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노예인데 보물을 주웠다니

1화

겨울바람이 방씨세가의 내원 훈련장을 가로지르며 마른 흙바닥 위의 핏자국을 서서히 얼려가고 있었는데, 그 핏자국의 주인인 이서준은 무릎을 꿇은 채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있었다. 열여덟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의 등짝은 이미 대나무 채의 흔적으로 벌겋게 갈라져 있었으며, 목덜미에는 노예임을 증명하는 낙인이 얼어붙은 땀과 함께 번들거렸다. 훈련장을 둘러싼 담장 위로는 까마귀 두 마리가 날아와 앉았는데, 그것들은 마치 이 광경이 낯설지 않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준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 정도로 벌써 지쳤단 말이냐." 방준혁이 목검을 어깨에 걸친 채 내려다보며 던진 말에는 조롱과 짜증이 뒤섞여 있었는데, 열여섯의 나이에도 벌써 1품9계에 이른 그의 눈빛은 또래의 것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냉담했다. 방씨세가의 2공자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최상급 무공서를 손에 쥐고 자란 그에게, 노예 하나의 숨이 끊어지고 이어지는 것은 겨울날 아침 서리가 맺히고 녹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이서준은 대답 대신 이를 악물며 다시 일어섰으나,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중심을 잡을 수 없었다. 손끝은 이미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으며, 무릎 안쪽에서부터 올라오는 통증이 척추를 타고 뒤통수까지 퍼졌다. 그럼에도 그는 일어서야 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쓰러진 채로 남으면, 다음에 돌아오는 것은 매질이 아니라 죽음일 것임을 지난 삼 년의 노예 생활이 그에게 가르쳐주었기 때문이었다. 쾅! 방준혁의 목검이 다시 그의 옆구리를 후려치자, 그는 신음을 삼키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흙바닥에 뺨이 닿는 순간 차가운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고, 입안에서는 비릿한 피맛이 번졌다. 서준은 그 와중에도 눈만은 감지 않았는데, 그것은 반항이 아니라 이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한, 어쩌면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어떤 오기 같은 것이었다. "노예 주제에 숨은 아직 붙어 있는 게 다행인 줄 알아라." 방준혁은 그렇게 내뱉고는 흥미를 잃은 듯 몸을 돌려 내원 쪽으로 걸어갔고, 그의 발걸음을 따라 하인 몇이 황급히 뒤를 쫓았다. 훈련장에는 그와 얼어붙은 바람만이 남았으며, 담장 위에서 지켜보던 까마귀들도 어느새 자취를 감춘 뒤였다. 이서준은 한참을 그 자리에 쓰러져 있다가, 겨우 몸을 일으켜 훈련장 뒤편의 버려진 창고로 기어들어갔다. 그곳은 오래전 방씨세가가 쓰던 병기고였으나 지금은 잡초와 부서진 나무상자만이 쌓여 있는 곳이었는데, 아무도 찾지 않는 그 그늘이야말로 그가 상처를 숨기고 정신을 놓을 수 있는 유일한 자리였다. 부서진 나무상자 틈으로 들어온 바람이 낡은 짚더미를 흔들었고, 그 소리가 마치 누군가의 숨소리처럼 들려 서준은 잠시 귀를 기울였으나 이내 지쳐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으며 의식이 흐려지는 순간, 그는 또다시 그 꿈속으로 빨려들어갔다. 하얗게 얼어붙은 설원 위에, 여덟 척은 되어 보이는 거구의 사내가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었고, 그 곁에서 절세의 미인이 시신을 끌어안은 채 천천히 춤을 추고 있었다. 여인의 옷자락이 눈발 속에서 나부낄 때마다 붉은 피의 흔적이 하얀 눈 위에 꽃처럼 번져나갔으며, 그녀의 발끝이 지나는 자리마다 얼음꽃이 피어올랐다가 이내 스러졌다. 여인의 눈은 슬픔조차 넘어선 무표정으로 얼어붙어 있었으며, 그녀가 입술을 움직여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서준의 손끝이 무언가 딱딱하고 차가운 것에 닿았다. 눈을 떴을 때, 그의 손안에는 낡고 검푸른 표지의 서책 한 권이 쥐어져 있었다.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표지에는 희미하게 '천연보전天然寶典'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서준은 놀라 서책을 떨어뜨릴 뻔했으나, 손이 저절로 그것을 붙잡았다. 마치 서책이 그의 손을 붙잡은 것인지, 그가 서책을 붙잡은 것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그 접촉은 자연스러웠다. 표지를 스치는 순간 그의 눈앞에 허공의 글자들이 떠올랐다. 『에너지값 : 0』 『보유 무공 : 없음』 『보유 도구 : 없음』 서준은 숨이 턱 막혔다. 몸속 어딘가에서 낯선 온기가 퍼져나가며, 마치 오래도록 얼어 있던 뼈마디가 녹아내리는 듯한 감각이 스쳤다. 그것은 두려움과 동시에 설명할 수 없는 갈망이었다. 그는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며 허공에 떠오른 글자들을 다시 확인했으나,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은 채 여전히 그 자리에 선명하게 떠 있었다. 손을 뻗어 글자를 만져보려 했을 때, 그의 손가락은 그저 허공을 스칠 뿐이었고, 그 감각 없음이 오히려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서준에게 일러주는 듯했다. 창고 밖에서는 눈발이 다시 흩날리기 시작했고, 그 눈발 사이로 방준혁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낡은 창고의 틈새로 스며드는 바람은 점점 거세지고 있었으며, 그 바람 소리에 섞여 멀리서 개 짖는 소리와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는 듯도 했다. 서준은 순간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끼며 서책을 품속 깊이 감추었다. 만약 이것이 방씨세가의 누군가에게 발각된다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은 매질이 아니라 목숨 그 자체일 것이었다. 그는 숨을 죽인 채 창고의 틈새로 밖을 살폈으나, 다행히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고 오직 눈발만이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쌓여가고 있었다. 서준은 다시 서책을 품속에서 꺼내어 그 낡은 표지를 손끝으로 어루만졌는데, 그 순간에도 허공의 글자들은 여전히 그의 눈앞에 남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이것이 자신의 처지를 바꿀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서준은 떨치지 못했고, 동시에 이 알 수 없는 물건의 정체가 그를 구원할지, 아니면 더 깊은 파멸로 이끌지 알 수 없다는 불안감이 그의 가슴 한복판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날 밤, 창고 지붕 위로 쌓이는 눈은 점점 두꺼워져만 갔고, 그 무게만큼이나 서준의 마음속에도 무언가 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조용히 쌓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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