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사부님 원수는 제가 갚습니다

5화

그림자는 골목 어귀에서 멈추었다. 두건 아래로 눈만 보였다. 무표정한 눈이었다. 밤바람이 골목을 훑고 지나가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담벼락 틈새로 스며든 달빛이 그림자의 발끝에 옅게 걸렸다. 이서하는 목검을 앞으로 겨누며 뒤로 반걸음 물러섰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누구십니까." 그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 있었다. 그림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끝에서 검은 실 같은 기운이 얇게 피어올랐다. 그 기운은 살아 있는 것처럼 손가락 사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저것이 자객이라는 직업의 기운인가.' 이서하는 짐작만 할 뿐이었다. 청류산에서는 오행이나 직업 같은 것을 배운 적이 없었다. 사부는 오직 목검의 초식만을 가르쳤다. 다른 것을 물으면 항상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검을 쥔 손이 흔들리지 않으면, 나머지는 몸이 알아서 배운다." 곽태산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 말을 지금 이 순간 되새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지, 이서하는 알 수 없었다. 그림자가 손을 까딱였다. 다시 걸어오라는 뜻이었는지, 혹은 경고였는지 알 수 없었다. 이서하는 침을 삼키며 상황을 가늠했다. 도망칠 길은 좁았다. 뒤는 막힌 벽이었다. 좌우로도 담이 높았다. 넘을 시간을 그림자가 줄 리 없었다. '퇴로가 없다.' 그는 그것을 깨달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그 서늘함이 오히려 정신을 붙잡아 주었다. "곽태산을 아십니까." 이서하가 다시 물었다.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 이름이 나오자, 두건 아래 그림자의 눈이 처음으로 반응했다. 눈매가 미세하게 좁아졌다. '반응했다.' 이서하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이 그림자가 사부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확신이 드는 순간, 두려움보다 더 큰 무언가가 가슴 밑바닥에서 끓어올랐다. +++ 그림자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허리춤에서 얇은 단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칼날이 달빛을 받아 검게 빛났다. 날의 폭이 좁고 길이가 짧아, 근접전에 특화된 무기라는 것을 이서하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말할 생각이 없으신 모양이군요." 이서하가 목검을 고쳐 쥐었다. 손목에 힘을 실었다. 그림자가 먼저 움직였다. 발끝이 지면을 스치듯 미끄러지며 거리를 좁혀왔다. 발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쉭- 단검이 이서하의 옆구리를 노리고 파고들었다. 이서하는 몸을 틀며 목검으로 그것을 받아냈다. 퍽! 둔탁한 충돌음과 함께 손목까지 저릿한 충격이 전해졌다. '힘이 다르다.' 그는 그것을 곧바로 느꼈다. 사부와 나누던 대련과는 차원이 다른 무게였다. 사부는 늘 힘을 절반만 쓰라고 했었다. 지금 눈앞의 상대는 절반도 감추지 않은 힘이었다. 그림자는 물러서지 않고 연달아 두 번, 세 번 단검을 뻗었다. 이서하는 겨우 막아내며 뒷걸음질쳤다. 목검이 부딪힐 때마다 팔 전체가 울렸다. 등이 벽에 닿았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차가운 벽돌의 감촉이 등을 통해 전해졌다. 그것이 오히려 정신을 다잡게 만들었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그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사부가 예전에 하던 말이 불쑥 떠올랐다. "검은 힘으로 쓰는 것이 아니다. 상대의 다음 걸음을 읽는 것이다." 곽태산은 그렇게 가르쳤다. 그때는 그 말이 그저 흔한 무공 격언처럼 들렸다. 지금은 그 한 문장이 유일한 살길처럼 느껴졌다. 이서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림자의 발끝을 주시했다. 숨을 짧게, 얕게 쉬며 시선을 흩트리지 않았다. +++ 그림자의 발이 살짝 파였다. 다음 공격이 왼쪽에서 올 것을 알리는 조짐이었다. 이서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몸을 오른쪽으로 비틀었다. 쉭- 단검이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살갗이 얕게 베였지만, 치명상은 피했다. 뜨끈한 것이 옆구리를 타고 흘렀다. 피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 틈에 이서하는 목검을 휘둘렀다. 퍽! 목검이 그림자의 어깨를 스치듯 때렸다. 완전히 맞지는 않았지만, 처음으로 이서하가 낸 유효한 반격이었다. 그림자가 처음으로 낮게 신음을 흘렸다. 그 신음이 이서하에게는 이상하게도 안도로 다가왔다. '통한다.' 그는 생각했다. '이 자도 사람이다.' "제법이군." 그림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묵룡회에서 오셨습니까." 이서하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그 이름에 그림자의 손이 잠시 멈췄다. 아주 짧은 정지였지만 이서하는 분명히 보았다. "그 이름을 아는 놈이 살아 있었다니." 그림자의 눈빛이 달라졌다. 흥미와 경계가 뒤섞인 눈빛이었다. "그 노인의 제자였나." 그림자가 물었다. 처음으로 하대하는 말투였다. "제 사부님을 죽인 것이 당신입니까." 이서하의 목소리가 떨렸다. 분노와 두려움이 동시에 차올랐다. 그림자는 대답 대신 단검을 고쳐 쥐었다. 칼끝이 다시 이서하를 향했다. "그 늙은이가 살아 있었다는 것부터가 실수였지. 제자까지 남겼다면, 더 큰 실수였고." 그림자가 낮게 웃었다. 웃음소리에 온기가 하나도 없었다. 그 말로 충분했다. 이서하는 눈앞의 상대가 사부를 죽인 자, 혹은 그와 같은 무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확신은 곧 무게로 바뀌어 어깨를 눌렀다. 도망칠 생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 자를 여기서 놓치면 안 된다.' 그는 그렇게 결심하며 목검을 고쳐 쥐었다. 손끝이 저렸지만, 쥔 손을 풀 생각은 없었다. +++ 그림자가 두건을 슬쩍 걷어올렸다. 드러난 얼굴은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인상이었다. 눈가에 옅은 흉터 하나가 있었다. 오래된 상처처럼 보였다. "이름을 알아 두고 죽어야 억울하지 않을 테지. 혈영이라 불린다." 그림자, 혈영이 말했다. "혈영." 이서하는 그 이름을 되새겼다. 잊지 않을 이름이었다. 뼈에 새기듯 그렇게 새겼다. 혈영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짙어졌다. 단순한 살기가 아니라, 실제로 형체를 갖춘 기였다. 기운은 그의 팔을 타고 단검까지 뻗어나가, 칼날 자체가 검은빛을 머금은 것처럼 보였다. '저것이 완성된 자의 기운인가.' 이서하는 자신의 체내에서 흐르는 미약한 기운과 그것을 비교하며 아득함을 느꼈다. 격차가 너무 컸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 격차를 잰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산속에서 목검이나 휘두르던 놈이 여기까지 쫓아온 것은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다." 혈영이 단검을 들어 올렸다. "제 사부님의 목숨값을 받으러 왔습니다." 이서하가 목검을 정면으로 겨누었다. 두려움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물러설 곳은 이미 없었다. '검은 힘으로 쓰는 것이 아니다.' 사부의 말이 다시 한번 머릿속을 스쳤다. '상대의 다음 걸음을 읽는 것이다.' 골목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달빛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벽에 길게 늘어졌다. 바람 한 줄기가 두 사람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마저 멈춘 듯한 순간이었다. 혈영의 발끝이 지면을 밀어냈다. 이번에는 장난이 아니었다. 진짜 생사결이 그렇게, 소리 없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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