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사부님 원수는 제가 갚습니다

3화

청류촌 어귀에는 낡은 객잔이 하나 있었다. 간판은 반쯤 떨어져 나갔지만 여전히 손님을 받는 모양이었다. 처마 끝에 걸린 등불도 절반은 그을려 있었고, 나머지 절반만 겨우 빛을 뿜었다. 이서하는 봇짐을 고쳐 메며 문턱을 넘었다. 문턱을 넘는 순간 훅- 하고 밀려오는 술 냄새와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주머니 속에는 은자 몇 냥이 전부였다. 사부가 약초를 팔아 모아둔 것이었으나, 이제는 그 사부가 없었다. '며칠은 버틸 수 있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점소이에게 방값을 물었다. "싼 방으로 하나 주시오." 그의 말투는 정중했다. 점소이는 이서하의 흙먼지 묻은 옷과 낡은 목검을 힐끗 보더니 대답 없이 손가락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대접받을 처지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서하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방으로 들어가는 길, 마당 한편에서 표사 셋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이 이서하를 흘겨보며 낮게 웃었지만, 그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싸움은 힘 있는 자들끼리나 재미난 것이다.' 그는 그렇게 여기며 걸음을 옮겼다. 방은 좁았다. 침상 하나와 낮은 탁자가 전부였다. 창틈으로 스며든 밤바람이 등불을 흔들었다. 이서하는 봇짐을 내려놓고 잠시 눈을 감았다. 사부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금세 흩어졌다. +++ 청류촌에는 표국이 하나 있었다. 상단의 물건을 지키고 길을 트는 자들이 모인 곳이었다. 전사 직업을 택한 사내들이 주로 그 일을 했고, 그중에서도 검을 다루는 이들이 표두라 불리며 위세를 부렸다. 표국의 대문은 붉은 칠이 벗겨진 채로 우뚝 서 있었고, 그 위에 걸린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이서하는 그곳을 찾아갔다. 관아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힘 있는 자들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다음 순서였다. 문지기가 그의 행색을 훑어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뭔 볼일이냐." 문지기의 말투에는 벌써 하대가 섞여 있었다. "표두님을 뵈러 왔습니다. 청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서하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문지기는 잠시 그를 위아래로 살피더니 마지못해 안으로 들여보냈다. "사부님이 살해당했습니다. 조사에 사람을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이서하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표두는 술상 앞에 앉아 있다가 게슬프게 눈을 치켜떴다. 손에는 아직 술잔이 쥐어져 있었다. "사부? 그 약초장수 노인 말이냐." 그의 목소리엔 이미 흥미가 없었다. "세간에는 무명으로 알려졌으나, 실은..." 이서하가 말을 잇으려 했다. "실은 뭐, 대단한 고수였다는 거냐?" 표두가 껄껄 웃었다. "산에서 나물이나 캐던 늙은이 죽음에 표국이 왜 움직여야 하지?" 주위의 표사들도 따라 웃었다. 비웃음이 방 안을 채웠다. 누군가는 술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더 크게 웃었다. "저희 사부는..." 이서하가 다시 입을 열었지만, 표두가 손을 저어 말을 끊었다. "됐다. 은자라도 두 냥 내면 생각해보겠다." 그의 태도는 단호했다. 이서하는 주머니를 뒤졌으나, 남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손끝에 닿는 동전 몇 개가 전부였다. 그것으로는 표두의 말 한마디도 사지 못했다. "두 냥이 없으면 나가라." 표두가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힘없는 자의 말은 그저 소음일 뿐이다.' 그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며 몸을 돌렸다. 표국 문을 나서는 그의 등 뒤로 조롱하는 웃음소리가 오래도록 따라붙었다. 문지기마저 그를 배웅하며 낮게 비웃었다. "노인네 하나 죽었다고 유세는..." 이서하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할 가치조차 없었다. +++ 저잣거리는 여전히 시끄러웠다. 상인들이 소리를 지르며 물건을 팔고, 아이들이 그 사이를 뛰어다녔다. 어물전 주인이 생선을 손질하며 흥정을 붙였고, 포목점 앞에는 색색의 천이 걸려 있었다. 이서하는 곽태산이 발견된 뒷골목 근처를 서성이며 사람들의 말을 귀에 담았다. 뒷골목 입구에는 아직 핏자국이 마르지 않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 급히 흙을 덮어놓은 듯했지만,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다. 이서하는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섰다. 사부가 마지막으로 숨을 거둔 자리였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는 눈을 감고 그날의 흔적을 더듬으려 했으나, 남은 것은 침묵뿐이었다. 주막 앞에 앉은 늙은 아주머니 하나가 옆 사람에게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 노인네 말이야, 청류산 약초꾼. 죽은 채로 뒷골목에서 나왔다지." "그러게. 근데 그 노인, 예전에 딴 이름으로 불렸다는 얘기도 있어." 상대가 맞장구쳤다. "딴 이름?" 아주머니가 눈을 크게 떴다. "몰라, 나도 들은 얘기니까. 삼십 년 전쯤에 뭔가 큰 사고가 있었다던데, 그때 이름을 감추고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있었다더군." 상대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그 노인도 그중 하나였다는 거야?" 아주머니가 다시 물었다. "글쎄. 확실한 건 아니고, 그냥 그런 소문이 돌았다는 것뿐이지." 상대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흐렸다. 이서하는 걸음을 멈추고 그 말을 되새겼다. '사부님이 이름을 감추었다니.' 그의 속에서 낯선 불안이 번졌다. 곽태산은 늘 산속에서 조용히 살았다. 세상과의 인연을 끊은 듯한 태도로. 사부는 손이 거칠었다. 약초를 캐는 사람의 손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서하는 그것을 이상하게 여긴 적이 있었지만, 묻지 않았다. "산 아래 일에는 관심 두지 말라." 사부는 종종 그렇게 말했었다. 그 말속에 감춰진 것이 무엇이었는지, 이서하는 그제야 다시 묻고 싶어졌다. 하지만 물을 상대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그는 저잣거리를 좀 더 서성이며 다른 말들을 주워들으려 했으나, 더 이상 사부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의 관심은 이미 다른 소문으로 옮겨간 뒤였다. +++ 밤이 깊었다. 객잔의 좁은 방 안에서 이서하는 봇짐을 풀었다. 목검과 서찰이 등불 아래 놓였다. 방 안은 조용했다. 아래층에서 술 취한 목소리가 간간이 올라왔지만, 곧 잠잠해졌다. 서찰에는 낯선 부호들이 줄지어 적혀 있었다. 글자도 아니고 그림도 아닌, 매듭처럼 얽힌 표식이었다. 이서하는 그것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았지만 뜻을 알 수 없었다. 등불에 서찰을 비춰보니 종이 자체도 흔한 것이 아니었다. 얇고 질겼으며, 손끝에 닿는 감촉이 매끈했다. '사부님은 왜 이런 것을 숨겨두셨을까.' 그는 손끝으로 서찰의 표식을 하나씩 따라 그렸다. 그러다 목검의 손잡이 끝을 유심히 살폈다. 오래 써서 반들반들해진 나무 표면에, 작은 각인이 하나 있었다. 비늘처럼 겹쳐진 무늬였다. 서찰의 부호 중 하나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이서하는 등불을 가까이 가져갔다. 손끝으로 각인을 몇 번이고 문질러보았다. 오래된 것이라 흐릿했지만, 분명 사람이 새긴 것이었다. 낮에 표국에 걸려 있던 깃발이 떠올랐다. 그 깃발에도 비슷한 무늬가 있었던 것 같았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분명 눈에 익은 형상이었다. 바람에 펄럭이던 깃발, 그 위에 그려진 문양. 그저 스쳐 지나가듯 보았던 것인데, 지금 다시 떠올리니 예사롭지 않았다. '그 문양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 이서하는 그렇게 결심하며 서찰을 조심스레 접어 품속에 넣었다. 등불이 흔들렸다. 창밖에서 낮게 개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목검을 다시 쥐어보았다. 손에 닿는 감촉이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사부가 살아 있을 때는 이 목검이 그저 훈련용 도구인 줄로만 알았다. 이제 와서 보니, 그 안에 무언가 다른 뜻이 새겨져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부가 남긴 것은 유품이 아니라, 아직 풀리지 않은 물음이었다. 그 물음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날이 밝는 대로 다시 표국 앞으로 가야 했다. 이서하는 등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그는 오래도록 눈을 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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