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허수아비 황제, 소년의 열쇠

5화

황궁의 밤은 낮보다 더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낮에는 관복을 입은 대신들이 정해진 걸음으로 움직이지만, 밤이 되면 그 걸음들이 은밀해졌다. 촛불이 낮은 곳으로 몸을 숨기고, 사람의 목소리도 낮아졌다. 궁의 담벼락 사이로 스치는 바람 소리마저, 낮과는 다른 무게를 지녔다. 한도겸의 서재에 조병만이 불려온 것도 그런 밤 중 하나였다. 서재의 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렸다. 조병만이 관복 자락을 여미며 들어섰고, 그 뒤로 시종이 조용히 문을 닫았다. "대인, 부르셨습니까." "앉으시오." 한도겸이 손짓했다. 서안 위에는 작은 다관과 잔이 놓여 있었다. 다관에서는 흰 김이 실처럼 피어올랐고, 그 향이 방 안에 잔잔하게 퍼졌다. "천복당에서 새로 들어온 탕약이 있는데, 몸에 좋다 하여 좌사마께 먼저 권하고 싶소." 조병만의 얼굴에 얕은 미소가 번졌다. 그는 관복 소매를 슬쩍 걷으며 자리에 앉았다. "재상 대인께서 이토록 신경써 주시니, 몸이 아니라도 마음이 든든해지는군요." '과연 눈치가 없구나.' 한도겸은 속으로 웃었다. '이용하기엔 딱 좋은 인물이거늘.' 그는 잔에 탕약을 따르며 겉으로는 온화한 웃음을 지었다. "좌사마도 요즘 조회에서 격무가 심하지 않소. 이런 것 하나쯤은 몸을 돌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오." '몸을 돌보는 데 도움이 되긴 하겠지.' 그는 속으로 덧붙였다. '다만 이번엔 좀 다른 용도로 쓰이겠지만.' 조병만이 잔을 들어 탕약을 마셨다. 씁쓸한 맛이었지만, 특별한 이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잔을 내려놓으며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쓰긴 하지만... 몸이 후끈해지는 느낌이 드는군요." "몸에 좋은 것일수록 입에는 쓰다 하지 않소." 한도겸이 부드럽게 답했다. 한도겸은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조병만의 낯빛, 호흡, 손끝의 미세한 떨림까지도 그의 눈은 놓치지 않았다. '이번 탕약은 시험용일 뿐이다. 진짜는 다음이니.' 그는 속으로 되새겼다. '얼마의 양이 몸을 흔들고, 얼마의 양이 목숨을 흔드는지, 이 자리에서 가늠해야 할지고.' 그는 겉으로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좌사마, 요즘 변경 소식은 어떻소." 조병만이 품속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며 목소리를 낮췄다. "실은 조금 이상한 보고가 있었습니다. 대호국의 장수 하나가 실종되었다고 하는데, 그 실종 위치가 우리 평안촌 근방이라는 것입니다." 한도겸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는 잔을 든 손을 잠시 멈췄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차를 홀짝였다. "장수라 함은 어느 정도 지위인가." "자세한 것은 아직 파악되지 않았으나, 대호국 쪽에서 은밀히 수색대를 보냈다는 첩보도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예사 인물은 아닌 듯합니다." 조병만은 서류를 서안 위에 펼쳐 보였다. 지도 위에 붉은 점 하나가 찍혀 있었다. 평안촌이었다. '대호국이 몸을 낮추고 수색대를 보낼 정도라면...' 한도겸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단순한 병졸이 아니다. 그것이 무엇을 지니고 있었는지가 문제로군.' 그는 지도 위의 붉은 점을 손끝으로 가만히 짚었다. "평안촌은 이미 관군을 보내 수색했다고 들었소." "예, 최영달 대장이 다녀왔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심문도 했다 하나, 다들 아는 것이 없다고만 답했다더군요." 한도겸은 잠시 눈을 감았다. '관군의 수색이란 것이 늘 이렇지.' 그는 속으로 냉소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뒤집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놓치는 법이니.' '이 일을 그냥 흘려보낼 순 없다. 대호국이 저토록 조심스레 움직이는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니.' 그는 눈을 뜨고 조병만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이미 다음 수를 결정한 자의 확신이 담겨 있었다. "좌사마, 그 지역에 다른 밀사를 보내시오. 은밀히, 눈에 띄지 않게. 무엇이 사라졌는지, 그것부터 알아야 하오." "명 받겠습니다." 조병만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그의 걸음이 문 쪽으로 향할 때, 한도겸이 문득 덧붙였다. "몸은 어떠하시오. 탕약이 좀 독했던가." "괜찮습니다. 오히려 몸이 가벼워진 듯합니다." 조병만이 웃으며 답했다. '가벼워진 듯하다고?' 한도겸은 속으로 그 말을 곱씹었다. '그 가벼움이 얼마나 갈지, 두고 볼 일이거늘.' 조병만이 물러난 뒤, 한도겸은 홀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달빛이 처마 끝에 걸려 있었다. 차갑고, 고요했다. 방 안의 촛불이 흔들리며 그의 그림자를 벽에 길게 늘어뜨렸다. 그 그림자는 사람의 형상이라기보다, 서서히 몸을 키워가는 짐승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황제도, 대호국도, 결국 내 손안의 돌덩이일 뿐이거늘.' 그는 생각했다. '다만 이 돌덩이가 어디로 굴러갈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지고.' 그는 다관을 들어 남은 탕약을 창밖으로 조용히 흘려보냈다. 뜨거운 물기가 돌바닥에 닿아 하얀 김을 피워 올렸다가, 이내 사라졌다. --- 그 무렵, 소년 황제 이선은 침전에서 홀로 앉아 있었다. 창밖에서 수색마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고, 위압적인 소리. 말발굽이 궁의 돌길을 두드릴 때마다, 그 진동이 침전 바닥까지 희미하게 전해지는 듯했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선의 가슴은 조여들었다. 이선은 이불 자락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 '저것들은 대호국의 세작을 잡는다지만... 어쩐지 나를 감시하는 것 같다.' 그는 그런 생각을 애써 지우려 했다. 재상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배치한 것이라 믿고 싶었다. '재상은 나를 위해 저러는 것이다. 그래야 한다.' 그러나 며칠 전, 궁녀 하나가 조용히 사라진 일이 있었다. 이선의 곁에서 유독 다정했던 궁녀였다. 그녀는 이선이 밤마다 잠들지 못할 때, 낮은 목소리로 옛이야기를 들려주던 사람이었다. 재상은 그저 "몸이 좋지 않아 궁을 나갔다"고만 말했다. 이선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본 날까지도 얼굴빛이 좋았다. 웃으며 이선의 이마를 짚어주기까지 했다. 그런 사람이 하루아침에 병으로 궁을 나갔다는 것을, 어린 황제라 해도 곧이 믿기는 어려웠다. '나에게 다정했던 사람은 모두 사라진다.' 이선은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그것이 우연일까.' 그는 그 생각을 끝내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내는 순간, 무언가가 정말로 확정되어버릴 것 같아서였다. 다음 날 아침, 조회장에서 소란이 일었다. 조병만이 갑자기 자리에서 쓰러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조회에 참석했던 조병만이, 입에서 거품을 물며 쓰러진 것이다. 그의 몸이 돌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조회장에 크게 울렸다. "급히 태의를 부르시오!" 누군가 외쳤다. 대신들이 저마다 놀란 얼굴로 물러섰다. 몇몇은 조병만에게 다가가려다, 무언가 두려운 듯 걸음을 멈췄다. 한도겸은 그 소식을 듣고 서둘러 조회장으로 향했다. 그의 걸음은 빨랐고, 표정에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좌사마! 좌사마, 정신을 차리시오!" 그는 조병만의 손을 붙잡고 흔들며, 주위를 향해 태의를 재촉했다. 누가 보아도 진심으로 벗을 걱정하는 자의 모습이었다. '예상보다 빠르구나.' 그는 속으로 냉정하게 계산했다. '천복당의 탕약이 이 정도로 독하다면... 다음번 사용처는 신중히 골라야겠다.' '좌사마가 이 정도로 흔들렸다는 것은, 양을 조금 더 줄여야 함을 뜻하는 것이거늘.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흔드는 것이 목적이었으니.' 태의가 도착하여 조병만의 맥을 짚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태의의 얼굴에도 당혹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독은 아닌 듯하나... 몸의 기운이 극히 흐트러져 있습니다. 안정을 취하셔야 할 것입니다." "내 사가에서 가장 좋은 약재를 보낼 것이오. 좌사마의 몸이 하루빨리 회복되기를 바랄 뿐이오." 한도겸이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조병만은 결국 목숨을 건졌지만, 며칠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대신들 사이에서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재상이 준 탕약을 마신 자가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가, 은밀히 입에서 입으로 옮겨졌다. "재상 대인께서 권하신 탕약을 마신 뒤라던데..." "쉿, 함부로 입에 올릴 소리가 아니다." 그런 대화들이 궁의 구석마다 낮게 오갔다. 누구도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 자체가 이미 소문의 무게를 증명하고 있었다. 한도겸은 그 소문을 알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소문이란 것은 두려움을 키우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되지.' 그는 여전히 태연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저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저들도 이제 알았을 것이니.' 그는 자신의 서재로 돌아와 다시 다관을 들었다. 방금 전 조회장에서 보였던 걱정스러운 얼굴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좌사마, 그대는 오늘 나를 위해 좋은 일을 하나 해준 셈이오.' 그는 속으로 조병만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프기는 하겠지만, 목숨은 부지했으니 이만하면 다행이 아니겠소.' 그날 밤, 이선은 침전에서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손을 떨었다. 궁녀는 병들었다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좌사마는 재상이 권한 탕약을 마신 뒤 쓰러졌다. 그 둘 사이에 무슨 연결이 있는지, 이선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알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더 무서웠다. 재상이 자신의 최측근 신하마저 그렇게 다룰 수 있다면, 자신은 대체 어떤 존재란 말인가. '나는... 저 사람에게 무엇일까.' 이선은 이불을 끌어안았다. '황제라는 이름만 있는, 그저 손안의 인형일 뿐인가.' 그런 생각이 그의 어린 가슴을 짓눌렀다. 창밖의 달빛이 창호지 사이로 스며들어, 그의 작은 어깨 위에 하얗게 얹혔다. 그리고 저 멀리 변경, 평안촌의 헛간 마루 밑에서는, 옥주 하나가 여전히 서늘한 빛을 은밀히 뿜어내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그 빛은, 흙과 낡은 널빤지 틈 사이로 아주 조금씩, 아주 조용히 스며 나오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두 개의 실이, 아직 서로를 알지 못한 채, 점점 같은 방향으로 얽혀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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