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시험관님, 저 병약 아닙니다

5화

사흘 뒤. 현선학원 연무장. 돌바닥 위로 아침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다. 새벽 공기는 아직 서늘했고, 연무장을 둘러싼 담벼락 너머로 해가 막 떠오르는 참이었다. 발밑 돌바닥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 냉기가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걸 느끼며, 나는 숨을 천천히 골랐다. 연무장 사방을 둘러싼 관람석에는 이미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소문이 퍼진 탓이었다. 체환진을 뒤흔든 병약한 소년과, 淬體八重 원만의 조현. 둘의 대결이라니 흥미가 동할 수밖에 없었다. 학원 내에서 淬體八重에 이른 자는 손에 꼽혔고, 그것도 원만의 경지라면 더더욱 드물었다. 그런 자와 병약하다 소문난 소년이 맞붙는다니, 구경거리로는 더할 나위 없었을 것이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 붙는 거야?" "들었어, 체환진 사건. 그때 그 소년이래." "淬體八重 원만이면 그냥 짓밟히는 거 아니냐." 나는 그 말들을 흘려들으며 연무장 중앙에 섰다. 맞은편에서 조현이 걸어 나왔다. 검은빛이 도는 경장. 허리에 찬 장검. 부유한 집안에서 마련해 준 특제 무구였다. 검집에 새겨진 문양만 봐도 값이 상당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눈빛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럴 만도 했다. 淬體八重 원만이라는 경지는 이 나이대 소년들 사이에서는 거의 정점에 가까운 성취였으니까. "후회할 기회는 사흘이나 줬다." 조현이 검을 뽑으며 말했다. 차가운 검명이 울렸다. 뽑아 든 검신이 아침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번뜩였다. 나는 아무 무기도 들지 않았다. 맨손이었다. 관람석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저거 봐, 무기도 없잖아." "완전히 자포자기한 거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淬體八重 원만을 맨손으로…" 수군거림이 점점 커졌다. 개중에는 대놓고 실소를 흘리는 자들도 있었다. 나는 그 시선들에 개의치 않았다. 무기 따위는 애초에 필요치 않았다. 대호가 관람석 맨 앞줄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그 옆에 한설아가 어느샌가 자리하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 표정이었다. 둘 다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심판을 맡은 교관이 손을 들었다. "시작." 그 한마디와 함께 조현이 먼저 움직였다. 파공음이 울렸다. 검이 허공을 갈랐다. 淬體八重 원만다운 속도였다. 예사 소년이라면 반응조차 못 했을 것이다. 검신이 그리는 궤적이 눈으로 좇기 힘들 만큼 빨랐다. 나는 상체를 살짝 비틀었다. 검날이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서늘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다. "…!" 조현의 눈이 흔들렸다. 그의 검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간 뒤에도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검이 닿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자세였다. 곧바로 두 번째 베기가 이어졌다. 이번엔 아래에서 위로 올려치는 궤적이었다. 검신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한층 날카로워졌다. 나는 반보 물러서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검신과 손바닥이 맞부딪쳤다. 챙! 쇳소리가 아니라 둔탁한 충격음이 울렸다. 살과 쇠가 맞부딪치는 것치고는 이상할 만큼 무거운 소리였다. 조현의 팔이 크게 튕겨 나갔다. 그가 휘청이며 두 걸음 물러섰다. 관람석이 순간 조용해졌다.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맨손으로 검을… 막았다고?" 누군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조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손목이 저릿한 듯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검을 쥔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가 이를 악물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자존심이 상한 듯 입가가 씰룩였다. 淬體八重 원만이라는 자부심이 무너지는 걸 스스로도 느끼고 있는 눈치였다. 이번에는 연격이었다. 검이 세 갈래로 갈라지듯 잔상을 남기며 밀려들었다. 淬體八重 원만의 진짜 실력이었다.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연무장 공기를 흔들었다. 관람석에서 누군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틈새를 파고들었다. 8년간 냉천곡의 얼음물 속에서 다진 몸. 뼈마디 하나하나가 얼어붙는 고통 속에서 버텨낸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지금 이 한순간을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진룡련체결》의 첫 번째 초식. 용린파(龍鱗波). 짧게 되뇌며 손끝에 기운을 모았다. 손바닥 아래로 뜨거운 기운이 응축되는 감각이 느껴졌다. 퍽! 손바닥이 조현의 검신 옆면을 정확히 후려쳤다. 검이 그대로 튕겨 나가 바닥에 꽂혔다. 검신이 바닥에 박히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조현의 몸이 뒤로 붕 떠올랐다가 바닥을 굴렀다.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연무장 전체가 얼어붙은 듯 조용해졌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방금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 얼굴들이었다. 조현이 흙바닥에 엎어진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빛에 경악과 굴욕이 뒤섞여 있었다. 입가에서 흙먼지가 묻어났고, 검을 쥐었던 손은 힘없이 바닥을 짚고 있었다. "…어떻게…"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목소리에 자존심이 무너지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나는 담담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딱히 승리감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담담한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淬體八重, 원만." 짧게 말했다. 조현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것이 뜻하는 바를 그도 알고 있었다. 같은 경지, 그러나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가 자랑스럽게 여기던 성취가, 눈앞의 소년에게는 아무런 벽도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를 짓눌렀다. 관람석에서 대호가 벌떡 일어나 환호했다. "봤냐! 저게 내 친구다!" 목청껏 외치는 소리가 연무장에 쩌렁쩌렁 울렸다. 하지만 그 소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연무장 입구 쪽에서, 낯선 인영이 천천히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허름해 보이는 회색 장포를 걸쳤지만, 걸음걸이마다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마치 연무장 바닥을 짓누르는 듯한 무게감이 있었다. 장내의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교관들의 낯빛이 하나같이 굳어졌다. 방금까지 심판을 보던 교관마저 자세를 낮추며 뒷걸음질쳤다. 그 반응만으로도 노인의 정체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노인의 시선이 곧장 나를 향했다. 실눈을 뜨고 나를 살피는 눈빛. 마치 속을 훤히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 눈빛이 살갗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지금껏 마주한 그 누구와도 궤를 달리하는 기운이었다. 조현의 검기 따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훨씬 깊고 무거운 무언가가 그 눈빛 안에 서려 있었다.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호오." 노인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웃음소리 하나에도 관람석 전체가 얼어붙는 듯했다. "진룡련체결이라. 실로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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