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본궁 침소 앞은 인산인해였다.
새벽 종이 울리기도 전부터 궁인들이 몰려나와 복도를 가득 메웠다. 등불 그림자가 벽마다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 불빛 아래 신하들이 저마다 낯빛을 굳히고 서 있었지만, 그 눈빛에는 슬픔보다는 계산이 더 짙게 배어 있었다.
'대공이 승하했다.' 그 소식이 궁 안에 퍼진 것은 채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런데도 벌써 파벌이 갈리고, 눈짓이 오가고, 누구의 곁에 서야 하는지 저마다 셈을 끝낸 얼굴들이었다.
하린이 다가서자 그들은 마치 미리 짜맞춘 듯 일제히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이던 자들이었다. 오늘은 그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왜 나를 피하는 것이지.' 그녀는 그 이상함을 애써 무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지나칠 때마다 소곤거리는 소리가 뒤통수에 따라붙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그 어조만으로도 좋은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침소 문 앞에 선 위병 둘이 그녀를 보고도 아무 말 없이 길을 터주었다. 그 침묵조차 낯설었다. 평소라면 그녀에게 예를 올리며 문을 열어주었을 자들이었다.
하린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대공의 시신은 침대 위에 반듯이 눕혀져 있었다. 흰 천이 목까지 덮여 있었고, 그 위로 드러난 낯빛은 이미 창백해져 생전의 온기를 짐작할 수 없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에게 정무를 가르치며 웃던 그 얼굴이었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을 잊지 마라.' 아버지가 늘 하던 말이었다. 그 말을 남긴 입술이 지금은 굳게 다물린 채 열릴 줄을 몰랐다.
하린은 무릎을 꿇고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며칠 전 손을 맞잡았을 때만 해도 온기가 있었다. 그 온기가 이렇게 빨리 사라질 줄은 몰랐다.
"아버지..."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눈물이 쏟아졌으나,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슬픔을 온전히 느끼기도 전에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기 때문이다. 발소리는 느긋했다.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듯이.
"이제 와서 우는 척이라니, 우습군." 낮고 서늘한 목소리였다.
하린이 돌아보니, 문 앞에 정목태오가 서 있었다. 검은 상복 대신 화려한 예복을 갖춰 입은 그의 모습은, 조문객이 아니라 이미 새로운 대공이 된 자의 것이었다. 옷깃에 새겨진 문양마저 대공가의 정통 문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것을 준비하는 데만도 최소 며칠은 걸렸을 터였다.
'언제부터 저 옷을 지어두었던 것인가.' 하린은 그 생각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오라버니..." 하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릎이 아직 떨리고 있었으나, 그 앞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오라버니라 부르지 마라. 오늘부로 나는 이 공국의 대공이다." 태오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그 표정에는 조금의 애도도 없었다. 마치 오래 기다려온 순간이 드디어 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주변 신하들은 이미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대공에게 충성을 다짐하던 자들이, 이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 아들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 전환의 속도가 놀라울 지경이었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해 오래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이것이 궁의 방식인가.' 하린은 속으로 씁쓸하게 되물었다. 권력은 사람의 마음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다음 대공의 옷깃을 향해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하린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 힘을 주려 애썼으나 여전히 떨림이 남아 있었다.
"급환이었다. 어의가 이미 그렇게 진단했지." 태오가 말을 끊었다. 그의 눈빛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미리 준비해둔 대답을 읽는 듯했다. 문장 하나하나가 이미 몇 번이나 되풀이해 다듬어진 것처럼 매끄러웠다.
"어의가 진단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걸렸습니까." 하린이 물었다. 그 질문에 태오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는 분명히 보았다.
"그것을 왜 네가 궁금해하지." 태오가 되물었다. 대답을 회피하는 방식이었다.
"그런 얼굴로 나를 보지 마라, 하린. 네가 아버지의 후계자 자리를 노렸다는 것은 궁 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태오가 화제를 돌렸다. 그것도 아주 노련하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하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억울함과 두려움이 동시에 목구멍을 조여왔다.
"사실이 아니라면 왜 아버지가 승하한 이 밤에, 네가 별궁 지하에서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는지 설명해봐라."
하린의 숨이 멎었다. 그가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소름이 끼쳤다. 그 장소를 아는 자는 극히 드물었다. 그녀 스스로도 은밀히 움직였다고 믿었던 곳이었다.
'감시당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깨달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 순간, 지금까지의 모든 순간들이 다시 떠올랐다. 별궁으로 향하던 밤길, 지하로 내려가던 계단, 누군가의 시선이 있었을 법한 그 모든 어둠들이.
"그것은..." 그녀가 말을 이으려 했으나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법진을 그린 이유를 설명하자면 더 깊은 진실을 꺼내야 했다. 그리고 그 진실은 지금 이 자리에서 밝힐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공주가 흑마법으로 대공 전하를 해쳤다는 소문이 벌써 궁 밖까지 퍼졌습니다." 신하 하나가 태오의 편을 들어 말했다. 목소리에는 확신이 넘쳤으나, 그 확신의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저는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 하린이 항변했으나, 그 말에 귀 기울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침소 안의 모든 시선이 이미 그녀를 죄인으로 낙인찍은 뒤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것을 깨달았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누가 대공의 자리에 앉아 있느냐는 것뿐이었다.
"공주를 감금하라." 태오가 명령했다. 목소리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호위병들이 다가서는 순간, 하린은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감금이라는 말은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감금이 아니라 처형을 위한 명분 쌓기라는 것을, 그녀는 그 짧은 순간에 알아차렸다.
'여기서 잡히면 끝이다.' 그 생각이 그녀의 다리를 먼저 움직이게 했다. 생각보다 몸이 앞섰다. 그것과 함께, 하린은 몸을 돌려 침소 밖으로 달아났다.
호위병 하나가 손을 뻗었으나 옷깃만 스쳤을 뿐이었다. 하린은 복도를 가로질러 달렸다. 뒤에서 병사들의 발소리가 어지럽게 따라붙었다.
등 뒤에서 태오의 웃음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웃음소리에는 그녀가 결코 멀리 도망칠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