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회전하는 빛의 고리가 허공에 떠 있었다.
빙글빙글.
느릿하게 돌아가는 모습이 꼭 세탁기 안에서 도는 빨래 같았다.
[영근 감정 중... 60%]
[영근 감정 중... 90%]
이진은 그 빛을 노려보았다.
전생의 게임 지식이 있었다면 도움이 됐을 텐데, 천선대륙은 정식 서비스 전이라 정보가 아예 없었다.
공략도 없고, 위키도 없고, 커뮤니티도 없었다.
그냥 감으로 버텨야 했다.
이진은 손끝을 꼼지락거렸다.
긴장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손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이럴 때 보면 몸이 마음보다 솔직하다니까.
딩—
[영근 감정 결과: 흙속성 영근]
[등급: 하급]
이진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하급.
다른 것도 아니고 하급.
상급도 아니고, 중급도 아니고, 심지어 중하급도 아니고 하급.
"...이게 뭐야."
목소리가 저절로 새어나왔다.
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규의 빛무리가 살짝 흔들렸다.
"음, 흙속성은 사실 대운제국에서 가장 흔한 영근입니다. 왕족분들 중에서도 거의 안 나오시는데."
"위로하는 거야, 놀리는 거야."
"...둘 다입니다."
솔직해서 더 얄미웠다.
이진은 관자놀이를 짚었다.
이진은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26년 회사원 생활 끝에 영재로 환생했다고 좋아했는데, 이제 갓난아기 시절부터 특별함을 흘리고 다녔는데, 결국 뽑기에서 하급을 받았다.
남들은 첫돌도 안 됐을 때 손끝에서 불꽃이 튀었다는데, 자기는 흙 속성에 그것도 하급이었다.
허무하네, 이거.
전 직장에서도 늘 이런 식이었다.
남들은 대박 프로젝트 배정받고, 자기는 서류 정리만 하는.
운은 죽어서도 안 따라주는구나.
"이거 다시 뽑을 수는 없어?"
"뽑기는 1회입니다. 영구 확정입니다."
"확정이라..."
이진은 숨을 골랐다.
짜증나긴 한데, 여기서 화내봐야 상황이 바뀌는 것도 아니었다.
회사 다닐 때도 그랬다.
부장한테 소리쳐봐야 월급은 그대로였다.
현실 받아들이고 다음 수를 찾는 게 정답이었다.
일단 뭐가 있는지 좀 더 파봐야지.
"흙속성 영근이라도 등급 안에서 특수 판정 있는 거 아니야?"
혼잣말처럼 던진 질문이었는데, 규의 반응이 미묘하게 늦었다.
0.5초쯤, 아니 그보다 조금 더 길었나.
그 짧은 틈이 이진의 눈에는 확실히 보였다.
"...보통 그런 건 없습니다."
"보통이 아닌 경우는?"
"그건 제가 답할 권한이 없습니다."
권한이 없다는 말은 있다는 뜻이었다.
이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전생에 계약서 검토만 몇 년을 했다.
저런 애매한 화법은 거의 예술의 영역이었다.
'권한 없음'은 백 퍼센트 뭔가 있다는 신호였다.
"그러니까, 있는데 말은 못 한다는 거지."
"...그런 식으로 해석하시면 곤란합니다."
"해석 말고 사실을 말해봐."
"저는 안내 권한만 있습니다."
안내 권한만.
말장난이 아주 익숙한 걸 보니, 저 빛무리도 어디선가 교육을 받은 게 틀림없었다.
이진은 일단 물러섰다.
더 캐물어봐야 규가 순순히 뱉을 것 같지 않았다.
그 순간, 감정 결과창 아래로 작은 숫자 하나가 스쳤다.
너무 빨리 지나가서 규도 못 본 듯했다.
[이상 신호 감지: 파편형 잠재 인자 존재]
이진이 손을 뻗어 그 문구를 붙잡듯 움직였다.
실체가 없는 텍스트였지만 손짓에 반응하듯 창이 확대됐다.
반투명한 빛 조각이 손끝에 닿는 느낌이었다.
차갑고, 동시에 미세하게 저릿했다.
[뇌령(雷灵) 파편 흔적 발견]
[분석 필요 - 조건: 특정 자극 3회 이상 노출]
뇌령?
흙속성 밑에 벼락 기운이 숨어 있다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조합처럼 들렸다.
흙이랑 벼락이 무슨 상관이야.
그런데 이상하게 심장이 빨리 뛰었다.
이진은 그 문구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글자가 사라질까 봐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규가 그 창을 발견하고 순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빛무리가 크게 한 번 출렁였다.
사람이었다면 뒷걸음질 친 모양새였다.
"어, 그건, 아마 오류일 겁니다."
"오류?"
"네, 뽑기 시스템이 초기라서 잔여 데이터가 남아 있을 수 있어요."
이진은 그 설명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규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빨라졌다.
뭔가를 감추려는 사람이 딱 저런 식으로 말한다.
전 직장 상사도 딱 저렇게 얼버무렸다.
'이거 그냥 시스템 버그예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하고 넘기려다가 나중에 사고 터진 적이 몇 번이었더라.
"오류든 아니든, 확인은 해야지."
"지금은 조건이 안 맞아서 확인 불가능합니다."
"조건이 뭔데."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또 그 말.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권한이 없습니다.
레퍼토리가 한정적이었다.
"너 혹시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도 이런 식으로 얼버무려?"
"...그건 개인정보에 해당해서 답변드릴 수 없습니다."
"방금 그건 대답한 거잖아."
규가 잠깐 말을 멈췄다.
빛무리 색이 살짝 흐려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저 반응, 딱 걸렸을 때 나오는 반응이었다.
이진은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그 문구를 마음속에 새겨뒀다.
특정 자극 3회 이상 노출.
뭔지는 몰라도 앞으로 겪을 일 중에 답이 있을 것 같았다.
사냐 죽냐도 아니고, 겨우 정보 하나 가지고 이렇게까지 숨기는 걸 보면 분명 값어치가 있는 물건이었다.
[제1 관문 클리어 보상 지급]
[보상: 하급 체력 강화 부적 1매]
초라한 보상이 손에 쥐어졌다.
부적은 그냥 누렇게 낡은 종이 한 장이었다.
모서리가 살짝 접혀 있고, 귀퉁이엔 얼룩까지 있었다.
이걸 만든 사람이 정성을 들였는지 의심스러운 수준이었다.
이진은 부적을 손끝으로 돌려봤다.
"이거 진짜 효과 있어?"
"물론입니다. 하급이지만 체력 보정치가 존재합니다."
"보정치가 몇인데."
"...미미한 수준입니다."
미미한 수준.
규는 참 사람 김빠지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규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접속은 신체가 충분히 회복된 후에 가능합니다."
"회복이라니, 나 다친 데 없는데."
"정신적으로요."
정신적으로라니.
그 말이 묘하게 아팠다.
하급 판정 하나에 이렇게까지 흔들릴 줄은 몰랐는데, 규 말이 맞았다.
지금 이진의 속은 엉망이었다.
"잠깐, 나 아직 물어볼 게 남았는데."
"다음에 뵙겠습니다."
"야, 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야가 흔들렸다.
의식이 빠르게 끌어당겨졌다.
바닥이 꺼지는 느낌,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동시에 밀려왔다.
마지막으로 본 건 규의 표정이었다.
웃고 있었는데,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이상하네.
분명 도와주는 안내자인데, 뭔가 자꾸 걸린다.
저 뇌령 파편이라는 것도, 규의 저 표정도, 전부 뭔가를 숨기고 있는 낌새였다.
생각이 끝나기 전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암전 속에서 마지막으로 떠오른 문구 하나가 잔상처럼 남았다.
[분석 필요 - 조건: 특정 자극 3회 이상 노출]
세 번.
뭘 세 번 겪어야 한다는 건지, 이진은 그것조차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