인은 소이가 걸음을 떼기도 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한미연은 그날 이후로 소이를 안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행동했다고, 나이 든 하인 하나가 예전에 지나가듯 말한 적이 있었다. 대신 유모에게, 나중에는 부엌 일꾼들에게 소이를 맡기며, 이 아이는 저택의 딸이 아니라 그저 태어난 존재로만 취급되었다. 생일에도 축하보다 형식적인 선물이 전해졌고, 식사 자리에서도 소이의 자리는 늘 끝자리였다. 그 오래된 거절이 오늘의 분노와 겹쳐지며, 소이는 비로소 한미연의 눈빛 속에 있던 그 오래된 실망의 뿌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한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이해하는 순간 더 선명하게 아팠다.
밤이 깊어지도록 잠은 오지 않았다. 소이는 몇 번이고 몸을 뒤척이며, 자작이 했던 말들을 되짚었다. 널 위한 것이야. 가문을 지키는 일이다. 그 말들이 뒤섞여 하나의 문장이 되었다가, 다시 흩어졌다.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고 말하면, 그다음엔 어떻게 되는 걸까. 여진은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나는, 이 집에서 앞으로도 이렇게 이용당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다음 날 아침, 조사관들이 다시 저택을 찾아왔다. 마차 소리가 정문 앞에 멈추자, 저택 안은 순식간에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하인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재촉했고, 복도를 지나는 발소리마저 조심스러웠다. 이번에는 조명환 자작과 한미연이 나란히 취조실 같은 응접실에 앉아 소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와 달리 두 사람 사이에는 대화가 없었고,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무겁게 느껴졌다.
문이 열리는 순간, 소이는 그 방 안에 흐르는 공기가 어제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직감했다. 어제는 자작 혼자였고, 은밀한 거래를 제안하는 자리였다. 오늘은 한미연까지 자리에 있었고, 그 표정에는 협상의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자작 부부와 조사관, 그리고 소이만이 남는 진짜 심문이 시작될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