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손목의 상처는 크지 않았다. 겨우 손톱 끝으로 그은 정도의 얕은 자상이었는데, 그걸 반복해서 짜내다 보니 어느새 소매가 온통 붉게 젖어 있었다. 처음 한 방울을 짜낼 때는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명확했지만, 세 번째, 네 번째로 넘어가면서는 통증보다 오히려 손이 시린 느낌이 먼저 왔다. 피가 식으면서 소매 안쪽에서 끈적하게 굳어가는 감촉이 유난히 불쾌했는데, 그 몰골이 어찌나 처참했는지, 만약 누가 이 창고에 들어왔다면 나를 자해라도 한 정신병자로 오해했을 게 뻔했다. 뭐, 틀린 말도 아니었다. 지금 내가 하는 짓이 자해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다만 그 자해에 시스템 알림창이 따라붙는다는 게 좀 다를 뿐이었다.
[정혈 저장량: 0.089단위]
반지가 알려준 숫자를 보며 나는 잠시 멍해졌다. 손목 하나를 반쯤 죽여놨는데 이 정도라니. 한 방울에 대략 0.001단위씩 쌓인다면, 이 속도로는 10일 안에 유의미한 양을 모으기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루에 백 방울씩 짜낸다고 쳐도 0.1단위, 그걸 열흘 반복해도 1단위가 될까 말까였는데, 그 사이에 내 몸이 먼저 빈혈로 나가떨어질 게 뻔했다. '이대로는 답이 없다' 하는 생각이 들자 나는 반지를 다시 자세히 들여다봤는데, 그때 새로운 문구가 시야에 떠올랐다.
[정혈을 대상에게 사용하시겠습니까? Y/N]
'대상'이라는 표현이 좀 이상했다. 정혈을 만든 게 나고, 그걸 쓸 사람도 나일 텐데 왜 굳이 '대상'이라는 표현을 쓰는 걸까. 그 순간 어렴풋이 이 반지가 나 말고 다른 누군가에게도 정혈을 쏟아부을 수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지금 당장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Y'라고 마음속으로 답했다. 그 즉시 몸 안에서 뭔가 뜨거운 감각이 훅 퍼져나갔다.
화아악...
마치 뱃속에 작은 불씨가 던져진 것처럼, 열기가 온몸의 혈관을 타고 번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심장에서부터 시작된 그 열기가 어깨를 지나 팔꿈치를 타고 손끝까지 내려가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는데, 나는 그 자리에서 신음을 삼키며 바닥에 손을 짚었다. 손바닥에 닿은 창고 바닥의 냉기와 몸속을 훑고 지나가는 열기가 대비되면서, 이상하게 정신이 또렷해졌다. 그 감각이 고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뻐근한 쾌감에 가까웠는데, 마치 오래 저려있던 다리에서 감각이 돌아올 때처럼, 시원하면서도 아릿한 그런 느낌이었다.
[정혈 0.089단위 흡수 완료. 신체강도가 소폭 상승했습니다.]
[신체강도: 6.3 → 6.7]
'0.4가 올랐다고'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는데, 그 수치의 변화 자체가 나에겐 기적이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신체 능력이 나아진 적이 없었으니까. 결맥체질이라는 굴레는 그 어떤 수련으로도 뚫리지 않는 벽이었고, 명약을 먹어도, 영단을 삼켜도, 심지어 문파에서 제일 좋은 내공심법을 훔쳐서 익혀봐도 결국 제자리였다. 나는 그 벽 안에서 그저 버티기만 했던 5년을 지나온 참이었다. 5년 동안 매달 한 번씩 몸 상태를 점검받을 때마다 의원의 표정이 점점 더 안 좋아지는 걸 봐야 했고, 그 표정을 볼 때마다 나는 속으로 이번에도 글렀구나 하고 확인만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피를 뽑아 정혈로 바꾸고 그걸 다시 흡수하는 이 단순한 반복만으로 벽이 조금씩 갈라지고 있었다. 손목 하나 그어서 만든 결과물이 5년간의 온갖 시도를 뛰어넘고 있다는 게, 솔직히 좀 억울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이게, 되네...?' 하는 생각이 들자 나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자조적인 웃음이 아니라, 정말로 어이가 없어서 나오는 웃음이었다. 5년 동안 온갖 방법을 다 써도 안 됐던 걸 손목 한 번 그어서 해결하다니, 이게 사기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물론 이 반지를 어디서 얻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 마당에, 이걸 사기라고 부를 자격이 나한테 있는지도 의문이었지만.
하지만 곧바로 문제가 눈에 들어왔다. 정혈 0.089단위를 만드는 데 손목의 피를 거의 절반 가까이 써버렸다는 것. 소매 안쪽을 슬쩍 걷어보니 이미 손목 주변 피부가 하얗게 질려 있었는데, 그 색을 보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러니까 이 방식대로라면, 내 몸에서 뽑아낼 수 있는 피의 총량이 곧 한계치가 된다는 뜻이었다. 사람이 가진 피가 무한하지 않은 이상, 이 짜내기를 반복하다가는 정혈을 모으기 전에 내가 먼저 뻗을 게 뻔했다.
'그렇다면 혈액을 다시 채우는 시간, 그리고 상승폭 대비 효율을 어떻게 계산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이어졌다. 간단한 계산식이었다. 0.089단위로 0.4가 올랐으니, 1단위를 모으면 대략 4.5 정도가 오른다는 추정이 가능했다. 물론 이 비율이 계속 일정하게 유지될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신체강도가 높아질수록 같은 양의 정혈로 얻는 상승폭이 줄어들 수도 있고, 반대로 어느 구간을 넘기면 폭발적으로 오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런 변수를 다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 만약 이 비율이 일정하게 유지된다면, 10일 안에 신체강도를 얼마나 끌어올릴 수 있을지도 대략 짐작해볼 수 있었다.
문제는 혈액이었다. 사람의 몸에서 안전하게 뽑을 수 있는 피의 양은 한정돼 있었고, 하루에 뽑을 수 있는 양도 정해져 있었다. 매일 무리하게 피를 뽑다가는 정혈을 모으기도 전에 내가 먼저 쓰러질 판이었다. 게다가 이 창고 안에는 지혈제도, 소독약도 없었다. 상처가 곪기라도 하면 그때는 정혈이 아니라 목숨 자체를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창고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는 무겁고 느긋했다. 급한 걸음이 아니라, 뭔가를 확신하고 걸어오는 듯한 소리였는데, 나는 그 소리만으로도 누군지 대략 짐작이 갔다. 다급히 소매를 내려 상처를 가리고 반지를 옷 속으로 숨겼다. 손목의 지끈거리는 통증을 무시하며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만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문이 벌컥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안으로 들어왔다.
박기수였다.
"여기서 뭐 하냐, 공자님" 하고 그가 비웃듯 물었다. 5년 전까지 우리 집 마당을 쓸던 남자가, 지금은 내 앞에서 팔짱을 낀 채 거들먹거리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감히 이런 말투로 나에게 말을 걸 생각조차 못 했을 인간이었는데, 세상 참 우습게도 집안이 몰락하니 이런 것들부터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신경 쓸 필요 없다" 라고 짧게 답했지만, 박기수는 이미 창고 안을 두리번거리며 뭔가 값나가는 게 있는지 살피고 있었다. 낡은 나무 궤짝을 발로 툭 차보고, 벽에 걸린 먼지 앉은 족자를 슬쩍 들여다보는 그의 눈빛에는 노골적인 탐욕이 담겨 있었다.
"조공자님이 10일 후에 다 가져갈 텐데, 미리 좋은 물건 있으면 나한테 넘기는 게 어때" 하고 그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공자님한텐 이제 아무것도 안 남을 텐데, 나한테라도 넘기면 나중에 밥 한 끼는 챙겨줄 수 있잖냐."
그 말투에 배어 있는 여유가 유난히 거슬렸다. 마치 내가 죽어가는 걸 이미 다 정해놓은 결론처럼 취급하는 그 태도가, 예전 같았으면 그냥 넘겼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신경을 긁었다.
그 순간, 나는 이상한 자신감이 몸속에서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아까와는 뭔가 다른 감각이었다. 방금 흡수한 정혈의 열기가 아직 다 가라앉지 않은 탓인지, 손끝까지 뻐근한 느낌이 남아 있었는데, 신체강도가 조금 올랐다고 해서 이 남자를 상대할 수 있을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무조건 겁을 먹고 움츠러들지는 않았다.
"필요 없다니까" 라고 다시 말했을 때, 박기수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아마 내 목소리에서 뭔가 예전과 다른 기색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목소리 자체는 달라진 게 없었을 텐데, 그 안에 담긴 떨림이 사라진 걸 그가 눈치챈 것 같았다.
"...너 뭔가 달라졌는데" 라고 그가 중얼거리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는데,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 봤다. 예전의 나였다면 이 시점에서 눈을 내리깔거나 슬쩍 몸을 돌렸을 텐데, 지금은 그럴 필요를 못 느꼈다. 이상한 일이었다. 신체강도 0.4가 오른 게 뭐 그리 대단한 변화라고, 이렇게 태도까지 바뀔 일인가 싶었지만, 실제로 몸이 그렇게 반응하고 있었다.
박기수는 팔짱을 풀고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눈이 내 소매 쪽을 슬쩍 훑었는데, 다행히 붉게 젖은 자국까지는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대신 그는 뭔가 알아내려는 듯 미간을 좁힌 채 나를 계속 쳐다봤다.
"공자님이 갑자기 이렇게 뻣뻣하게 나올 이유가 없는데" 하고 그가 말을 이었다. "혹시 뭐 이상한 거 주워 먹었냐? 아니면 어디서 영단이라도 훔쳤어?"
어이없는 추측이었지만, 어떤 의미로는 정답에 가까운 추측이었다. 나는 그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하면 오히려 더 의심을 살 것 같았고, 침묵이야말로 지금 상황에서 가장 안전한 선택이었다.
그 순간 반지에서 새로운 문구가 조용히 떠올랐다.
[대상: 박기수]
[신체강도 측정 중...]
나는 순간 숨을 멈췄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정혈을 사용할 대상을 고르는 창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 반지가 멋대로 박기수를 '대상'으로 지정하고 그의 신체강도를 재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이 반지는 단순히 내 몸에만 작동하는 게 아니라, 눈에 보이는 다른 사람에게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의미였을까. 만약 그렇다면, 아까 떠올랐던 '대상에게 사용하시겠습니까'라는 문구가 이제야 제대로 이해가 됐다.
이건,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물건일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