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사용자님의 가치점 잔고는 현재 3,200점입니다.]
"3,200점이라니, 그게 많은 건가 적은 건가."
나는 손바닥에 든 성경을 뒤집어보며 중얼거렸다.
표지에 딱히 잔고 표시창 같은 게 뜨는 것도 아니고, 그냥 머릿속에 텍스트가 떠오르는 방식이라 은행 앱 확인하는 기분은 전혀 안 났다.
차라리 토스뱅크처럼 숫자 크게 띄워주면 좀 낫지 않나.
[상대적입니다. 참고로 표준 생수 한 병을 구현하는 데 약 5점이 소모됩니다.]
생수 한 병에 5점.
그럼 3,200점이면 생수 640병.
대형마트 창고 하나 채울 분량이네, 이거.
아니 근데 나 지금 목숨 걸린 판인데 생수 개수로 환산해서 좋아하고 있는 거 실화냐.
"그럼 라면은? 컵라면 하나에는 몇 점 드는데?"
[해당 질문은 우선순위가 낮습니다. 필요 시 직접 시도해보시기 바랍니다.]
와, 이거 완전 고객센터가 "일단 해보세요"로 응대 종료하는 스타일이잖아.
콜센터 상담원이 "저희도 정확히는 모르고요, 한번 해보시고 안 되면 다시 연락 주세요" 하는 그 느낌.
[가치점은 사용자가 겪는 사건, 감정적 경험, 또는 특정 조건 충족 시 축적됩니다. 정확한 산정 기준은 비공개입니다.]
"비공개면 나는 뭘 어떻게 알고 관리하라는 거야."
[경험적으로 습득하시면 됩니다.]
뭐야, 이거 완전 관공서 민원 응대 스타일이잖아.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 참조 바랍니다" 같은 느낌.
아니 홈페이지도 없잖아, 여기 청현대륙에 인터넷이 있을 리가 없잖냐고.
"그럼 최소한 예시 몇 개만이라도 알려줘. 뭐 했을 때 점수가 확 오르는지."
[비공개입니다.]
한 글자로 딱 끊어버리네.
성경 자체가 완전 갑질하는 임대인 같은 태도다.
계약 조건은 안 알려주면서 월세는 꼭 받아가겠다는 그런 태도.
[구현 가능한 대상에는 제한이 있습니다. 사용자의 지식·경험·기억의 범위를 초과하는 대상은 구현할 수 없으며, 등급이 높은 대상일수록 소모되는 가치점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합니다.]
"그럼 예를 들어서... 총 같은 것도 되나?"
[가능합니다. 다만 사용자가 총기의 정확한 구조와 작동 원리를 이해하고 있어야 완전한 성능으로 구현됩니다. 불완전한 지식으로 구현할 경우 결함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와, 이거 진짜 게임 시스템이네.
스킬트리도 있나 물어보고 싶었는데 시간이 아까워서 참았다.
대신 다른 걸 물었다.
"내가 아는 거라곤 밀리터리 다큐랑 서브컬처 만화에서 본 게 전부인데, 그거로도 돼?"
[해당 지식은 파편적이며 구현 시 성능이 크게 저하될 수 있습니다. 권장하지 않습니다.]
역시나.
넷플릭스 다큐로 배운 지식으로 M4 카빈을 만들었다가 총알이 반대로 튀어나오면 그건 완전 재앙이지.
차라리 그냥 돌멩이 던지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구현물은 사용자가 시야 내에서 직접 소환해야 하며, 저장 공간에 미리 보관해둘 수도 있습니다. 저장 공간은 별도의 차원 공간으로, 부패나 손상 없이 물품을 무한정 보관합니다.]
무한 저장 공간이라니, 이거 완전 인벤토리잖아.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렸다.
무직으로 살면서 늘어난 건 배 나온 살뿐이었는데, 이제 뭔가 진짜 능력이라는 걸 손에 쥔 기분이었다.
편의점 알바 잘리고 나서 이력서 쓸 때마다 특기란에 뭘 써야 하나 고민했었는데, 이제 그 칸에 '차원 저장 인벤토리 사용 가능'이라고 써도 되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이 세계 이력서 양식이 있을 리는 없겠지만.
"그럼 저장 공간에 넣을 수 있는 용량은 얼마나 돼? 한계가 있어?"
[현재 사용자의 등급으로는 대략 성인 남성 한 명이 들 수 있는 부피의 스무 배까지 수용 가능합니다. 등급이 오르면 확장됩니다.]
성인 남성 한 명이 들 수 있는 부피의 스무 배라니, 이거 완전 이삿짐센터 트럭 한 대 분량 아닌가.
1톤 트럭 스무 대는 아니고, 대충 5톤 트럭 한 대? 뭐 정확한 계산은 모르겠고 아무튼 많다는 것만 알겠다.
[다만 경고합니다. 성경 자체의 소유권은 사용자에게 없습니다. 이 물건은 대여된 것이며, 회수 조건이 존재합니다.]
갑자기 흥이 확 깨졌다.
"회수 조건이 뭔데?"
[해당 정보는 현재 접근 권한이 없습니다.]
"뭐야, 그럼 뭐 하러 말해준 거야."
[경고는 반드시 전달해야 하는 프로토콜입니다. 조건 자체는 비공개입니다.]
이거 완전 임대차 계약서 같은 거잖아.
계약서 12페이지 소액 글씨로 '단, 임대인의 재량에 따라 조건이 변경될 수 있음' 써놓고 실제 내용은 안 알려주는 그런 악질 계약서.
전세 사기 당한 친구 놈이 딱 이런 표정으로 나한테 하소연했던 게 기억난다.
설마 나도 성경한테 전세 사기 당하는 건 아니겠지.
"혹시 회수될 때 미리 경고라도 해줘?"
[해당 정보 역시 비공개입니다.]
아, 그럼 그냥 어느 날 갑자기 뿅 하고 사라지는 거네.
꼭 배달앱 쿠폰 만료되는 것처럼, "사용 기한이 지났습니다" 뜨고 나면 아무리 항의해도 소용없는 그런 거잖아.
[남은 활성 시간은 12분입니다. 추가 질문이 있으시면 지금 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급하게 머리를 굴렸다.
지금 안 물어보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르니까.
시험 종료 5분 전에 답안지 마킹 미친 듯이 하던 그 감각이 되살아났다.
"이 세계, 청현대륙이라는 곳은 어떤 곳이야?"
[청현대륙은 수련 문명이 발전한 세계입니다. 무공, 도술, 요괴학 등이 체계화되어 있으며, 힘의 등급에 따라 신분과 권력이 결정되는 봉건적 계층 사회입니다.]
힘이 곧 법이라던 도사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아까 그 도사 표정 봤을 때부터 알았다, 이 세계는 대충 힘 순서로 서열 정리되는 그런 동네라는 걸.
학교 다닐 때 체육 잘하는 애들이 반장 하는 그런 논리와 비슷한 건가, 그것보다는 훨씬 더 살벌하겠지만.
"그럼 나는 이 세계에서 어느 정도 위치야?"
[사용자의 현재 전투력은 최하위입니다. 다만 성경의 구현 능력은 대륙 내 알려진 유물 중 최상위 등급으로 추정됩니다.]
"...뭐라고?"
최하위 인간이 최상위 아이템을 들고 있다니, 이거 완전 게임 초보가 사고로 SSR 뽑은 상황 아닌가.
가챠 첫 뽑기에서 확률 0.1% 캐릭터 뽑았는데 계정 레벨은 1인 그런 그림.
근데 그거 좋아할 일이 아니지, 레벨 1짜리가 SSR 캐릭터 들고 다니면 그거 자체가 표적이 되는 법이니까.
[다만 등급의 격차가 크면 오히려 표적이 될 위험도 커집니다. 은닉을 권고합니다.]
은닉이라니, 그럼 그 도사 앞에서 대놓고 성경 얘기한 건 뭐가 되는 건데.
아까 그 도사 눈빛이 반짝거리던 게 그제야 다시 떠올랐다.
설마 그 반짝임이 '이거 뭔가 값나가는 물건인데' 하는 그런 반짝임이었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아까 그 도사, 위험한 사람이야?"
[해당 개체는 위협도 낮음으로 판정됩니다. 다만 정보 유출 가능성이 있으니 향후 접촉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정보 유출 가능성이라니.
그 도사가 어디 가서 "저기 저 이상한 놈이 엄청난 유물 갖고 있더라" 하고 떠벌리면 그거야말로 진짜 대참사 아닌가.
SNS에 위치 태그 걸고 자랑하다가 도둑 든 사람 심정이 이런 건가 싶었다.
[남은 활성 시간은 5분입니다.]
마음이 급해졌다.
뭐 더 물어봐야 할까.
"내가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뭘 해야 해?"
[가치점을 축적하고, 구현 능력의 사용 규칙을 숙지하십시오. 그리고...]
안내구가 잠깐 멈췄다.
그 정적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뭐지, 왜 갑자기 뜸을 들이는 거지.
설마 이것도 유료 정보라서 결제 안내라도 하려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스쳤다.
[경고합니다. 이 지역에서 인간의 고통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방향은 북동쪽, 약 500미터.]
"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인간의 고통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누가 다쳤다는 건가, 아니면 누가 죽어가고 있다는 건가.
"그게 무슨 뜻이야, 구체적으로 말해봐."
[해당 정보에 대한 상세 접근 권한이 없습니다.]
또 그놈의 권한 없음이다.
이 성경, 진짜 필요할 때는 항상 접근 권한이 없다고 한다.
공무원 민원 창구에 가서 "그건 저희 담당이 아니라서요" 소리 듣는 기분이 딱 이런 거겠지.
"사용자의 의사결정은 사용자의 몫입니다. 다만 참고 정보로 전달합니다."
안내구는 그 말을 남기고 스스로 빛을 줄이기 시작했다.
빛이 줄어드는 속도가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다는 게, 이 대화가 정말로 끝나가고 있다는 걸 실감나게 만들었다.
[남은 활성 시간은 1분입니다. 다음 활성화 조건은 추후 안내됩니다.]
"야, 잠깐, 더 물어볼 거 있는데..."
"그 회수 조건이라도 좀 알려줘, 응? 어? 최소한 몇 % 남았는지라도!"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뻐엉!
안내구는 그대로 빛으로 흩어지며 성경 속으로 다시 흡수되었다.
정적이 남았다.
나는 손에 든 성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표지가 다시 닫혀 있었다.
방금까지 그렇게 수다스럽던 놈이 이렇게 순식간에 입을 다물어버리니 괜히 서운한 기분까지 들었다.
아니, 이게 서운할 일인가.
나 지금 정신이 좀 이상해진 것 같다.
북동쪽 500미터에서 인간의 고통이 감지된다니.
[전도서 3: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지금은 뭘 할 때지, 도망칠 때인가 아니면 가볼 때인가.
머릿속으로는 온갖 계산이 오갔다.
나는 최하위 전투력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세계는 힘이 곧 법인 봉건적 계층 사회라고 했다.
누군가 고통받고 있다는 곳에 무작정 뛰어들었다가 나까지 그 고통의 일부가 되는 거 아닌가.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백 프로 도망쳐야 하는 상황이다.
편의점 알바 시절, 손님이랑 시비 붙은 취객 보면 사장님이 항상 "괜히 끼지 말고 신고만 해" 하셨던 게 떠올랐다.
지금이 딱 그거랑 같은 상황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무신론자에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내가, 뭔가 정의감에 불타서 움직인다는 게 웃겼다.
정의감 같은 거창한 단어 붙이기도 민망하다, 그냥 오지랖이겠지.
하지만 그 웃긴 생각과는 별개로, 내 발은 이미 북동쪽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풀숲을 헤치는 소리가 사각사각 귓가에 울렸다.
어디선가 바람에 실려 오는 냄새가 있었다.
피 냄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