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집까지 가는 길이 이토록 멀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8년간 다져온 진기가 다리로 몰려들었다.
발끝이 땅에 닿을 때마다 아릿한 통증이 정강이를 타고 올라왔다.
개의치 않았다.
멈출 수 없었다.
시험장을 나서던 순간부터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가슴 한쪽이 서늘하게 가라앉는 느낌.
그 느낌은 옳았다.
골목을 돌았다.
낯익은 담벼락들이 스쳐 지나갔다.
평소라면 눈에 들어왔을 이웃집 개 짖는 소리도, 저잣거리의 소음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대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마당을 가로질렀다.
방문을 열어젖혔다.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 냄새를 맡는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8년을 살면서 익숙해진 냄새였다.
피 냄새.
하지만 이토록 짙은 적은 없었다.
의부님, 이덕수 어른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입가와 이불 위로 검붉다 못해 검은 피가 흥건했다.
숨소리가 가늘게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었다.
"의부님!"
나는 신발도 벗지 못한 채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무릎을 꿇고 그를 안아 일으켰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마른침을 삼켰다.
품 안에 안긴 몸이 이토록 가벼웠던가.
예전엔 태산처럼 든든하던 그 몸이 지금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얇았다.
의부님의 눈이 힘겹게 열렸다.
초점이 흐릿했다.
그래도 나를 알아본 듯,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왔느냐."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시험은… 어찌 되었느냐."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억눌렀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은 몸을 추스르셔야…"
"괜찮다."
그가 낮게 내뱉었다.
"내 몸은… 내가 가장 잘 안다."
의원 출신인 의부님이었다.
스스로의 상태를 모를 리 없었다.
그렇기에 더 두려웠다.
그가 자신의 몸을 안다고 말하는 순간, 오히려 절망이 짙어졌다.
희망을 걸 여지조차 스스로 잘라내는 말이었다.
"설아야!"
나는 목청껏 외쳤다.
밖에서 발소리가 다급하게 들렸다.
설아가 급히 물수건과 약재를 들고 왔다.
손이 떨려 그릇을 놓칠 뻔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오라버니, 어떡해요… 어떡하죠…"
나는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의부님의 손목을 잡았다.
맥을 짚었다.
8년간 배운 것 중에는 의술도 있었다.
의부님이 직접 가르친 것이었다.
그 손끝의 감각이 지금 이 순간처럼 원망스러운 적이 없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맥동이 위태로웠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실낱같은 흐름.
정상적인 맥이라면 힘 있게 뛰어야 할 자리가, 마치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말기 내상.
오래전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다.
가끔 기침 끝에 피가 섞여 나오던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밤마다 홀로 앓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의부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어넘겼다.
하지만 이 정도로 급격히 무너질 줄은 몰랐다.
설아가 물수건으로 의부님의 입가를 닦았다.
손이 떨려 제대로 닦이지도 않았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짧게 붙잡았다가 놓았다.
지금은 위로할 겨를도 없었다.
"…들어라."
의부님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는 그의 상체를 조심스럽게 받쳐 올렸다.
등 뒤로 손을 넣어 기대게 했다.
"내 몸속 내상은… 보통 약재로는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다."
그 말에 이미 짐작이 갔다.
현선학원의 장서각에서 밤을 새워가며 읽었던 의서들.
그 안에 적혀 있던 구절이 머릿속을 스쳤다.
"천원단."
내가 먼저 말했다.
의부님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리고 다시 잦아들었다.
"…알고 있었구나."
"현선학원의 장서각에서 읽었습니다."
나는 담담히 말했다.
"현선선발전 상위 여덟 명에게만 하사되는 영약. 신위 경지에 도전할 자격을 지닌 자만이 받을 수 있다고."
의부님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것 말고는… 이 내상을 다스릴 방도가 없다."
방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창밖에서 바람이 창호지를 스치는 소리만 들렸다.
설아는 더 이상 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 어깨만 들썩였다.
나는 그 침묵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의부님이 낮게 속삭였다.
"내 몸은 이제… 반년을 넘기기 어렵다."
반년.
그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박혔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가, 다시 차갑게 정리되었다.
계산이 시작되었다.
현선선발전은 매해 늦가을에 열린다.
지금은 초여름.
반년 안에 대회가 열리고, 그 안에서 상위 여덟 안에 들어야 한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아니,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의부님의 손을 꼭 쥐었다.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살아 있는 사람의 온기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제가 반드시 그 안에 들겠습니다."
목소리가 낮았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천원단을 가져오겠습니다."
의부님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 무언가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안도와 걱정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내 얼굴을 눈에 새기려는 것처럼.
"…네 실력은 이미 알고 있다."
그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현선선발전은… 淬體八重 정도로는 부족하다."
나는 숨을 멈췄다.
내 경지를 정확히 짚어낸 말이었다.
8년간 매일같이 단련해 온 몸.
淬體八重.
스스로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성취였다.
하지만 그 자부심이 지금 이 순간,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 안에서 겨루게 될 자들 중에는… 이미 淬體九重, 그 이상에 다다른 자들도 있을 것이다."
의부님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淬體九重.
그 이상.
나조차 아직 넘어보지 못한 경지였다.
현선학원에서도 손에 꼽는 천재들만이 도달했다고 알려진 경지.
그런 자들과 겨루어 상위 여덟 안에 들어야 한다.
그것도 반년 안에.
의부님의 눈이 그대로 감겼다.
"의부님!"
나는 다급히 그를 흔들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숨소리를 확인하려 귀를 그의 코끝에 가져다 댔다.
다행히 숨은 붙어 있었다.
다만 혼절한 것뿐이었다.
가늘고 위태로운 숨결이었지만, 분명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설아가 흐느끼며 이불을 덮어 드렸다.
그녀의 손끝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짧게 일렀다.
"물을 끓여 와라. 그리고 지혈에 쓸 천을 더 준비해."
설아가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섰다.
나는 의부님의 곁에 잠시 더 앉아 있었다.
가늘게 뛰는 맥동을 다시 한번 짚어보았다.
조금 전보다는 안정된 듯했지만, 여전히 위태로운 흐름이었다.
방문 밖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초여름의 밤하늘.
별빛이 유난히 흐릿하게 느껴졌다.
반년.
그 안에 淬體九重을 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까지도.
지금까지 걸어온 8년의 시간이 결코 짧지 않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8년이 얼마나 얕은 발판이었는지 뼈저리게 실감했다.
淬體八重에서 淬體九重으로.
경지 하나를 넘는 데에도 보통은 수년이 걸린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것을 반년 안에, 그것도 그 이상까지 도달해야 한다.
말이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어떻게든.
의부님의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그리고 그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 나밖에 없었다.
밤바람이 서늘하게 옷깃 사이로 스며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다음 걸음을 계산하고 있었다.
현선학원의 장서각.
그곳에 남은 시간, 남은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날이 밝는 대로 움직여야 했다.
반년이라는 시간은, 망설일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