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낡은 몸, 최강의 마법사

1화

밤이 깊었다. 정목 공국의 왕궁 서쪽, 오래전 폐쇄된 별궁의 지하실에는 인적이 없었다. 습기 찬 벽돌 냄새가 코를 찔렀고, 촛불 하나가 흔들릴 때마다 그림자가 벽을 따라 길게 늘어졌다 줄어들었다. 정목하린은 그 촛불 하나에 의지해 바닥에 새겨진 마법진을 마지막으로 손질하고 있었다. 붓끝이 지나는 자리마다 은빛 선이 새겨졌고, 그 선은 조금씩 스스로 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선이 하나라도 어긋나면 소환은 실패한다. 그것이 그녀가 아는 소환 마법의 전부였다. '실패하면 두 번은 없다.' 그녀는 붓끝을 다잡으며 그렇게 되뇌었다. 손끝이 떨렸다. 밤을 새워 그은 선이 벌써 열두 시간째였다. 마법사에게 마력의 소모는 곧 목숨의 소모와 같다는 것을, 하린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하린은 5급 마법사였다. 공국 내에서 결코 낮은 등급이 아니었으나, 대륙 최상급으로 불리는 법신을 불러내기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법신을 부르는 진을 완성하려면 최소 8급 이상의 실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상식으로 통했다. 하린은 그 상식을 무시했다. 부족한 실력은 시간과 정성으로 메울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녀는 벌써 석 달째 이 지하실을 드나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이 무모한 시도를 감행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오라비 정목태오가 최근 사병을 늘리고 있다는 소문이 궁 안에 파다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그저 호위를 늘리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 수가 백을 넘고 이백을 넘어서자, 궁의 늙은 신하들조차 뒤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공자님이 무슨 전쟁을 준비하시는 것도 아니고." 그런 말들이 시녀들의 입을 타고 하린의 귀에까지 흘러들었다. 아버지 정목규 대공은 그 소문을 알고도 애써 웃어넘겼다. "태오도 언젠가는 철이 들 것이다." 대공은 그렇게 말하며 딸의 걱정을 다독였다. "아버지, 그건 철이 드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병의 수가 이미 대공가의 정규군에 맞먹습니다." 하린이 몇 번이고 간언했지만, 대공은 그 말을 웃음으로 넘겼다. "그 아이도 내 자식이다. 자식이 아비를 해하겠느냐." 대공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나 하린은 알고 있었다. 오라비의 눈빛에 담긴 것이 형제의 정이 아니라는 것을. 어머니를 일찍 여읜 하린에게 아버지는 유일한 울타리였다. 태오는 처음부터 그 울타리 바깥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같은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으나, 배가 달랐다. 태오의 어머니는 후궁이었고, 하린의 어머니는 정비였다. 그 차이가 태오의 눈빛 깊은 곳에 늘 서늘한 것을 심어두었다는 걸, 하린은 어린 시절부터 느껴왔다. 연회에서 마주칠 때마다 태오는 웃는 얼굴로 하린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눈까지 닿지 않았다. '저 웃음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아버지는 정말 모르시는 걸까.' 하린은 그렇게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마법진의 마지막 획을 그은 하린이 손을 떼자, 진이 은은하게 빛을 내며 스스로 자리를 잡았다. '완성됐다.' 그녀의 입가에 옅은 안도가 스쳤다. 석 달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은 순간이었다. 이제 이 진 위에 제물을 바치고 대가를 치르면, 법신을 이 세계로 불러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진을 실제로 가동하려면 아직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그저 만약을 위한 준비일 뿐이었다. '아버지가 계신 한, 이 진을 쓸 일은 없을 것이다.' 하린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린은 촛불을 끄고 서둘러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 별궁을 나선 하린은 곧장 본궁으로 향했다. 밤이 늦었지만 아버지에게 문안을 드리고 싶었다. 지하실에 갇혀 있느라 며칠 얼굴도 뵙지 못한 터였다. 아버지가 요즘 부쩍 야위셨다는 시녀들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회랑을 따라 걷는 그녀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빨랐다. 밤바람이 옷깃을 흔들었지만, 하린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회랑을 돌기도 전에, 낯빛이 하얗게 질린 시녀 하나가 그녀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치맛자락이 흐트러진 채였고,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듯 발걸음이 엉망이었다. "공주님..." 시녀는 숨이 턱까지 차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어깨가 크게 들썩였고, 두 손은 허공을 붙잡으려는 듯 떨렸다. "무슨 일이냐." 하린의 목소리가 절로 낮아졌다.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스쳤다. 이런 시각에 시녀가 이토록 다급히 달려올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대공 전하께서... 대공 전하께서 승하하셨습니다." 하린은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말의 의미가 머릿속에 들어오는 데 시간이 걸렸다. 방금까지 자신을 다독이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직 귓가에 남아 있었다. 며칠 전 함께 앉아 차를 나누던 자리에서, 아버지는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태오도 언젠가는 철이 들 것이다." 그 말이 다시 떠올랐다. 이제는 다시 들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승하라니.' 그녀는 속으로 그 말을 되풀이했다. 되풀이할수록 낯설어졌다. 아버지는 병색조차 없었다. 그저께도 정원을 함께 걸으며 웃으셨다. "언제, 어떻게." 하린이 겨우 물었다.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갈라졌다. "조금 전입니다. 침소에서... 갑자기..." 시녀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그녀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대공을 오래 모신 늙은 시녀였다. 하린의 발끝이 떨렸다. 그러나 그녀는 곧 치맛자락을 그러쥐고 본궁을 향해 달렸다. 치맛단이 발에 걸려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병색도 없던 아버지였다. 어젯밤까지도 정무를 보던 사람이 갑자기 숨을 거둔다는 것은, 하린이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최근 궁 안에서 은밀히 몸을 불리던 오라비의 사병들이었다. '설마.' 그 생각을 완성하기도 전에, 하린은 이미 본궁 앞뜰에 도착해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심장이 귀에까지 울리는 듯했다. 본궁으로 이어지는 대문은 평소라면 활짝 열려 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앞뜰에는 벌써 갑주를 갖춰 입은 병사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수가 스물, 서른을 넘어 앞뜰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대공의 죽음을 알린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토록 빨리 병력이 모였단 말인가. '이건 우연이 아니다.' 하린의 등에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그들의 갑옷에 새겨진 문장은, 대공가의 것이 아니라 태오의 개인 문장이었다. 검은 매의 형상, 태오가 손수 골랐다는 그 문장이 병사들의 가슴마다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하린의 걸음이 그 자리에서 굳었다. 병사들 사이로, 낯익은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느긋한 걸음걸이였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하린은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한기를 참아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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