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박대환의 손이 유겸의 어깨를 밀었다.
'퍽!'
유겸은 뒤로 몇 걸음 밀려났다.
허리춤의 바구니가 흔들리며 안에 든 약초 몇 잎이 흩어졌다.
마른 잎사귀들이 흙바닥 위에 흩날리듯 떨어졌다.
"어이구, 잡풀 흘렸네."
박대환이 낄낄거리며 그 위를 밟았다.
'뻑!'
으깨진 약초에서 진한 풀 냄새가 올라왔다.
유겸은 반사적으로 몸을 숙여 흩어진 약초를 그러모았다.
손끝에 흙이 묻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하나씩, 하나씩. 손끝의 감각만으로 잎을 찾아내 바구니에 담았다.
"놔두세요."
"놔두라고? 크큭, 이 자식 말투 좀 봐라. 폐인 새끼가 존댓말은 쓸 줄 아네."
박대환의 목소리에 낄낄거림이 섞여 있었다.
주변에서 몇몇이 따라 웃었다.
박대환이 유겸의 뒷목을 잡아 세웠다.
목이 뻣뻣하게 당겨졌다.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너 그 원골, 진짜 각성한 거 맞아?"
유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손끝으로 바구니의 테두리를 더듬었다.
"각성했으면 원력을 좀 보여봐야지. 그냥 눈뜬 봉사 흉내만 내지 말고."
주변에서 또 웃음소리가 터졌다.
누군가는 "봉사 흉내래" 하며 야유했다.
"저는 눈을 뜬 적이 없습니다."
유겸이 담담하게 답했다.
순간 박대환의 표정이 굳었다.
말장난처럼 던진 말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되받아친 것이었다.
주변의 웃음소리가 잠시 멈췄다.
"이 자식이, 지금 나 놀리나?"
박대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아니었으면 됐고."
박대환이 침을 뱉듯 내뱉으며 유겸의 뒷목을 놓았다.
목이 자유로워졌지만 유겸은 여전히 몸을 낮춘 채였다.
박대환의 눈이 유겸의 허리춤에 매달린 바구니로 향했다.
낡은 대나무 바구니였다.
오랫동안 손을 탄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그 바구니, 어디서 났어?"
"제 것입니다."
"네 것이면 어쩔 건데. 이리 내봐."
박대환의 손이 바구니를 향해 뻗었다.
유겸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세상에 남은 단 하나의 물건.
손가락 마디마다 새겨진 감촉을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쥐여준 것이 바로 이 바구니였다.
"안 됩니다."
유겸이 바구니를 감싸안았다.
두 팔로 완전히 껴안듯이.
"안 된다니? 크큭, 폐인 새끼가 소유욕은 있네."
박대환이 유겸의 손목을 낚아채 비틀었다.
'우득'
"으윽..."
유겸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렀다.
손목이 저릿하게 아팠지만, 그는 바구니를 놓지 않았다.
아픔보다 더 강한 것이 그를 붙잡고 있었다.
"놔, 안 그러면 이거 밟아버린다."
박대환이 바구니를 발로 겨눴다.
유겸은 그 발이 어디쯤에 있는지, 소리와 흔들림의 감각으로 알아챘다.
몸을 비틀어 바구니를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 새끼가 끝까지..."
박대환의 얼굴에 붉은 기가 올랐다.
이마에 핏대가 섰다.
주변에 몰려든 다른 외문제자들이 히죽거리며 구경했다.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야, 그냥 뺏어버려."
"저놈 어차피 앞도 안 보이잖아."
"저러다 진짜 밟겠는데."
구경꾼들의 목소리가 조각조각 유겸의 귀에 박혔다.
그 목소리들에는 어떤 동정도, 걱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즐기는 어조였다.
유겸은 그들의 침묵이, 아니 그들의 웅성거림이 익숙했다.
원골이 각성했다는 것만으로 그는 이 학원에 남을 수 있었지만, 원력을 쓸 수 없다는 결함은 그를 완전한 무리 밖의 존재로 만들었다.
동정도, 연대도 그에게는 없었다.
오직 구경거리만이 있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이런 상황이 그에게는 이미 일상의 한 조각이 되어 있었다.
"진짜 밟아버릴 거야."
박대환이 발을 들어 올렸다.
신발 밑창이 유겸의 시야 밖에서 그림자처럼 다가왔다.
유겸은 바구니를 끌어안고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이 바구니만 있으면, 겸아. 어디를 가도 굶지 않는다."
그 말을 하던 어머니의 손길이, 마른 손등의 온기가 아직도 선명했다.
병상에 누워서도 웃으며 그 말을 반복했던 어머니.
유겸은 그 목소리를 붙잡듯, 눈물 대신 어금니를 꽉 물었다.
'퍽!'
박대환의 발이 유겸의 등을 툭 건드렸다.
아직 본격적인 힘이 실리지 않은, 시험 삼아 던지는 듯한 발질이었다.
"자, 잠깐만!"
그때 누군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외문제자 한 명이 뛰어와 박대환의 어깨를 잡았다.
숨이 가쁜 듯 어깨가 들썩였다.
"뭐야, 놔."
박대환이 짜증스레 그 손을 뿌리쳤다.
"저기, 정문에... 정문에 지금 난리 났어!"
박대환이 미간을 찌푸렸다.
"뭔 난리?"
"몰라, 원장님까지 나오셨대! 육명봉 원장님이!"
원장의 이름이 나오자 주변의 술렁임이 커졌다.
구경하던 외문제자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번져나갔다.
"진짜?"
"원장님이 왜?"
"누가 왔대?"
청람학원의 원장, 육명봉은 태어날 때부터 원골이 각성해 있던 극히 드문 인물이었다.
열여섯이 되기도 전에 지무경에 이르렀다는 그의 이력은, 학원 안에서 전설처럼 통했다.
평생 학원 밖으로 나가는 일조차 드물다는 그가, 손님을 맞이하러 직접 정문까지 나온다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학원의 오랜 역사 속에서도 몇 번 없었던 일이라고, 나이 든 사범들조차 수군거릴 정도였다.
박대환의 시선이 유겸에게서 정문 쪽으로 옮겨갔다.
그 눈빛에는 아직 아쉬움이 남아 있었지만, 호기심이 그것을 압도하고 있었다.
"쳇. 재수 없게 방해받았네."
그가 발을 내려놓았다.
유겸은 그 순간에도 바구니를 놓지 않았다.
팔에 힘이 빠질 만큼 세게 껴안은 채로.
"오늘은 넘어가주는 거다."
박대환이 침을 뱉듯 말하고 몸을 돌렸다.
땅바닥에 침이 튀는 소리가 났다.
다른 외문제자들도 웅성거리며 정문 쪽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발소리들이 하나둘 멀어져 갔다.
누군가는 뛰어가며 소리쳤다.
"먼저 가서 자리 잡자!"
그 말에 몇 명이 더 빠른 걸음으로 뒤를 쫓았다.
순식간에 주변이 텅 비었다.
방금까지 사람들로 북적이던 자리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유겸은 그 자리에 잠시 앉아, 흩어진 숨을 고르며 흙 묻은 약초를 다시 바구니에 담았다.
손목이 아팠지만 참을 만했다.
손목을 가볍게 주무르며 통증을 가늠했다.
부러진 것은 아니었다.
그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지."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원장까지 직접 나와 맞이할 정도의 손님이라면, 그것이 이 학원의 질서에 어떤 파문을 일으킬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학원에 입학한 이래로 원장의 얼굴을 직접 본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 사람이 스스로 정문까지 걸어 나갔다는 사실 자체가 이례적이었다.
귀를 기울이자, 저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낯선 발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느리고 절제된, 그러나 묘하게 거스름 없는 걸음.
마치 세상 모든 것이 자신에게 길을 내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발소리였다.
그 발소리에는 어떤 서두름도, 흔들림도 없었다.
땅을 딛는 소리마저 절도 있게 규칙적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도 그 발소리만은 또렷하게 구분되어 들려왔다.
마치 주변의 소음이 오히려 그 발소리를 위해 길을 터주는 것 같았다.
유겸은 그 발소리에서 알 수 없는 서늘함을 느꼈다.
피부가 저릿할 정도의 낯선 감각이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느껴본 적 없는 종류의 위압감이었다.
누군가가 다가온다는 사실만으로 이런 감각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바구니를 끌어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머니의 유품을 지키던 그 손이, 이번에는 다른 이유로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놓을 존재의 첫 발소리였다는 것을,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