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약한 척하는 전생 검신

4화

현서율의 처소는 신마릉원과는 비교도 안 되게 화려했다. 붉은 기둥에는 금박이 입혀졌고, 창살마다 옥구슬이 매달려 바람이 불 때마다 잔잔한 소리를 냈다. 마루를 밟을 때마다 나무가 아니라 비단을 밟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 화려함 안에서 하인 신세로 며칠을 보냈다. 물을 긷고, 마당을 쓸고, 시녀들의 잔심부름을 했다. 새벽에는 우물가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물을 손으로 퍼 올렸고, 낮에는 마당 구석구석에 쌓인 낙엽을 빗자루로 밀어냈다. 밤에는 시녀들이 벗어놓은 옷가지를 정리하며 그들의 잡담을 들었다. 손끝이 갈라지고 허리가 뻐근했지만, 그것은 몸의 문제일 뿐이었다.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강묘선에게 이 사실을 알릴 방법은 없었다. 그저 언젠가 다시 마주칠 것이라 믿을 뿐이었다. 처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반 시진도 되지 않았고, 그 시간마저 감시하는 눈이 붙어 있었다. 나는 그 눈들을 하나하나 세어두었다. 문지기의 걸음걸이, 시녀장의 시선이 머무는 방향, 야간 순찰의 간격까지. 관찰이 습관이 된 몸은 가만히 있어도 주변을 읽어냈다. 현서율은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불러 이상한 것을 시켰다. 시를 지으라 하고, 노래를 시키고, 어느 날은 검을 쥐어주며 시녀 하나와 겨뤄보라 했다. 시를 지을 때는 대충 글자를 늘어놓았고, 노래를 부를 때는 음정을 흐트러뜨렸다. 검을 쥐고도 넘어지는 시늉을 했다. 검법이랄 것도 없이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다. 상대 시녀의 검이 어깨를 스치기 직전, 나는 일부러 발을 헛디뎌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흙바닥에 닿은 손바닥이 아렸지만 표정만은 겁먹은 그대로 유지했다. "너 진짜 아무것도 못하는구나." 현서율이 실망한 듯 말했지만, 그 눈빛에는 여전히 흥미가 있었다. 나는 그것을 알아챘다. 실망과 흥미는 종이 한 장 차이였고, 그녀는 그 경계를 자주 넘나들었다. 그녀는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나라는 존재가 그 지루함을 달래는 장난감이 된 것이다. 관찰해뒀다. 이 사람은 무료함을 채우는 데 집착한다. 그것이 그녀의 약점이 될 수도, 강점이 될 수도 있다. 무료함을 채워주는 자에게는 관대하고, 무료함을 유발하는 자에게는 가혹하다. 나는 그 저울 위에서 균형을 잡는 법을 익혀갔다. 너무 서툴러서 버려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 능숙해서 위협이 되지 않을 정도로. 열흘째 되던 날, 처소 전체가 소란스러워졌다. 시녀들이 분주하게 짐을 꾸리고, 마당에는 말들이 끌려 나와 발굽 소리를 냈다. 현서율이 원정을 준비한다는 소식이었다. "아버지 생신 선물로 열화선련을 구해오겠다고 했거든. 화산에 핀다는 꽃인데, 백 년에 한 번 핀대." 그녀가 내게 자랑스레 말했다. 눈빛에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은 아이의 조급함이 어른거렸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시녀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서로 눈치를 주고받는 모습.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웃지 않았다. 나는 그 미묘한 공기를 놓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물을 긷다가 우연히 시녀 둘의 대화를 들었다. 우물 뒤편 담벼락에 몸을 붙이고, 물통을 내려놓은 채였다. "셋째 황자 쪽에서 벌써 이 소식을 알고 있대." "황녀님이 화산에서 공을 세우면, 황제 폐하의 눈에 다시 들 텐데. 그게 두려운 거지." "그러니까 원정에 이상한 사람을 붙였다는 소리가 있어."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는 숨을 죽이고 물통을 내려놓은 채 귀를 기울였다. 이상한 사람.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시녀들의 대화는 뚝 끊겼고, 나는 서둘러 물통을 다시 들어 올렸다. 원정대 명단이 발표되던 날, 나는 그 이상한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명단이 걸린 게시판 앞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법사 한 명. 이름은 소한. 나이는 나와 비슷해 보였으나, 걸음에는 나이답지 않은 무게가 실려 있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눈빛이 차분했다. 지나치게 차분했다. 흥분한 원정대원들 사이에서 그만이 유독 조용했고, 그 조용함이 오히려 눈에 밟혔다. 관찰이 습관이 된 나는 소한을 유심히 봤다. 그의 걸음걸이, 시선의 방향. 그는 현서율을 보지 않았다. 대신 주변 지형과 사람들의 위치를 확인하고 있었다. 담장의 높이, 문지기의 배치, 마당을 가로지르는 최단 거리까지. 그것은 충성스러운 신하의 눈이 아니었다. 그것은 언제든 발을 뺄 준비가 된 자의 눈이었다. 첩자다. 확신은 아니었지만, 그런 심증이 들었다. 몇 번을 곱씹어봐도 결론은 같은 곳으로 흘러갔다. 사람은 자신이 지켜야 할 대상을 바라보는 법인데, 소한은 지켜야 할 대상이 아니라 도망칠 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원정대에 하인으로 끼어 있었다. 현서율이 나를 굳이 데려간 이유는 단순했다. 그녀는 여전히 나를 신기한 장난감쯤 여겼다. "너도 온다. 짐 들 사람은 많아야지." 그녀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시녀들의 시선이 잠시 내게 머물렀다가 다시 흩어졌다. 그렇게 나는 화산으로 향하는 원정대에 합류하게 됐다. 출발 전날, 강묘선이 나를 찾아왔다.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처소 밖 담장 그늘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깨에 걸친 낡은 겉옷이 밤바람에 흔들렸고, 그 뒷모습만으로도 나는 그녀를 알아봤다. "화산 원정이라. 위험하다." "압니다." "열화선련이 피는 곳에는, 백 년을 지킨 것이 있다는 소리가 있다." 나는 그 말의 무게를 느꼈다. 백 년이라는 시간이, 단순한 세월이 아니라 어떤 존재의 나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조심해라. 그리고." 강묘선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 짧은 침묵 속에서 그녀의 눈빛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네 힘을 함부로 드러내지 마라. 이 세상에는, 강자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많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힘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 노파는 처음부터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지켜본다는 것은 나만의 습관이 아니었다. "어찌 아셨습니까." 강묘선은 대답 대신 웃었다. 주름진 얼굴 위로 짧은 미소가 스쳤다가 사라졌다. "살아온 세월이 그냥 세월이겠느냐." 그녀는 그렇게 짧게 답하고 몸을 돌렸다. 그 뒷모습이 밤바람에 흔들렸다. 나는 그 자리에 오래 서서 멀어지는 그림자를 눈으로 좇았다. 그녀가 사라진 뒤에도 한참 동안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 나는 짐을 지고 원정대의 후미에 섰다. 등에 짊어진 짐 보따리가 어깨를 짓눌렀지만, 그보다 무거운 것은 앞을 향한 시선이었다. 소한이 저 앞에서 걷고 있었다. 흔들림 없는 걸음, 뒤를 돌아보지 않는 목덜미. 그의 등을 보며 나는 다짐했다. 지켜본다. 저 자가 무엇을 하는지, 누구를 위해 움직이는지.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원정대의 행렬이 성문을 빠져나가는 동안, 나는 소한의 발걸음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리라 마음에 새겼다. 화산으로 가는 길은 아직 멀었고, 그 길 위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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