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숲의 나무들이 이상했다.
줄기가 푸른빛으로 은은하게 빛났다.
이런 나무는 지구에 없는데.
잎사귀 하나하나가 물속에서 흔들리는 것처럼 일렁였다. 뿌리 근처에서는 옅은 안개 같은 기운이 스며 나왔다. 정신 나간 광경이었다.
생각할 틈도 없었다.
소녀가 이강혁의 팔을 당겼다. 뛰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거인이 완전히 틈을 부수고 나왔다.
나무들을 밀어젖히며 쫓아왔다.
쿠웅. 쿠웅. 쿠웅.
땅이 울릴 때마다 발밑의 흙이 튀어 올랐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압력이 실감 났다. 사람 몸통 세 개는 될 법한 거인의 다리가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왔다.
숲을 가로지르는 속도가 사람보다 훨씬 빨랐다.
이대로는 잡힌다는 계산이 즉시 섰다.
계산은 빨랐다. 몸이 못 따라주는 게 문제였다.
이강혁은 발을 멈추고 숨을 깊게 들이켰다.
미친놈처럼 서 있을 때가 아닌데.
그래도 잠깐은 필요했다.
단전 아래, 오래된 감각이 꿈틀거렸다. 20년 동안 다져온 진기였다. 은퇴 이후로도 매일 새벽 수련을 거른 적이 없었다. 남들은 왜 그렇게 사냐고 물었다.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냥 몸이 굳는 게 싫었을 뿐이었다.
이게 여기서도 되나.
되면 살고, 안 되면 죽는다.
단순한 계산이었다.
시험해볼 시간이었다.
이강혁은 발끝에 진기를 밀어 넣었다.
타앙!
땅을 박차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몸이 순식간에 십여 미터를 날아갔다.
이강혁의 눈이 커졌다.
된다. 이게 되네.
서울에서는 이 정도까지 힘을 낸 적이 없었다. 아니, 낼 필요가 없었다는 게 맞는 말이었다. 도장에서 겨루는 상대들은 죽이려고 덤비지 않았으니까.
몸이 가벼웠다.
근육이 팽창하는 느낌, 시야가 선명해지는 느낌이 동시에 밀려왔다. 나뭇잎 사이로 스치는 바람 한 줄기까지 다 느껴졌다.
이 세계가 진짜 미친 곳이구나.
소녀가 놀란 눈으로 이강혁을 쳐다봤다. 방금 그 도약을 본 것 같았다. 눈이 동그랗게 커져 있었다.
이강혁이 소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소녀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버둥거리는 팔을 눌러 안았다. 체구가 작았다. 무게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미안한데, 이게 더 빨라.
말은 안 통해도 몸으로 보여주면 됐다.
이강혁은 소녀를 옆구리에 낀 채 나무 사이를 질주했다.
뒤에서 거인의 포효가 울렸다.
크아아아아!
소리만으로도 고막이 얼얼했다. 거인의 손이 나무를 통째로 뽑아 던졌다.
굵은 나무 기둥이 회전하며 날아왔다.
이강혁은 몸을 틀어 피했다.
나무가 옆의 다른 나무를 부수며 지나갔다.
우지끈, 콰지직—
부서지는 소리가 등 뒤에서 연달아 터졌다. 파편 몇 조각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저거 맞으면 그냥 죽는 거였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래도 발은 멈추지 않았다.
진기가 다리에 계속 흐르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지치는 느낌이 덜했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는데 다리는 여전히 가벼웠다. 이 세계의 공기 자체가 진기와 맞는 건지, 아니면 그냥 아드레날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나중에 따로 확인해볼 문제였다.
지금은 안 죽는 게 우선이었다.
숲의 경사가 아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앞쪽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강인가.
소녀가 이강혁의 옷깃을 당기며 방향을 가리켰다. 손가락이 정확히 물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있었다.
강을 건너라는 뜻인 것 같았다.
말이 안 통해도 이럴 땐 편했다. 손짓 하나로 다 통했다.
이강혁은 그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발끝에 다시 힘을 모았다.
이번엔 얼마나 나갈지 감이 안 잡혔다. 그래도 해봐야 알 일이었다.
타앙!
강 위로 몸이 솟아올랐다.
물살 위를 밟듯 몇 걸음을 더 내달렸다. 발바닥에 닿는 물의 감촉이 이상하게 단단했다. 마치 젖은 돌을 밟는 느낌이었다.
이게 되네. 이것도 되네.
계속 되는 게 오히려 불안했다. 이렇게 사기적인 힘이 공짜로 굴러다닐 리 없다는 생각이 스쳤다.
반대편 강기슭에 발이 닿는 순간, 뒤에서 거인이 강가에 멈춰 서는 걸 봤다.
거인은 물을 싫어하는 듯 강 앞에서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거대한 발이 물가에서 멈춘 채 부들부들 떨렸다. 마치 강물 자체가 두려운 것처럼 뒷걸음질을 쳤다.
크르르르...
낮은 울음을 흘리며 몸을 돌려 숲으로 사라졌다.
거인의 등이 나무들 사이로 완전히 파묻힐 때까지, 이강혁은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강혁은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폐가 타는 것 같았다. 아무리 진기가 받쳐줘도 숨은 숨이었다.
소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살았네. 일단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억지로 붙잡았다. 지금 주저앉으면 그림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소녀가 이강혁을 올려다봤다.
눈빛에 경계와 호기심이 뒤섞여 있었다. 아직 완전히 믿지는 못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방금 목숨을 구해준 걸 모를 리는 없었다.
그녀가 손으로 자기 가슴을 짚으며 말했다.
하린.
목소리가 낮고 또렷했다. 여자 목소리였다. 이강혁은 그게 이름이라는 걸 짐작했다.
자기 가슴을 짚었다.
강혁.
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음을 다시 곱씹는 듯 입술을 조금 움직였다. 이강혁도 속으로 그 이름을 한 번 되뇌었다.
하린.
서로의 이름만으로도 뭔가 통한 기분이었다.
말은 안 통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지금 필요한 건 대화가 아니라 생존이었다.
이강혁은 주변을 둘러봤다. 강 건너의 숲은 여전히 조용했다. 거인이 완전히 사라진 건지 아니면 그냥 물러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일단은 여기서 좀 쉬어야겠다.
그 순간, 강 건너 숲 저편에서 다시 낮은 진동이 울렸다.
우우우웅—
방금 그 거인의 것이 아니었다.
훨씬 크고, 훨씬 많은 숫자의 발소리였다.
땅을 통해 전해지는 진동이 발바닥까지 올라왔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겹쳐서 만들어내는 울림이었다.
하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방금까지의 경계와 호기심 대신, 다른 표정이 자리 잡았다.
공포였다.
이강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번엔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