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버려졌더니 각성이라니

3화

한 달 후. 나는 박덕수의 창고에 완전히 적응해 있었다. 창고 안은 여전히 녹슨 철제 선반과 기름 냄새로 가득했지만, 이제는 그 냄새가 낯설지 않았다. 낮에는 그가 항구에서 가져온 폐품을 정리했다. 구리선 뭉치를 종류별로 나누고, 녹슨 철근은 따로 묶어 무게를 재고, 깨진 유리병은 조심스럽게 상자에 담았다. 한 달 전만 해도 손끝이 갈라지고 피가 났지만, 이제는 굳은살이 배겨 웬만한 파편에는 상처가 나지 않았다. 밤에는 창고 뒤편 공터에서 도검결 자세를 연습했다. 박덕수가 처음 가르쳐준 대로 다리를 어깨보다 넓게 벌리고, 숨을 아랫배까지 끌어내리는 동작이었다. 처음에는 삼 분도 버티지 못하고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았지만, 이제는 십 분이 넘도록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자세가 좀 잡히네." 박덕수가 말했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물고 내 자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가요?" 내가 대답했다. "팔 힘 빼. 어깨에 힘 들어가면 나중에 관절 나가." 나는 그의 말대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이 정도면 나중에 뇌역 개창할 때 몸 버릴 일은 없겠다." 그가 처음으로 나의 미래를 이야기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가슴 한쪽이 이상하게 뜨거워졌다. '나한테 미래가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 그동안 나는 그저 살아남는 것만 생각했는데, 박덕수는 내게 다음이 있다는 걸 당연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밤, 그가 평소보다 늦게 돌아왔다. 원래는 해가 지기 전에 항구 일을 마치고 창고로 돌아오는 사람이었는데, 그날은 자정이 다 되어서야 문이 열렸다. 나는 창고 구석에서 몇 번이나 문 쪽을 쳐다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 사고가 난 걸까.' '아니면 나를 두고 그냥 가버린 걸까.'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그의 그림자가 들어섰을 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입가에 피가 말라붙어 있었고, 걸음걸이가 이상했다. 한쪽 다리를 절며 걷는 게 눈에 보였다. "무슨 일이에요?" 내가 놀라서 물었다. "아무것도 아냐." 그가 말했다. 그는 나를 지나쳐 자기 자리로 가려 했다. 하지만 그의 옷 안쪽에서 피 냄새가 났다. 쇠 냄새 비슷한, 비릿한 그 냄새가 낡은 셔츠 사이로 스며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를 억지로 앉히고 옷을 걷었다. 그는 처음엔 손을 뿌리쳤지만, 내가 물러나지 않자 결국 순순히 앉았다. 갈비뼈 부근에 시커먼 멍이 크게 번져 있었다. 멍의 가장자리는 이미 푸르스름하게 변해가고 있었고, 중심부는 손바닥만 한 크기로 검게 부어 있었다. "누가 이랬어요?" 내가 물었다.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빚쟁이들." 박덕수가 낮게 대답했다. 그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뱉고 나서야 말을 이었다. "항구 일 하기 전에 도박판에서 진 돈이 있어." "얼만데요?" "삼백만 원." 그가 대답했다. 숫자를 듣는 순간 나는 속으로 계산을 시작했다. '삼백만 원이면 우리가 폐품 정리해서 버는 돈으로는 몇 달이 걸릴까.' '저 사람 항구에서 받는 일당이 하루에 오만 원쯤 될까.' 계산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말을 이었다. "갚을 때까지 매달 이럴 거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그의 갈비뼈에 붙어 있는 멍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만져보았을 뿐이다. 박덕수는 아프다는 말 한 번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날부터 나는 박덕수가 항구에 나가는 시간을 몰래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가 잠든 밤이면 낡은 수첩을 꺼내 날짜를 적어두었다. '저 사람들이 오는 날짜는 항상 15일 전후다.' 나는 그렇게 되뇌며, 15일이 다가올 때마다 창고 근처를 서성거렸다. 창고 앞 골목 어귀에 서서 낯선 발소리가 나는지 귀를 기울이는 게 습관이 되었다. 박덕수는 그런 나를 보고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가끔 도검결 자세를 가르칠 때, 평소보다 더 오래 붙잡고 자세를 고쳐주었다. 그리고 정확히 다음 달 15일, 낯선 남자 셋이 창고 앞에 나타났다. 한 명은 덩치가 크고 팔뚝에 문신이 있었고, 다른 두 명은 그보다 작았지만 눈빛이 사나웠다. "박덕수 어디 있어!" 남자 하나가 소리쳤다. 목소리가 창고 벽에 부딪혀 울렸다. 나는 겁이 났지만 문 앞을 막고 섰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나는 박덕수가 가르쳐준 대로 숨을 아랫배로 끌어내렸다. "안 계세요." 내가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이 새끼는 뭐야?" 남자가 나를 밀치려 했다. 그의 손이 내 어깨를 향해 뻗어왔다. 그 순간 나는 박덕수가 가르쳐준 자세를 취했다. 다리를 벌리고 숨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무릎을 살짝 굽히고 몸의 중심을 낮췄다. 남자가 나를 밀었지만, 나는 넘어지지 않았다. 발바닥이 땅에 뿌리박힌 것처럼 버텨졌다. "어, 이 꼬맹이 뭐 배웠나?" 남자가 비웃었다. 다른 두 명도 낄낄거리며 다가왔다. 그때 뒤에서 박덕수가 뛰어왔다. 그의 발소리가 창고 안쪽에서부터 울려왔다. "손대지 마!" 그가 소리쳤다. 박덕수는 나를 뒤로 밀치고 대신 앞에 섰다. 그의 등이 나보다 훨씬 크고 넓어서, 순간 그 뒤에 완전히 가려졌다. "돈, 다음 주까지 준다." 그가 말했다. "애는 상관없는 일이야." 남자들은 몇 마디 욕을 더 하고는 돌아갔다. 그들의 발소리가 골목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날 밤, 박덕수는 나에게 처음으로 사과했다. 그는 창고 안 등불 아래 앉아 담배도 피우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하다." 그가 말했다. "이런 거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저는 괜찮아요." 내가 대답했다. "괜찮긴, 애새끼가." 그가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손바닥이 크고 거칠어서 머리카락이 헝클어질 정도로 세게 문질렀다. 나는 그 손길이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으로, 누군가 나를 지켜줄 사람이 있다는 걸 느꼈다. 그동안 나는 나 자신 말고는 아무도 나를 막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날 밤 그 생각이 조금 흔들렸다. 그 뒤로 나는 매달 15일마다 그와 함께 빚쟁이들을 상대했다. 나는 문 앞에 서 있는 역할이었고, 박덕수는 언제나 내 뒤에서 협상을 하는 쪽이었다. 돈은 늘 조금씩 갚아나가는 듯했지만, 삼백만 원이라는 숫자는 쉽게 줄어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비밀은, 우리 둘만 아는 이야기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언젠가 그 숫자가 줄어드는 대신 오히려 늘어나는 날이 올까 봐, 매달 15일이 다가올 때마다 속으로 조용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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