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그날 밤, 저택 지하의 창고 한 곳이 임시 심문실로 바뀌었다.
원래는 곡물과 소금을 쌓아두던 곳이었다. 습기 찬 돌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발끝을 타고 스며들었다. 벽에는 아직도 오래된 곡물 자루들이 반쯤 쌓여 있었고, 그 틈으로 쥐가 지나다닌 듯한 발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낮은 등불 두 개가 좌우 벽에 걸려 흔들렸다. 그 불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벽 위에서 길게 늘어졌다가 다시 오그라들었다.
첫 번째 하수인의 시체는 사라지듯 부패했다. 손을 대기도 전에 살이 무너지고 뼈가 재처럼 흩어졌다고 했다. 다행히 그전 성벽 근처에서 무사들이 다른 개체 하나를 산 채로 포박해 왔다.
쇠사슬 소리.
무겁게 끌리는 그 소리가 계단을 타고 내려왔을 때,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회백색 피부의 그 존재가 쇠사슬에 묶인 채 웅크리고 있었다. 눈동자는 흐릿한 회색이었다. 눈꺼풀은 반쯤 감긴 채로 움직임이 없었다. 숨을 쉬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고요했다. 다만 그 몸에서 풍기는 냄새, 썩은 흙과 비린내가 뒤섞인 그 냄새만이 그것이 살아 있는 것과 아닌 것의 경계 어딘가에 있음을 알려주었다.
"말해라."
우문 할아범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낮고 서늘했다.
하수인은 미동조차 없었다.
"…배후가 누구냐."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낮게 이를 갈 듯한 소리를 냈다.
드득. 드드득.
뼈와 뼈가 어긋나는 듯한 소리였다.
할아범이 검 끝으로 그 팔뚝을 지그시 눌렀다.
살가죽이 갈라졌다.
피 대신 검은 진액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하수인은 여전히 소리를 내지 않았다.
"다시 묻겠다. 황(黃)이라는 이름을 남기고 도망친 그 개체는 누구의 명을 받았느냐."
하수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그 침묵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등불이 흔들릴 때마다 하수인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가 다르게 일그러졌다. 저것이 무슨 말을 할지, 혹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을지, 그 갈피를 짐작할 수 없었다.
"…혈영교(血影敎)."
낮고 갈라진 목소리였다.
그 이름이 창고 안에 떨어지는 순간, 공기가 한층 무거워진 것 같았다.
"혈영교라니."
취란이 낮게 되물었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나는 그녀의 옆얼굴을 보았다. 등불에 비친 그 낯빛은 평소의 담담함과는 전혀 달랐다.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다시 굳게 다물렸다. 무언가를 삼키려는 듯한 목의 움직임이 보였다.
"…그 이름을 아느냐."
우문 할아범이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예전에, 몇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말을 아꼈다.
하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을 감추려는 듯, 그녀는 소매 속으로 손을 슬며시 밀어 넣었다.
하수인이 낮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쇳소리가 섞인, 사람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갈라진 웃음이었다.
"…황수는… 그저 도구일 뿐. 진짜는… 따로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할아범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나는 그의 손이 검자루를 다시 고쳐 쥐는 것을 보았다.
하수인은 다시 침묵했다.
그 회색 눈동자가 잠시 나를 향했다가, 이내 다시 바닥을 향했다.
할아범이 재차 압박을 가하려는 순간, 그 존재의 몸이 갑자기 검은 안개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몸의 윤곽이 허물어지듯 무너졌다.
쇠사슬만이 텅 빈 채로 바닥에 떨어졌다.
쇠사슬이 돌바닥에 부딪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철컹.
"자결인가."
할아범이 낮게 내뱉었다.
순식간에 그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은 자리에는 검은 재와 같은 얼룩만이 희미하게 남았다.
그 얼룩에서도 여전히 그 비릿한 냄새가 풍겼다.
남은 것은 방금 흘러나온 한 단어, 혈영교.
그리고 취란의 굳어진 표정뿐이었다.
"당신,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취란은 오래도록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등불의 흔들림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스스로를 다잡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열한 살 되던 해였습니다."
마침내 그녀가 낮게 입을 열었다.
"제 가족이 살던 마을이, 황수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그 담담함 속에는, 오랜 세월 동안 눌러 담아온 무언가가 배어 있었다.
"그날, 살아남은 저는 우연히 어떤 자들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그들이 그 이름을 입에 담았습니다. 혈영교."
"…가족을, 모두 잃었단 말이오?"
그녀는 대답 대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담담한 몸짓 뒤에, 얼마나 오랜 세월 눌러 담아온 것이 있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나는 더 묻지 못했다. 그녀의 표정이, 더는 캐묻지 말라는 무언의 신호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로, 저는 이 저택에 흘러들어 왔습니다. 부인께서 저를 받아주셨습니다."
"어머니가?"
"…예. 그리고 언젠가는 그 이름의 뒤를 밝혀내고 싶었습니다."
그녀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림 없이 나를 향했다.
"그 백환을 도련님께 넘긴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였을지 모릅니다."
그 말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백환. 어머니가 남긴 그 물건이, 단순한 유품이 아니라 어쩌면 무언가와 연결된 실마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스쳤다.
우문 할아범이 낮게 신음했다.
"…부인께서 남긴 물건이, 혈영교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군."
그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그 눈빛은 평소의 온화함을 잃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도련님. 그 백환은 반드시 곁에 지니고 계셔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불러올지, 아직 우리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나는 품 속에 넣어둔 백환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차가운 옥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그것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 지하 창고 위쪽에서 저택 종소리가 다시 울렸다.
하지만 이번엔 황수의 습격을 알리는 다급한 타종이 아니었다.
느리고 규칙적인, 손님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댕. 댕. 댕.
그 소리가 지하 창고까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방금 전까지의 긴장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울림이었다.
곧이어 하인 하나가 계단을 뛰어내려왔다.
숨을 몰아쉬며 소리쳤다.
"성주님! 큰 도련님께서… 도성에서 급히 돌아오셨습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이었다.
한 달 넘게 관무로 도성에 나가 있던, 인호 형이 돌아온 것이다.
가슴 한쪽이 갑자기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형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반가움이었다.
하지만 그 반가움도 오래가지 못했다.
하인의 다음 말이 뒤이어 지하 창고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런데… 도련님을 뒤따라온 자들이 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 말에 나는 다시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할아범과 취란의 시선이 동시에 서로를 향했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방금까지 우리가 나누던 혈영교라는 이름이, 다시금 무겁게 창고 안의 공기를 짓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