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신마릉원을 나선 지 사흘째였다.
물이 떨어졌다. 정확히는 반나절 전부터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 물통을 붙잡고, 나는 계곡을 찾아 산길을 헤맸다. 강묘선이 알려준 길이었다. 그녀는 지도 대신 손짓으로 방향을 짚어주며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다.
"사람 많은 곳은 피해라. 특히 관복 입은 놈들, 무장한 놈들."
이유를 묻지 않았다. 이 세계의 규칙을 아직 모르는 내가 그녀의 경고를 의심할 처지는 아니었다. 낯선 몸, 낯선 이름, 낯선 위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압도적으로 많은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몸을 낮추고 관찰하는 것뿐이었다.
계곡물은 맑았다.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살이 볕을 받아 잘게 부서졌다. 나는 물통을 내려놓고 그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두 손으로 물을 떠 얼굴에 끼얹었다. 차가운 감각이 뺨을 스치고 지나가자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그리고 물에 비친 얼굴을 보았다. 이 몸으로 넘어온 뒤 처음이었다.
낯선 얼굴이었다. 이전의 나와는 분명히 다른 얼굴. 그러나 완전히 남의 것도 아니었다. 눈매는 날카롭게 올라가 있었고, 턱선은 단단하게 각이 잡혀 있었다. 방계 무사 특유의, 어딘가 위축된 인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얼굴로 앞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감춰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비명이 들렸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낮췄다. 소리가 난 방향을 살폈다. 상류 쪽 물가, 바위 뒤편이었다. 한 여인이 옷을 갈아입던 중인 듯 젖은 옷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물살에 떠밀려 흘러가던 내 물통이 둥둥 떠 있었다.
아.
그제야 상황이 이해됐다. 물을 뜨려고 계곡 아래쪽에 내려놓은 물통이 물살을 타고 상류까지 거슬러 올라갈 리는 없었다. 정확히는, 내가 물통을 놓아둔 자리와 여인이 있던 자리 사이의 지형이 문제였다. 완만한 여울이 물통을 그쪽으로 밀어 보낸 것이다. 하필이면.
여인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뒤이어 무장한 병사들이 숲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대략 여섯. 발소리로 세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나를 반원으로 둘러쌌다.
여인이 손가락을 뻗어 나를 가리키며 무언가를 외쳤다. 나는 그 말을 정확히 알아들었다.
오해였다. 완벽하고, 억울한 오해였다.
그 여인을 처음 본 순간, 나는 습관처럼 그녀의 신체적 규모부터 각인했다. 작고 가벼운 체구, 어깨가 좁았다. 하지만 걸음에는 무게가 있었다. 명령을 내려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걸음. 발끝이 아니라 뒤꿈치부터 땅을 딛는, 누군가 길을 비켜주는 것에 익숙한 걸음이었다.
그다음 나는 그녀의 눈을 봤다.
눈이 웃고 있었다. 겁먹은 눈이 아니었다. 오히려 즐거워하는 눈이었다.
놀았다.
그 순간 나는 확신했다. 이 여인은 지금 이 상황을 재미있어하고 있다. 진짜로 위협을 느꼈다면 저런 눈빛이 나올 수 없다. 두려움은 동공을 흔들고 호흡을 얕게 만든다. 이 여인의 호흡은 흔들리지 않았다.
병사들이 검을 뽑았다. 쇠가 칼집에서 빠져나오는 소리가 연속으로 들렸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항복의 자세를 취했다. 저항할 마음은 없었다.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저항할 수 없는 척을 하기로 정했다.
힘을 드러내는 순간, 지금까지의 위장이 무너진다. 이 낯선 세계에서 힘을 드러낸 이방인이 어떤 대우를 받을지 나는 알지 못했다.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야 했다.
두려움과 행동은 별개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았다.
"저놈이 감히!"
여인의 뒤에 있던 시녀 하나가 새된 소리를 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저었다.
"오해입니다. 저는 그저 물을 뜨러 왔습니다."
서툰 발음이었지만 뜻은 전달됐다. 여인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 시선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값을 매기는 눈초리였다. 그러다 입꼬리를 올렸다.
"오해라. 그거 재밌는 말이네. 네가 오해라 하면 오해가 되는 거야?"
장난스러운 어투였다. 하지만 그 말속에 담긴 것은 명백한 지배욕이었다. 자신이 규칙을 정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자의 말투. 나는 이 여인이 누구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저 걸음, 저 시녀들의 태도, 병사들이 검을 뽑기까지의 반응 속도.
높은 신분이다. 그것도 상당히.
"소녀의 이름을 감히 알려주지 않은 것이 실례였습니다. 저는 그저 지나가던 나그네입니다."
나는 최대한 공손하게, 최대한 약하게 보이도록 말을 골랐다. 어깨를 살짝 움츠리고, 시선은 그녀의 눈이 아니라 턱 아래쪽에 고정했다. 이것이 내가 이 순간 정한 첫 번째 전략이었다. 약자로 보여라. 강자로 보이는 순간 표적이 된다.
여인이 다가왔다. 시녀들이 옷깃을 붙잡으며 만류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만류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나그네? 이 산에 나그네가 있다니. 재밌네."
그녀는 내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기까지 했다. 마치 시장에서 물건을 고르는 사람 같았다.
"이름이 뭐지."
"이진남입니다."
"이진남. 그래, 이진남. 너는 오늘부로 내 것이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나는 순간 멈칫했다.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는지, 여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청량한 웃음소리였다.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웃음.
"성추행범을 그냥 놔줄 순 없잖아? 내가 관대하게 처벌 대신 노역을 시키는 거야. 감사해야지."
말도 안 되는 논리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저항할 명분이 없었다. 아니, 저항할 힘이 없어 보여야 했다. 병사 여섯, 시녀 셋, 그리고 신분을 알 수 없는 여인 하나. 지금 검을 뽑는다면 나는 순식간에 이 세계에서 쫓기는 몸이 될 것이다.
칼을 뽑는 놈은 읽힌다.
"소녀의 이름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내 물음에 여인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 짧은 침묵 속에서 나는 그녀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변하는 것을 봤다. 장난기 아래 숨어 있던,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간 무게.
"현서율. 현국의 막내 황녀다."
황녀.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 여인이 아무 이유 없이 나를 붙잡는다면, 그것은 단순한 변덕이 아니었다. 황녀의 변덕은 곧 명령이었다. 그리고 명령을 거스르는 자는, 이 세계의 규칙 아래서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병사 하나가 내 팔을 붙잡았다. 손목에 감기는 힘이 제법이었다. 나는 순순히 몸을 맡겼다. 저항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선택이었다.
현서율이 앞장서 걸었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 여인의 웃음 뒤에 숨겨진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렇게, 이 낯선 세계에서 첫 악연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