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이십 년 후, 어느 겨울밤.
하늘이 갈라지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검성(劍聖) 이도훈은 무릎을 꿇은 채로 피를 토했다. 산맥 하나를 갈라놓았던 그의 검은 반 토막이 나 땅에 박혀 있었다. 사방은 온통 잿빛이었다. 하늘도, 땅도, 한때 마을이었던 자리도.
흉수(凶獸)라 불리는 그 존재는 처음부터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몸뚱이만 산봉우리 셋을 합친 크기, 눈 한 번 깜빡이는 사이 마을 하나를 통째로 지워버리는 힘. 인간의 검으로 벨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었을 뿐이다.
쿠구구구—
흉수의 발소리가 대지를 울릴 때마다 도훈의 갈비뼈가 우두둑 소리를 냈다. 이미 세 번이나 부러졌다가 억지로 이어붙인 몸이었다. 왼팔은 감각이 없었고, 오른쪽 눈은 진작 피로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까지인가.'
그는 웃었다. 입가에 흐르는 피와 함께.
'수백 년을 살고도, 이리 허망하게 갈 줄이야.'
수십 년 전, 그가 아직 여덟 살 어린아이였을 때. 사부는 그의 손에 목검을 쥐여 주며 말했었다. 검이란 것은 결국 지키기 위해 드는 것이라고. 달빛이 앞마당을 비추던 그 밤, 사부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도훈아. 검을 드는 이유가 이기기 위함이라면, 언젠가 반드시 진다. 지키기 위함이라면, 지더라도 후회는 없다."
그때는 그 말의 무게를 몰랐다. 이제서야, 갈라진 하늘 아래 무릎을 꿇고서야 알 것 같았다.
'사부님. 저는 지켰습니까.'
대답은 없었다. 대답할 사람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으므로.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잿빛으로 무너지는 하늘이었다. 그 하늘 아래, 그가 지키려 했던 것들이 모두 재가 되어 흩날리고 있었다. 후회는 늦었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의식이 끊기기 직전, 그는 생각했다.
'다시 한번만 기회가 온다면.'
'이번엔.'
"이도훈! 자냐 지금?"
귀청을 때리는 목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형광등 불빛, 칠판, 분필 가루 냄새. 그리고 삼십 명 남짓한 학생들의 눈길이 일제히 그를 향해 있었다.
'......뭐지, 이건.'
도훈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작았다. 마디가 얇고, 굳은살 하나 없이 매끈한 손이었다. 산을 가르던 그 손이 아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두근—
'살아있다. 나, 살아있어?'
교실 안에는 종이 넘기는 소리, 누군가의 낮은 하품 소리, 창밖에서 들려오는 축구공 튀는 소리까지 뒤섞여 있었다. 너무나도 평범한 소음이었다. 그 평범함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도훈, 담임 말 무시하는 거야 지금?"
앞에 선 남자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사십 대 초반, 넥타이를 느슨하게 맨 남자였다. 도훈의 눈이 그 얼굴에 딱 멈췄다.
'......오민석 선생님?'
숨이 턱 막혔다.
'그날, 흉수의 첫 습격에서 죽었던 사람이었거늘.'
분명 기억한다. 이십 년 전, 아니 이십 년 후—시간의 개념이 뒤엉켜 도훈의 머릿속이 잠시 하얘졌다—오민석은 대재앙의 첫 습격에서 학생들을 대피시키다 목숨을 잃었다. 뉴스에서 그 이름 석 자를 보았을 때, 도훈은 그가 자신의 고등학교 담임이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통에, 그런 사소한 인연 따위는 흙먼지처럼 흩어졌으니까.
그런데 지금, 그가 눈앞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짜증 섞인 얼굴로, 넥타이를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기며, 지극히 살아있는 사람의 표정으로.
'살아있어. 저 사람이, 살아있다.'
도훈의 눈시울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뜨거워졌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눈가를 문질렀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잠깐 졸았습니다."
"고3이 벌써 이러면 어떡하니. 수능 세 달도 안 남았어."
옆자리에 앉은 여학생이 킥킥거리며 도훈을 팔꿈치로 찔렀다.
"야, 너 어제 밤새 게임했지."
'게임. 그런 것도 있었지.'
도훈은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고3, 수능."
그는 그 단어들을 곱씹었다.
'그렇다는 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교실 게시판에 붙은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2018년 3월.
숨이 턱 막혔다.
'이십 년 전이다. 정말로, 돌아온 것인가.'
칠판 위 급훈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의 노력이 내일의 나를 만든다.' 흔하디흔한 문구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 여덟 글자가 이상하게도 가슴을 짓눌렀다.
'노력으로 될 일이 아니거늘. 세상이 무너지는 걸 노력으로 막는다니.'
그러나 다음 순간, 도훈은 스스로의 생각을 정정했다.
'아니. 이번엔 다르다. 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노력의 시작이니까.'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도훈은 화장실로 뛰어가 거울을 마주했다.
앳된 얼굴. 여드름 자국 몇 개. 아직 성장이 덜 끝난 몸.
'이도훈, 십팔 세.'
그는 자신의 기억을 더듬었다. 이 몸의 원 주인, 그러니까 지금의 자신이 겪었을 십팔 세의 봄. 고3, 모의고사, 담임의 잔소리. 그 모든 것이 낯설고도 익숙했다.
'수백 년 묵은 혼이 열여덟짜리 몸에 들어앉았으니, 이 얼마나 우스운 꼴인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세면대 모서리를 두 손으로 붙잡고 힘을 줘 보았다. 전생이라면 손끝 하나로 세면대를 통째로 부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세면대가 살짝 흔들렸을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힘도 없다. 몸도, 다 새것이다.'
'하나 웃을 때가 아니다. 이건 기회다.'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서서히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냉정하고, 명료하고, 계산적인 판단이었다.
'흉수의 첫 습격이 언제였더라. 아직 한참 남았다. 이번엔, 미리 안다.'
미래를 안다는 것. 그것이 이번 생에서 그가 가진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무기였다.
'허나 미래를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몸이 있어야 한다. 힘이 있어야 한다.'
도훈은 손바닥을 펼쳐 내려다보았다. 단전에 의식을 집중해 보았다. 전생이라면 손끝에서 실 한 가닥 굵기의 기운이라도 뽑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었다.
'......?'
다시 시도했다. 호흡을 가다듬고, 전생에서 익힌 토납법의 첫 구결을 따라 기운을 끌어올리려 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배꼽 아래 세 치 지점에 의식을 모으고, 그 자리에서 실처럼 가느다란 기운이 피어오르길 기다렸다.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항아리에 물을 채우려 애쓰는 기분이었다.
뒷목이 서늘해졌다.
'이게 무슨.'
세 번, 네 번, 다섯 번을 반복해도 결과는 같았다. 이마에는 식은땀만 배어 나왔다.
그는 거울 속 자신의 눈을 응시했다. 낯선 몸, 낯선 시대, 그리고 낯설게도 텅 빈 단전.
'뭔가 잘못됐다.'
화장실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야, 안에 누구야, 빨리 좀 나와." 도훈은 얼른 숨을 고르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문을 열었다.
종례가 끝나고 교문을 나서는 길, 도훈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기운이 없다. 아니, 정확히는—'
그는 걸으며 주변 공기를 감지하려 애썼다. 전생이라면 눈을 감고도 반경 수십 장 안의 기맥 흐름을 읽어낼 수 있었다. 지금은 그저 매캐한 자동차 매연과 봄바람의 서늘함만 느껴질 뿐이었다. 길가 가로수에 스치는 바람 소리도, 저 멀리 문방구 앞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도, 지극히 평범했다.
'세상에서 영기 자체가 사라진 건가, 아니면 아직 나타나지 않은 건가.'
답은 나중에 찾기로 했다. 지금 급한 건 다른 문제였다.
"야, 이도훈!"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도훈이 돌아보았다. 교복 재킷을 어깨에 걸친 남학생이 뛰어오고 있었다. 훤칠한 키에 여유로운 웃음, 값비싸 보이는 운동화.
'박현우.'
도훈의 눈이 순간 커졌다.
'이 녀석이었지. 그때 그 사건에서.'
기억이 밀려들었다. 미래의 어느 시점, 박현우의 집안이 부동산 사업 확장 과정에서 자금 위기를 겪었고, 그 와중에 박현우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자세한 내막은 몰랐다. 그저 소꿉친구였던 그가 어느 순간부터 소식이 끊겼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기억할 뿐. 뉴스 자막 한 줄로 스쳐 지나갔던 이름, 그것이 전부였다.
'이번엔 다르다.'
도훈의 눈빛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뭘 그렇게 넋 놓고 있냐. 학원 안 가?" 현우가 어깨를 툭 쳤다.
"어, 어. 가야지." 도훈은 애써 태연한 척 웃었다.
"참, 너 오늘 급식 왜 안 먹었어? 담임한테 혼나더니 밥맛도 없냐."
"그냥. 속이 좀 안 좋아서."
"약해 빠져서는." 현우가 웃으며 도훈의 가방끈을 잡아당겼다.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이번에 새로 짓는 오피스텔 대출 엄청 크게 받았대. 나중에 나 용돈 많이 줄 것 같은데?"
'대출.'
도훈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것이 훗날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지금의 현우는 알 리가 없었다.
'그 대출이 결국 집안을 삼켜버렸지. 흉수 습격보다 먼저.'
겉으로는 평범한 고3의 하굣길.
속으로는, 이미 다른 계산이 굴러가고 있었다.
'현우야, 미안하다만.'
'이번 생에 널 좀 이용해야겠구나.'
도훈은 씩 웃으며 현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현우야, 너네 집 진짜 부자냐?"
"어, 왜, 부러워?"
"아니. 그냥, 앞으로 나랑 좀 더 친하게 지내자고."
현우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너 오늘따라 왜 이렇게 다정해?"
"친구끼리 이 정도도 못 하냐."
현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웃어넘겼지만, 도훈의 눈빛 속에 스치는 서늘함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날 밤, 도훈은 방 안에 홀로 앉아 단전을 몇 번이고 두드려보았다.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책상 위에는 원 주인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손때 묻은 문제집, 야한 만화책 몇 권, 벽에 붙은 아이돌 포스터. 그 소소한 일상의 조각들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이 몸의 주인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잠시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도훈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영기가 없는 시대. 그렇다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전생의 기억을 처음부터 되짚어 보았다. 언제부터 영기가 세상에 나타났던가. 흉수의 습격이 시작된 이후였던가, 아니면 그 이전부터 조짐이 있었던가. 뉴스에서, 소문에서, 스쳐 지나갔던 파편들을 하나하나 끌어모아야 했다.
'급할 것 없다. 이번 생에는 시간이 있으니.'
창밖 달빛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도훈은 그 빛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이십 년 전의 달빛도, 어릴 적 사부와 함께 보았던 달빛도, 결국은 같은 달이었을 것이다.
'사부님. 이번엔 지켜 보이겠습니다.'
'이번엔, 절대 놓치지 않는다.'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낡은 다이어리 한 권을 꺼냈다. 원 주인이 쓰던 것이었다. 도훈은 첫 페이지를 펼치고, 그 위에 조심스럽게 글자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흉수, 첫 습격, 년, 월.
날짜를 적는 손이 가늘게 떨렸다. 정확한 날짜가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이 흐릿했다. 스무 해가 넘는 세월을 건너온 기억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그날 뉴스를 좀 더 자세히 봐둘 것을.'
그는 다이어리를 덮고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다. 시간은 있다. 하나씩 맞춰가면 된다.'
그러나 그 순간, 창밖에서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아주 희미한, 그러나 분명한 무언가였다. 전생이라면 무시하고 지나쳤을 만큼 미약한 파동이었지만, 지금의 도훈에게는 그것조차 낯설고도 선명하게 다가왔다.
도훈의 손이 다이어리를 쥔 채로 굳었다.
'......방금, 뭐였지.'
창밖은 그저 고요한 봄밤이었다. 그러나 도훈은 알 수 있었다. 텅 비어 있어야 할 이 세상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이미 깨어나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