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청람학원 후원, 이른 아침.
새벽 공기가 채 가시지 않은 시각이었다.
바람은 동쪽에서 불어와 서쪽으로 흘러갔고, 그 바람을 타고 후원 배롱나무 잎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겸은 그 소리만으로 나무의 위치를, 나무의 크기를, 심지어 어제보다 잎이 몇 장 더 떨어졌는지도 알 수 있었다.
눈을 뜨지 못한 채로 살아온 열여섯 해였다.
그 시간 동안 그는 세상을 코와 귀로 읽는 법을 익혔다.
바람이 불면 어느 나무의 잎이 흔들리는지 알았고, 발소리만 듣고도 누가 다가오는지 구분했다.
걸음의 무게, 보폭의 간격, 신발이 흙을 밟는 방식까지도 그에게는 하나의 문장처럼 읽혔다.
누군가는 그것을 재주라 불렀고, 누군가는 그것을 불쌍한 몸부림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청람학원은 대륙 남부에서 원력(源力)을 가르치는 명문 중 하나였다.
사람의 몸 안에는 원골(源骨)이라는 것이 있고, 이것이 각성하면 원력이라는 기운을 다룰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이 세계의 근본 법칙이었다.
각성한 원골을 갈고닦아 경지에 오르면 지무경(至武境)에 이르고, 그보다 더 높은 곳에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천무경(天武境)이 있다고 했다.
원골 없이는 아무리 뼈를 깎는 수련을 해도 평범한 인간에 머물 뿐이었다.
원골을 각성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삶은 애초에 다른 길을 걸었다.
평범한 이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무인이 될 수 없었고, 원골을 각성한 이들만이 비로소 무의 세계에 발을 들일 자격을 얻었다.
그래서 어느 가문이든, 어느 학원이든, 자식의 원골 각성 여부를 확인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대한 일로 여겨졌다.
유겸은 그 원골을 각성한 몸이었다.
문제는, 각성했음에도 원력이 그의 안에서 단 한 방울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의술사들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학원의 노사들도 고개를 저었다.
원골은 분명 있으나, 그 원골이 잠들어 있는 것처럼 도무지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었다.
"또 저 자식이야."
외문제자 하나가 지나가며 중얼거렸다.
"원골 각성했다고 폐인이 아니게 되는 게 아니었나 보지, 크큭."
옆에 있던 다른 외문제자가 맞장구를 쳤다.
"저러다 죽을 때까지 땔감만 줍다 죽는 거 아니냐."
"쉿, 듣겠다."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눈도 안 보이는데 뭘 어쩌겠어."
유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이미 오래전에 배웠다.
말을 섞으면 조롱이 길어질 뿐이고, 침묵하면 그들도 곧 흥미를 잃고 떠났다.
그것이 그가 삼 년 동안 몸으로 익힌 유일한 생존법이었다.
청람학원은 신분에 따라 외문제자와 내문제자로 나뉘었다.
내문제자는 원력을 실제로 운용할 수 있는 이들, 외문제자는 원골을 각성했으나 아직 낮은 단계에 머문 이들이었다.
내문제자가 되면 학원의 정식 전각에서 무공을 배우고, 좋은 옷을 입고, 삼시 세끼를 걱정 없이 먹었다.
외문제자는 그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으나, 그래도 언젠가는 원력을 끌어올려 내문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유겸은 외문제자였다.
다만 다른 외문제자들과 달리, 그는 몇 년째 단 한 뼘의 원력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동기들이 하나둘 원력의 첫 갈래를 열고 내문으로 올라가는 동안, 유겸은 제자리에 남아 있었다.
아니, 제자리도 아니었다.
그는 점점 더 아래로, 더 구석으로 밀려났다.
그 결함 때문에 유겸에게는 언제나 천역이 맡겨졌다.
마당을 쓸고, 화로에 넣을 나뭇가지를 줍고, 부엌에서 나온 그릇을 씻는 일들.
원력 수련을 받는 대신, 그는 매일 아침 뒷산에 올라 땔감을 모아야 했다.
처음에는 억울했다.
자신도 원골을 각성했는데, 왜 자신만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억울함도 오래가지 않았다.
억울해할 시간에 땔감을 더 모아야 저녁에 얻어먹을 죽이 조금이라도 늘어난다는 것을, 그는 곧 깨달았다.
'스슥, 스슥.'
마른 잎을 밟는 소리가 이어졌다.
유겸은 지팡이 대신 긴 나뭇가지를 짚으며 걸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발밑의 흙이 어떻게 다져졌는지, 바람이 어느 쪽에서 불어오는지로 길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오히려 눈이 보이는 이들보다 더 정확하게, 그는 세상의 결을 읽어냈다.
땅에 떨어진 낙엽이 젖어 있는지 말라 있는지, 그 습기의 정도만으로도 어젯밤 비가 얼마나 내렸는지를 알았다.
나무의 뿌리가 흙 위로 얼마나 튀어나와 있는지도 나뭇가지 끝의 감각으로 미리 짐작하고 피해 걸었다.
그렇게 유겸은 뒷산의 지도를 발과 귀와 코로 그려왔다.
누구도 그려주지 않은 지도였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아무도 그를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그의 허리춤에는 낡은 대나무 바구니가 하나 매달려 있었다.
손잡이가 닳아 반들거리는, 그다지 값나갈 것 없는 물건이었다.
어머니가 약초를 캐던 시절 쓰던 바구니였다.
"이 바구니만 있으면, 겸아. 어디를 가도 굶지 않는다."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그 바구니를 유겸의 손에 쥐여주었다.
목소리가 지금도 선명했다.
낮고 부드러웠으나, 힘든 살림에도 흔들리지 않던 목소리였다.
유겸이 아직 어려서 원골이 각성했는지도 모를 때의 일이었다.
그때는 세상이 이렇게 매정한 곳인 줄 몰랐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산을 오르내리며 약초의 이름을 하나씩 배웠고, 그 시간이 영원할 줄로만 알았다.
어머니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유겸은 그 후로 학원에 맡겨졌다.
남은 것은 바구니 하나뿐이었다.
가끔 유겸은 그 바구니를 코에 가져다 대고 숨을 들이켰다.
오래된 대나무 냄새와, 아주 옛날 스며든 약초 향이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 냄새를 맡을 때마다, 유겸은 자신이 완전히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뒷산에서 나뭇가지를 주우면서도, 틈틈이 약초를 캐 바구니에 담았다.
손끝의 감각으로 잎의 모양과 두께를 익혔고, 향으로 종류를 구분했다.
어떤 잎은 가장자리가 톱니처럼 거칠었고, 어떤 잎은 매끈했다.
어떤 뿌리는 흙 속에서 알알한 냄새를 풍겼고, 어떤 뿌리는 달착지근한 냄새를 풍겼다.
그 미세한 차이들을 유겸은 몇 년에 걸쳐 몸에 새겼다.
학원 약당에 내다 팔면 몇 푼의 돈이 되었고, 그 돈으로 유겸은 겨우 하루를 버텼다.
약당의 늙은 관리인은 유겸이 캐 온 약초의 질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값을 후하게 쳐주는 일은 없었다.
그저 던지듯 몇 푼을 내밀 뿐이었다.
그래도 유겸은 그것마저 감사했다.
"오늘도 잡초 뜯으러 가나."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목소리만으로도 유겸은 그가 누군지 알았다.
외문제자 박대환, 학원 안에서는 박뚱보라 불리는 자였다.
덩치가 크고 목소리가 걸걸했으며, 늘 자신보다 약한 이를 골라 시비를 걸었다.
박대환의 발소리는 유난히 무거웠다.
땅을 짚을 때마다 흙이 눌리는 소리가 다른 이들보다 크게 들렸다.
유겸은 그 발소리가 다가올 때마다 몸이 저절로 긴장한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용건이 있으신가요."
유겸이 조용히 물었다.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다.
"용건? 크큭, 용건은 없고 그냥 궁금해서. 눈도 안 보이는 놈이 그 잡풀 담은 바구니는 뭐 그렇게 소중히 껴안고 다니나."
유겸의 손이 저도 모르게 바구니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그냥, 제게는 필요한 물건입니다."
"필요한 물건이라. 필요한 건 원력이지, 그런 잡풀 바구니가 아니잖아."
박대환이 킬킬거리며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내가 듣기로는, 너 원골 각성한 지 벌써 삼 년째라던데. 삼 년 동안 원력 한 방울도 못 끌어올린 놈, 그게 각성한 거냐 아니면 그냥 몸에 흠집 하나 난 거냐."
주변에서 몇몇의 웃음소리가 터졌다.
유겸의 뒤를 따라오던 다른 외문제자들이었다.
그들은 애초에 이 광경을 구경하려고 슬그머니 따라붙은 참이었다.
"박형, 그러다 진짜 그 바구니 뺏기겠수다, 크크."
"뺏어봐야 잡풀밖에 안 들었는데 뭐."
"아니 그게 재밌는 거 아니냐. 눈도 안 보이는 놈이 저거 하나 소중하게 껴안고 다니는 거."
유겸은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발밑의 흙을 다시 짚으며 자세를 낮췄다.
바구니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갔다.
"필요하시다면, 지나가시지요."
유겸이 낮게 말했다.
"저는 뒷산에 가야 합니다."
"허, 이 새끼 말투 봐라. 지나가시지요? 존댓말은 배웠나 보네."
박대환의 발소리가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그 바구니, 이리 줘봐. 뭐가 들었는지 구경이나 하자."
유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드러내는 순간, 저들은 더 신이 나서 달려들 것을 알았다.
"이건 제 어머니의 물건입니다."
"어머니? 흥, 여기 어머니 없는 놈이 어디 있나. 다들 부모 버리고 온 놈들 아니면 버려진 놈들이지."
그 말에 유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곧, 그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켜고 다시 평온한 낯을 만들었다.
'스륵.'
발소리가 유겸의 바로 앞에서 멈췄다.
박대환의 두꺼운 손이 바구니를 향해 뻗어오는 것을, 유겸은 옷깃이 흔들리는 소리와 다가오는 손의 온기로 짐작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멀리서, 낮게 울리는 진동이 발밑을 타고 전해졌다.
처음에는 그저 지나가는 짐마차의 흔들림인가 싶었다.
그러나 진동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연속해서, 점점 더 크게, 마치 땅 자체가 무언가에 얻어맞는 듯한 울림이 이어졌다.
박대환의 손이 멈췄다.
"...뭐야, 저거."
주변의 웃음소리도 뚝 끊겼다.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발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큰일 났다! 정문에! 정문에 지금—"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 한 번 거대한 울림이 대지를 흔들었다.
'쿵!'
유겸은 그 소리의 방향과 크기로, 그것이 결코 평범한 소란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학원 전체가 지어진 이래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종류의 진동이었다.
그날 아침, 유겸은 몰랐다.
뒷산의 마른 잎 밟는 소리와 박대환의 걸걸한 웃음소리 사이로, 학원 정문에서 이미 큰 소란이 시작되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소란의 중심에는, 이 학원의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존재가 서 있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