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10일 안에 강해지기로 했다

5화

상자 뚜껑을 다시 열었을 때, 나무 삐걱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창고 안은 낮 동안 쌓인 열기가 아직 가시지 않아 후텁지근했고, 먼지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나는 손끝으로 서류 뭉치를 넘기다가, 그 이름을 확인한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서류의 제목 아래 적힌 이름은 '강씨 무가 총관 이덕형'이었는데, 그 이름 옆에 붉은 글씨로 '기밀'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도장의 잉크는 이미 갈색으로 변색되어 있었는데, 그건 이 서류가 최소 몇 년은 그 상자 안에서 아무도 손대지 않은 채 잠들어 있었다는 뜻이었다. '아버지가 이 사람과 결맥체질 치료를 연구했다는 건데, 왜 이 문서가 기밀로 분류돼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곧바로 뒤따랐다. 총관이라는 직위는 결코 낮은 자리가 아니었다. 강씨 무가에서 총관이라면, 가문의 실무를 총괄하는 위치였고, 그런 인물이 개인적으로 우리 아버지와 뭔가를 연구했다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총관이 왜 별채에서 태어난 반쪽짜리 도련님의 체질 따위에 관심을 가졌을까. 서류를 몇 장 더 넘겨보니, 내 몸의 기맥 상태를 기록한 그림과 함께 '완전 폐쇄가 아니라 인위적 봉인의 흔적으로 추정됨'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림은 내 몸의 경혈 위치를 표시한 것이었는데, 몇몇 지점에 붉은 동그라미가 겹쳐 그려져 있었고, 그 옆에는 알아볼 수 없는 필체로 뭔가가 잔뜩 적혀 있었다. '인위적 봉인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 하는 생각과 함께, 나는 그 문장을 다시 몇 번이나 읽어봤다. 처음엔 눈이 잘못 본 게 아닐까 싶어서 다시 읽었고, 그다음엔 문맥을 잘못 해석한 게 아닐까 싶어서 또 읽었다. 하지만 문장은 변하지 않았다. 완전 폐쇄가 아니라, 인위적 봉인의 흔적. 결맥체질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저주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상태라는 뜻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 '누군가'는 누구고, 왜 나에게 그런 짓을 한 걸까. 태어난 순간부터 이 몸에 뭔가를 심었다는 건데, 그게 가능한 일인가. 애초에 결맥체질이라는 진단 자체가 잘못된 거였다면, 나는 지금까지 십사 년을 헛짐작으로 저주받은 몸이라 여기며 살아온 셈이었다. 그 생각에 나는 실소가 나올 뻔했다. '십사 년 동안 저주받은 몸뚱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누가 자물쇠를 채워놓은 거였다고?' 웃기려야 웃을 수가 없는 농담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뻗어나가자, 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부모님의 실종과 이 문서 사이에 어떤 연결점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었다. 아버지가 이덕형 총관과 함께 뭔가를 연구했고, 그 연구 대상이 나였고, 그리고 그 직후에 부모님이 실종됐다면, 이 세 가지가 우연히 겹쳤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나는 손가락으로 종이 끝을 문지르며 계산해봤다. 세상에 우연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믿고 싶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 우연을 믿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미스터리를 파고들 시간이 없었다. 10일이라는 시한부가 여전히 내 목에 걸려 있었으니까. 부모님의 행방을 쫓는 것도, 이덕형이라는 인물을 조사하는 것도, 지금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고, 그 우선순위의 맨 위에는 언제나 '살아남기'가 있었다. 서류를 다시 상자에 넣고, 나는 창고를 나섰다. 해는 이미 완전히 저물어, 별채로 돌아가는 길이 어둠에 잠겨 있었다. 발밑으로 흙길이 밟히는 감촉이 이어졌고, 멀리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걸으면서 나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오늘 하루 쏟아진 정보량이 너무 많아서, 머릿속을 한 번 정리하지 않으면 이대로 잠들 수도 없을 것 같았다. '혈액을 안전하게 계속 뽑아내려면, 회복 시간이 필요하다' 하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다면 매일 일정량만 뽑고, 나머지 시간엔 몸을 쉬게 하면서 정혈을 축적하는 방식이 가장 합리적일 터였다. 무작정 많이 뽑았다가 몸이 못 버티고 쓰러지면, 그거야말로 조현민에게 좋은 구경거리만 만들어주는 꼴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가진 유일한 무기가 이 몸뚱이인데, 그 무기를 스스로 망가뜨릴 이유는 없었다. 별채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반지에게 물었다. '지금 내 상태가 어떤지 다시 확인해줘.' [대상: 강태민] [신체강도: 6.7] [혈액 회복 예상 시간: 8시간] 8시간이라는 숫자를 보며, 나는 간단한 계산을 해봤다. 하루에 두 번 정도 피를 뽑을 수 있다는 뜻이었고, 그렇다면 10일 동안 대략 20번의 흡수 기회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한 번에 0.4씩 오른다고 가정하면, 이론적으로는 신체강도를 8 정도 더 끌어올릴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손가락을 접으며 숫자를 되짚어봤다. 6.7에서 8을 더하면 대략 14.7, 넉넉잡아 15 정도. '그래봤자 15 정도인데, 조현민을 상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하는 생각이 들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현민의 신체강도가 정확히 얼마인지는 몰랐지만, 박기수 하나 상대하는 데도 이 지경으로 몰렸던 걸 생각하면, 조현민은 그보다 훨씬 위에 있을 게 뻔했다. 뭔가 다른 변수가 필요했다. 이대로 산술적으로 쌓아 올리는 것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때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아까 정혈 0.089단위로 상승폭이 0.4였는데, 만약 정혈의 양이 늘어날수록 상승폭도 비례해서 커진다면, 한 번에 많은 양의 피를 뽑는 게 오히려 효율적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다시 말해 조금씩 여러 번 뽑는 것보다, 한 번에 몸이 버틸 수 있는 최대치를 뽑아내는 게 총량 대비 효율이 더 높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까지의 계산은 전부 틀린 셈이었고, 나는 완전히 새로운 전략을 세워야 했다. 하지만 그 실험을 하기엔 지금 몸 상태가 너무 지쳐 있었다. 낮에 이미 상당한 피를 뽑았고, 박기수와의 실랑이로 체력도 소진된 상태였으니까. 팔다리가 무겁게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고, 눈꺼풀도 자꾸만 내려앉으려 했다. 이런 상태에서 무리하게 피를 더 뽑았다가는, 실험이고 뭐고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내일 다시 시도해보자' 하는 생각으로 나는 자리에 누웠다. 낡은 이불을 덮으며, 나는 오늘 하루 동안 벌어진 일들을 다시 곱씹었다. 자염성계라는 반지를 발견한 것, 정혈로 신체강도를 끌어올린 것, 박기수를 상대로 처음으로 밀리지 않은 것, 그리고 결맥체질이 저주가 아니라 누군가의 소행일지도 모른다는 실마리를 찾은 것.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은데, 이걸 전부 하루 안에 겪었다는 게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하루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벌어졌다는 걸, 그제야 실감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그냥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병약한 서자였는데, 오늘 하루로 그 전제가 통째로 흔들리고 있었다. 시한부는 여전히 유효했지만, 적어도 이제는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는 아니었다.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리며, 나는 눈을 감았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달빛이 방 안 벽지를 옅게 물들이고 있었고, 그 빛을 보다 스르르 잠이 들어가는 참이었다. 하지만 잠이 들기 직전, 문밖에서 낯선 발소리가 들렸다. 여러 명의 발소리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이불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시간에 별채를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조현민이든, 박기수든, 이렇게 밤늦게 찾아올 이유가 없었으니까. 조현민이라면 낮에 이미 볼 일을 다 봤을 테고, 박기수라면 오늘 나한테 제대로 당했으니 앙심을 품고 몰래 찾아올 법도 했지만, 발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최소한 세 명, 어쩌면 그보다 많았다. 게다가 그 발소리에는 익숙한 성급함이나 거친 느낌이 없었다. 오히려 조심스럽고, 절제된 걸음걸이였다. 나는 숨을 죽이고 문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였다.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이 안에 그 아이가 있다는 겁니까" 하는, 처음 들어보는 낮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고, 오히려 뭔가를 재차 확인받고 싶어 하는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들려온 대답에, 나는 심장이 얼어붙는 걸 느꼈다. "강태민의 부모가 남긴 물건 중에, 이덕형 총관이 찾던 게 있을 겁니다." 부모님의 실종과 관련된 사람이, 지금 내 별채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이불을 움켜쥔 채 미동도 하지 못했다. 방금 창고에서 봤던 그 이름이, 이 문밖에서 다시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연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하루 사이에 세 번이나 겹치는 우연을, 나는 더 이상 우연이라 부를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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