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약한 척하는 전생 검신

1화

칼끝이 심장을 뚫는 순간, 나는 웃었다. 비웃음이 아니었다. 그저 어이가 없어서 나온 웃음이었다. 이십 년을 갈고닦은 검술이, 방계라는 이유로 문파의 뒷방에서 홀대받으며 쌓아온 그 모든 것이, 결국 사문의 정통 후계자라는 자의 검 아래 무너지는구나. 그것도 겨우 삼십 대에. 상대의 눈을 봤다. 승리를 확신한 눈이었다. 흔들림이 없었다. 그 눈빛 하나로 알 수 있었다. 저자는 처음부터 나를 이길 수 있다고 믿은 게 아니라, 내가 질 수밖에 없다고 믿은 것이다. 방계의 검은 정통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을,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순서처럼 믿어온 자였다. 억울했다. 그 억울함이 웃음으로 튀어나온 것뿐이었다. 피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비릿하고 뜨거웠다. 나는 쓰러지며 마지막으로 하늘을 봤다. 흐린 하늘이었다.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그 사이로 유하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세 글자. 그것 하나를 못 해서 이렇게 억울하게 죽는구나 싶었다. 사랑한다, 그 말을 왜 그렇게 아꼈을까. 아버지, 이현성. 당신은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신 겁니까. 최강자라 불리던 당신의 아들이, 방계라는 이름 하나로 이렇게 허무하게 죽습니다. 당신이 있었다면, 최소한 당신의 성만 제대로 썼더라면, 나는 이런 검 아래 쓰러지지 않았을 겁니다. 의식이 끊겼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다. 어둡고 좁은 공간이었다. 흙냄새가 짙게 났다. 습기를 머금은 나무 냄새였다. 손을 뻗으니 딱딱한 벽이 만져졌다. 관이었다. 나는 관 속에 있었다. 숨이 막혀왔다. 심장이 다시 뛰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자각했다. 손끝이 떨렸다. 나는 힘껏 관 뚜껑을 밀었다. 예상보다 쉽게 열렸다. 오래되어 썩은 나무였다. 뚜껑이 부서지는 소리가 텅 빈 공간에 크게 울렸다. 밖으로 나온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석실이었다. 사방이 돌로 막혀 있었다. 벽에 새겨진 문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낯설었다. 아니, 낯설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내가 알던 그 어떤 글자도 아니었다. 상형문자도, 초서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획 하나하나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게 오히려 더 이질적이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는 죽었다. 분명히 죽었다. 심장이 뚫리는 감각을, 피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감각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어디인가. 명계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세계인가. 몸을 움직여봤다. 관절이 뻑뻑하지 않았다. 근육에 힘이 잘 들어갔다. 죽었다 살아난 몸이라기엔 이상하게 멀쩍했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가벼운 느낌이었다. 마치 이십 대 초반, 검을 처음 쥐었을 때의 몸 같았다. 석실 밖으로 걸어나갔다. 다리가 떨렸다. 하지만 그 떨림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낯선 몸에 대한 적응 반응이었다. 나는 걸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답은 정해져 있었다. 관찰. 그리고 판단. 그때였다.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몸에 익은 습관이었다. 적인지 아군인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먼저 낮추고 본다. 결투에서 배운 유일한 교훈이었다. 방심하는 순간 목이 떨어진다. 나는 그것을 몸으로 배웠다. 노파였다. 등이 굽고 백발이 성성했지만 눈빛만은 형형했다. 나는 그 눈빛을 봤다. 흔들림이 없었다. 노년의 눈이 이렇게 맑을 수 있나 싶었다. 나이든 몸과 어울리지 않는, 젊은 짐승의 눈이었다. 노파가 무어라 말했다. 억양이 낮고 느렸다.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손을 들어 보였다. 적의가 없다는 표시였다. 노파는 잠시 나를 훑어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그 시선이 마치 물건을 감정하는 상인의 눈 같았다. 값을 매기는 눈.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피하면 약점을 보인다는 것을, 나는 이십 년 동안 검을 쥐며 배웠다. 노파가 손짓으로 따라오라 했다. 나는 따라갔다. 다른 선택이 없었다. 걸으면서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첫째, 나는 죽었던 몸으로 살아났다. 둘째, 이곳의 언어는 내가 아는 어떤 언어와도 다르다. 셋째, 저 노파는 이 공간에 익숙한 것 같다. 걸음걸이가 그것을 말해줬다. 처음 보는 자의 걸음이 아니라, 수백 번은 이 길을 오간 자의 걸음이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이곳의 규칙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생존하려면 이 노파를 놓치면 안 된다. 나는 그렇게 판을 짜기 시작했다. 석문을 나서자 밝은 빛이 쏟아졌다. 눈이 부셔 잠깐 시야가 흐려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거대한 묘지를 마주하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진 비석들.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지평선까지 비석이 이어져 있었다. 마치 이 세상 전체가 무덤으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바람이 불었다. 비석들 사이로 흐르는 바람 소리가 마치 낮게 우는 소리 같았다. 그중 하나의 비석 앞에서 노파가 걸음을 멈췄다. 손가락으로 비석을 가리켰다. 나는 그 비석을 봤다. 글자는 읽을 수 없었지만, 새겨진 문양은 알아볼 수 있었다. 검을 쥔 손. 내가 평생 봐온 문파의 문양과 흡사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검이 훨씬 크고 위압적으로 새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그 검 하나가 세상을 가르고 있는 듯한 형상이었다. 심장이 뛰었다. 이곳이 단순히 낯선 땅이 아니라는 예감이 들었다. 노파가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그리고 다시 비석을. 그 다음엔 나를 가리켰다. 무언가를 설명하려는 것 같았다. 하늘, 무덤, 나. 이 세 가지가 어떤 연결고리로 묶여 있다는 뜻일까. 하지만 나는 알 수 없었다. 언어가 없다는 것이 이렇게 답답한 일인지 처음 알았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묘지는 보통 묘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이름조차 남지 않은 무덤에서 되살아난 존재였다. 무명묘. 왜 그런 확신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이곳을 부르기로 했다. 노파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 뒤를 따랐다. 등 뒤로 수많은 비석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침묵이 무섭게 느껴졌다. 마치 이 모든 무덤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살아야 한다. 일단은, 살아야 한다. 그것이 이 낯선 세계에서 내가 세운 첫 번째 목표였다. 그런데 걸음을 옮기던 노파가 문득 멈춰 섰다. 뒤돌아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조금 전과 달랐다. 뭔가를 확인하려는 눈. 아니, 뭔가를 두려워하는 눈이었다. 노파의 입에서 처음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가 나왔다. “…린?” 내가 아는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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