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10일 안에 강해지기로 했다

2화

창고 문은 오래된 나무 재질이라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힘겹게 열렸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크게 울리던지 나는 순간 누가 듣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에 뒤를 돌아봤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골목 어귀의 가로등마저 꺼져 있어서, 이 시간에 이 창고 근처를 지나다닐 사람은 나 말고는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면서도, 괜히 심장은 쿵쿵 뛰었다. 도둑질을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건지, 스스로 생각해도 좀 우스웠다. 안으로 들어서자 곰팡이 냄새와 먼지가 뒤섞인 공기가 코를 찔렀고, 나는 소매로 입을 가린 채 어둠 속을 더듬어 나갔다. 휴대폰 플래시를 켤까 잠깐 고민했지만, 배터리가 12퍼센트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떠올리고는 그만두기로 했다. 이 상황에서 배터리가 방전되면 그게 더 큰 문제였으니까. 부모님이 실종되기 전, 어머니가 자주 드나들던 이 창고에 대해서는 어렴풋한 기억밖에 없었다. 다섯 살 무렵의 기억이란 게 다 그런 식이니까.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형체들이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낡은 선반, 삭은 밧줄 뭉치,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루들. 그 사이를 조심스럽게 헤치고 들어가는 동안, 발밑에서 뭔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나는 잠깐씩 멈춰 서서 숨을 죽였다. 구석에 놓인 나무 상자를 찾아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른 상자들보다 유독 먼지가 덜 쌓여 있었던 게 눈에 띈 거였는데, 그건 곧 누군가—아마도 어머니였을—가 비교적 최근까지 이 상자를 만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자물쇠는 이미 부식되어 만지자마자 부서져 내렸는데, '이렇게 허술하게 방치돼 있었다니' 하는 생각이 스치면서도, 그만큼 아무도 이 창고를 신경 쓰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 도시 전체가 우리 가족을 잊은 지 오래였는지도 몰랐다. 상자 뚜껑을 열어 올리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안에는 낡은 의료 기록 뭉치와 함께, 낡은 천에 싸인 작은 반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의료 기록부터 살펴봐야 하나 싶었지만, 손은 이미 반지 쪽으로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자줏빛 보석이 박힌 그 반지는 언뜻 보기엔 흔한 장신구처럼 보였지만, 손끝이 닿는 순간 나는 뭔가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진동하는 느낌이었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 진동이 점점 더 선명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착각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이게 뭐지' 하는 생각과 동시에, 나는 별생각 없이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봤다. 뭔가 대단한 각오나 결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그 순간엔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미지의 기물 감지 — '자염성계(紫炎聖戒)'와의 계약이 성립되었습니다.] 시야 한켠에 떠오른 문구를 보고,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게 뭔 소리인가. 눈앞에 글자가, 그것도 허공에 떠오르는 이런 현상은 살면서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나는 손을 휘저어봤다. 문구는 사라지지 않았다. 눈을 세게 감았다가 다시 떴다.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미친" 하고 나도 모르게 낮게 중얼거렸다. 혹시 몰라 창고 안을 한 번 더 둘러봤다. 몰래카메라거나, 누군가 나를 놀리려고 설치한 홀로그램 장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낡아빠진 창고에 그런 최첨단 장비를 설치할 이유가 있을 리 없었고, 있다 해도 굳이 나 같은 사람을 대상으로 그럴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결국 남은 결론은 하나였다. 이건 진짜라는 것. [자염성계는 두 가지 기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1. 만수모체(萬獸母體) — 흡수한 혈액을 정혈로 정제하여 무제한 저장하는 기능.] [2. 감지 기능 — 생명체의 신체강도, 무도경계, 수명 등 속성을 판별하는 기능.] 두 문구를 다시 읽으며, 나는 순간 이게 꿈은 아닐까 하고 내 손등을 꼬집어봤다. 아팠다. 꿈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한 번 더 꼬집어봤다. 여전히 아팠다. 그만하면 됐다 싶었다. '혈액을 흡수해서 정혈로 정제한다니, 그게 무슨 뜻일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뒤이어 '감지 기능이라는 건 또 뭘까' 하는 궁금증이 겹쳤다. 만수모체라는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온갖 짐승의 어미라는 뜻일 텐데, 그런 거창한 이름을 달고 있는 물건이 왜 이런 곰팡내 나는 창고 구석에 처박혀 있었던 걸까. 어머니는 이걸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냥 모르고 넣어둔 걸까. 물어볼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그제야 다시 뼈저리게 느껴졌다. 나는 반지에 조심스럽게 물어보듯, 아니 실은 시험해보듯 마음속으로 외쳤다. '내 상태를 확인해봐.' 그러자 곧바로 새로운 문구가 떠올랐다. [대상: 강태민] [신체강도: 6.3 (매우 낮음)] [무도경계: 측정 불가 (기맥 폐쇄)] [수명: 약 62년] 숫자를 보는 순간, 나는 실소를 흘렸다. 신체강도 6.3이라니. 그 수치가 얼마나 처참한 건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매우 낮음'이라는 괄호 속 설명만으로도 대략적인 짐작은 가능했다. 이게 100점 만점에 6.3점이라는 뜻인지, 아니면 다른 기준이 있는 건지는 몰라도, 어느 쪽이든 좋은 숫자는 아니었을 게 분명했다. 무도경계는 측정조차 안 된다니, 이건 뭐 아예 논외라는 뜻이었을 테고. 기맥 폐쇄라는 표현도 마음에 걸렸다. 폐쇄됐다는 건 원래는 열려 있어야 하는 게 막혀 있다는 뜻일 텐데, 그게 언제부터, 왜 그렇게 됐는지는 이 짧은 문구만으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수명 약 62년이라는 숫자를 보고는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내게 남은 시간이 10일이라는 걸 이 반지는 알까. 알 리가 없었다. 이 반지가 말하는 수명이라는 건 아마 정상적인 경우를 가정한 계산일 테고, 지금 내 몸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그 계산 바깥에 있는 변수였을 테니까. '그렇다면 이 반지로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하는 계산이 시작됐다. 만수모체 기능이 혈액을 정혈로 정제한다는 건, 결국 내 피를 흘려 넣으면 뭔가가 만들어진다는 뜻일 텐데, 그 정혈이라는 게 정확히 무슨 역할을 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정제한 걸 무제한으로 저장한다고 했으니, 쌓이기만 하고 쓸 데가 없는 거라면 그야말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다를 게 없었다. 그래도 뭔가를,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손끝을 가볍게 깨물어 피 한 방울을 반지 표면에 떨어뜨려 봤다. 그 순간 반지가 옅은 자주색 빛을 내며 피를 그대로 흡수해버렸다. 스으윽... 피가 반지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렸는데, 그 소리를 듣자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게 안전한 건지 위험한 건지도 모르는 채로, 나는 이미 내 피를 반지에 바치고 있었으니까. 반지 표면이 아주 잠깐 따뜻해졌다가 다시 원래의 온도로 돌아왔다. 살아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아까보다 훨씬 강해졌다. [혈액 0.1cc 흡수 완료. 정혈 0.001단위 생성.] 생성된 정혈이 대체 얼마나 적은 양인지는, 그 숫자만으로도 대략 짐작이 갔다. 0.1cc에 0.001단위. 소수점 세 자리짜리 숫자를 보고 있자니, 이걸로 뭘 어쩌자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 속도로 만들어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순간 나는 이 반지가 그냥 흥미로운 장난감에 불과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정혈 1단위를 채우려면 대체 몇 리터의 피가 필요한 걸까 하는 계산을 잠깐 해봤는데, 그 답이 너무 끔찍해서 중간에 그만뒀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10일. 그 숫자가 다시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들었던 그 무미건조한 목소리, "환자분, 최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라는 말이 귓가에 되풀이됐다. 마음의 준비라니. 그게 대체 뭘 어떻게 하는 건지, 나는 아직도 몰랐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아무것도 안 하고 10일을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다는 것. 무엇이든 시도해봐야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손목을 조금 더 깊게 그었다. 살갗이 갈라지는 얕은 통증이 지나가고, 따끔거림 뒤로 피가 배어 나왔다. 피가 흐르는 걸 반지 위로 흘려보내며, 나는 이 반지가 도대체 얼마만큼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건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창고 안, 이 어둠 속에서, 나는 뭔가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게 나를 살릴 실인지, 아니면 더 깊은 수렁으로 끌어당길 손인지는, 반지도 나도 아직 말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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