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주저앉은 채로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하늘의 달 두 개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나는 그게 뭔가 감시 카메라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이상했다.
CCTV라고 해도 저렇게 노골적으로 두 개나 달려있으면 사생활 침해 아닌가.
민원을 넣고 싶었지만 이 세계에 구청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있다 해도 하늘에 뜬 달을 어떻게 신고하겠어, 담당 부서가 어디야.
"3일 안에 죽을 확률 87%라니."
혼자 중얼거렸다.
확률로 말하면 왠지 더 객관적으로 들려서 무섭다.
주관적인 '너 곧 죽어' 보다 통계로 말하는 '87%'가 더 살인적으로 느껴진다.
차라리 100%라고 하면 포기하고 편하게 죽음을 준비할 텐데, 저 13%의 여지가 사람을 더 미치게 만든다.
로또 1등 확률보다는 훨씬 높은데, 하필 그게 내 생존 확률이라는 게 어이가 없었다.
손에 든 성경을 다시 살펴봤다.
표지는 가죽 재질처럼 보였는데 만져보니 미묘하게 차가웠다.
금속인가?
손톱으로 긁어봤더니 긁히지도 않았다.
이거 뭐 인듐이나 티타늄으로 만든 성경이라도 되는 거야.
십자가 문양 아래 작은 숫자가 각인되어 있었다.
4124호.
"뭐야, 이거 시리얼 넘버 있는 거야?"
한정판 굿즈도 아니고 성경에 시리얼 넘버가 붙어있다니, 이거 진짜 무슨 회사에서 만든 거지.
설마 4123번째 성경도 어딘가 굴러다니고 있나.
그 4123번째 주인은 나보다 먼저 이런 꼴을 당했을까.
동병상련이라도 만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표지를 열어보려 했지만 열리지 않았다.
마치 접착이 되어있는 것처럼 딱 붙어 있었다.
손톱으로 틈을 벌려보려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이번엔 아예 손가락 전체를 표지 사이에 끼워 넣고 힘껏 잡아당겨봤다.
꿈쩍도 안 했다.
심지어 나무에 대고 모서리로 내리쳐봤는데도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고장난 거 아냐, 이거."
정품 등록을 해야 열리는 시스템인가.
아니면 뭔가 특정 조건이 있는 건가.
서비스 센터에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이 세계엔 통신사가 없을 것 같았다.
있으면 좋겠다, 진짜.
그 순간이었다.
키에에에에엑!
숲 저편에서 짐승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소리가 울렸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성경은 반사적으로 옷 안쪽에 쑤셔 넣었다.
이 와중에 소지품 관리는 철저하게 되는 내가 좀 웃기다.
뭐지?
설마 몰래카메라의 마지막 반전은 진짜 몬스터 등장인가.
그럴 리가.
방금까지 87% 확률로 죽는다는 얘기 듣고 앉아서 성경 만지작거리던 나한테 이제 진짜 괴물이 나타난다고?
너무 친절한 전개 아닌가, 이거.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나무들 사이로 붉은 빛덩어리가 튀어나왔다.
촤아아아악!
빛덩어리는 사람 크기만 했고, 형체는 흐릿했지만 그 안에 뭔가 눈처럼 보이는 부분이 두 개 박혀 있었다.
그것이 나를 스쳐지나가며 남긴 열기가 얼굴에 확 와닿았다.
뜨겁다.
진짜 뜨겁다.
이거 CG가 아니라 실체가 있는 거잖아.
사우나에서 열기 뿜는 돌 근처를 지나가면 이런 느낌일까, 아니 그거보다 훨씬 더했다.
피부가 그대로 익어버릴 것 같은 열감에 나도 모르게 팔로 얼굴을 가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숨을 죽이고 살펴보니, 그 붉은 빛덩어리가 도망치는 방향에서 또 다른 빛이 쫓아오고 있었다.
이번엔 보랏빛이었다.
그 보랏빛 안에는 사람의 형체가 또렷하게 보였다.
장포를 입은 남자였는데, 발이 땅에 닿지 않고 허공을 걷듯 움직였다.
"...와."
나도 모르게 육성이 나왔다.
이거 완전 무협영화 와이어 액션 아니냐.
근데 와이어가 안 보이는데.
설마 CG를 실시간으로 렌더링 하는 건가, 그런 기술이 있으면 벌써 어디 영화제 상 받았어야 하는데.
보랏빛 도사는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보라색 광선이 뿜어져 나와 붉은 빛덩어리를 향해 날아갔다.
피이이이잉!
붉은 빛덩어리가 몸을 비틀어 광선을 피했다.
그 반응 속도가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저 정도면 격투 게임에서 프레임 단위로 패턴 외운 고인물 같은데, 상대는 그런 계산 없이 그냥 본능적으로 피하는 것 같았다.
공정하지가 않다.
[욥기 41:1,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낚을 수 있겠느냐]
지금 딱 이 상황인데, 낚는 쪽도 낚이는 쪽도 다 나랑은 상관없는 존재들이라 다행이다.
나는 그냥 낚싯대도 없고 미끼도 없는 구경꾼일 뿐이다.
제발 이대로 아무 일 없이 끝나줬으면 좋겠다.
도사가 뭔가 소리쳤다.
"이 요물, 300년 봉인이 풀렸다 하여 어디 함부로 날뛰려느냐!"
요물?
300년 봉인?
아니, 잠깐만.
이거 진짜 무협 판타지 세계관이잖아.
내가 지금 뭘 목격하고 있는 거지.
방금 전까지 확률이랑 시스템 메시지 같은 게임적인 텍스트가 뜨더니 이번엔 대뜩 무협이야.
장르가 섞여도 이렇게 마구잡이로 섞이면 정통성이 없다, 이건 편집자가 있으면 반려당할 만한 구성인데.
붉은 빛덩어리가 갈라지듯 형체를 바꿨다.
순식간에 피처럼 붉은 액체가 되어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촤르르르륵!
혈도(血遁)라는 게 이런 건가.
나중에 알게 된 이름이지만, 그때는 그냥 '피가 땅으로 흡수되는 개좋소 기술'로 인식했다.
배수구로 물 빠지는 소리랑 비슷했는데, 저게 사람이었다면 하수구 역류 신고를 해야 할 것 같은 규모였다.
도사가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고 나는 이상하게 안도했다.
아, 이 사람도 놀라긴 하는구나.
인간적이다.
저 사람도 회사에서 갑자기 상사한테 예상 못한 질문 받으면 저런 표정 짓겠지, 라는 생각이 스치는 걸 보니 나도 참 어지간히 현실적인 인간이다 싶었다.
그 순간, 도사의 시선이 이쪽으로 돌아갔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
숨어봤자 이미 늦었다.
나무 뒤에 숨은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정도로 정확하게 나를 짚어내는 시선이었다.
술래잡기라면 나는 벌써 아웃이었다.
도사가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장포 자락이 바람에 날리는 게 무슨 화보 촬영 같았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감상이나 하는 내가 제정신인가 싶었다.
목숨이 위험한 순간에도 남자 얼굴은 눈에 들어오나 보다.
나중에 이 얘기를 누구한테 하면 미친놈 소리 들을 것 같아서 그냥 혼자 묻어두기로 했다.
"거기, 뭐 하는 자인가?"
도사의 목소리는 낮고 위엄이 있었다.
"이곳은 함부로 들어올 곳이 아니다."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항복의 표시인지 그냥 반사적인 동작인지 나도 헷갈렸다.
"저, 저는 그냥... 어쩌다 여기로 오게 된 거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뭘 어떻게 설명해야 이 상황을 믿게 만들 수 있을지 감이 안 왔다.
'제가 원래는 도시에서 밥 벌어먹고 살던 사람인데 정신 차려보니 여기였습니다' 라고 하면 믿어줄까.
아니, 나도 안 믿길 것 같은 얘기를 저 사람이 믿어줄 리가.
도사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 시선이 내 옷차림에서 멈췄다가, 신발에서 멈췄다가, 결국 옷 안쪽으로 삐죽 튀어나온 성경 모서리에 딱 멈췄다.
"그건..."
도사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놀람인지 경계인지 구분이 안 갔다.
"어디서 그것을 얻었는가."
목소리에 아까와는 다른 무게가 실려 있었다.
저 표정, 저 목소리.
이거 뭔가 심상치 않은 물건을 들고 있다는 확신이 그제서야 들었다.
"이건 그냥, 이상한 드론 같은 게 주고 갔는데요..."
말하면서도 내가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론이라는 단어를 이 세계 사람이 알아들을 리가 없잖아.
차라리 '하늘에서 이상한 새 같은 게 떨어뜨렸다'고 하는 게 더 통했을지도 모른다.
언어의 장벽이 이렇게 뼈저리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전이체 확인. 강민준. 위협도 판정 불가.]
갑자기 대괄호 텍스트가 다시 떴다.
뭐야, 이번엔 또 뭔데.
전이체라니, 무슨 게임 스킬 명 같은 이름을 지어놓고선 위협도는 판정 불가라니.
그냥 '심신미약자'라고 솔직하게 써주면 안 되나.
도사가 뭔가 손짓을 하려던 그 순간, 땅 밑에서 붉은 액체가 다시 솟아올랐다.
촤악!
도망친 척 하던 그 빛덩어리, 요괴가 배후를 노리고 있었던 거였다.
아까 그 하수구 역류 같은 소리를 내며 스며들었던 게 그냥 도망친 게 아니라 우회해서 다시 돌아온 거였다니.
이게 짐승의 지능인가, 아니면 저것도 나름 전략이라는 게 있는 건가.
"위험하다!"
도사가 소리치며 몸을 돌렸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도망치는 것도 재능이 필요하다는 걸, 이번엔 몸으로 배우게 될 것 같았다.
발이 땅에 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고, 머릿속에서는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다리는 그 어느 것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아, 이대로 87%의 확률이 그대로 실현되는 건가.
통계라는 게 이렇게 빨리 맞아떨어질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