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떨어지는 동안, 낯선 기억 하나가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총성이 울렸다. 뒷골목이었다. 화면 너머의 랭킹 1위, 게임 최강자로 불리던 남자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이도현. 그것이 그 남자의 이름이었다.
등 뒤에서 칼이 들어왔다. 배신이었다. 그는 그렇게 죽었다.
그날 밤 함께 있던 자는 셋이었다. 함께 던전을 클리어했던 동료들, 수백 시간을 함께 보낸 이들이었다. 랭킹 보상금을 나누는 자리였다. 그중 하나가 웃으며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었다. 그리고 그 손이 등을 찌른 손이 되었다.
'믿음이란 게 애초에 값이 없었나.' 죽어가면서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후회는 아니었다. 그저 확인이었다.
두 개의 죽음이 어둠 속에서 겹쳐졌다.
하나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소년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구에서 살해당한 사내의 것이었다.
바람 소리가 귓가에서 갈라졌다. 몸은 하나였지만 떨어지는 감각은 두 겹이었다.
그리고 그 둘은, 하나의 몸속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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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을 때 하늘이 보였다. 좁고 낮은 하늘이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빛이 부서진 유리처럼 흩어져 있었다.
혼령림 바닥, 나무뿌리 사이에 몸이 처박혀 있었다.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팠지만, 그는 알았다. 이 아픔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손끝부터 움직여 보았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낯선 감촉이었다. 손톱 모양도, 손등의 굳은살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몸이 바뀌었다.' 그는 그렇게 결론부터 내렸다. 원인을 따지는 것은 나중이었다.
'선진우.' 그는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이었던 자의 기억이 뒤늦게 밀려왔다. 폐물이라는 낙인, 족형제들의 살의, 그리고 아버지의 미안한 눈빛까지.
기억은 파편으로 왔다. 순서 없이, 두서없이. 열두 살 때 재능 감별식에서 무혼이 없다는 판정을 받던 순간, 이후 문파 내에서 받은 조롱, 뒤에서 밀치던 손, 어제 아침 절벽 위에서 등을 밀어낸 그 손까지.
'이건... 내가 아는 세상이 아니다.' 그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검을 쓰는 세계였다. 무혼이라는 것이 존재했고, 그것이 없으면 사람 대접을 못 받는 세계였다. 게임 속 스탯창 따위는 없었지만, 대신 사람의 눈빛과 태도가 그 사람의 값을 매기고 있었다.
하지만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것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새로운 기회였다.
게임 속에서 수백 번 죽고 되살아난 경험이 지금의 그를 냉정하게 만들었다.
로그아웃이 없는 세계였다. 리스폰도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사실이 그를 침착하게 했다. '이번엔 되돌릴 수 없다. 그러니 더 정확하게 움직여야 한다.'
동요할 시간은 없었다. 살아야 했다.
손을 뻗어 나무뿌리를 짚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갈비뼈 몇 대가 부러진 듯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옆구리에서 불이 났다.
'참아라.' 그는 스스로에게 명령했다. 통증은 익숙했다. 게임 속에서 컨트롤러를 던질 만큼 아픈 순간은 없었지만, 정신적인 고통은 이보다 더한 적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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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이 지났다. 그 사흘 동안 그는 나무뿌리 사이에서 빗물을 받아 마셨고, 벌레를 씹어 삼켰다. 맛을 느낄 여유는 없었다. 배 속에 뭐라도 채워야 한다는 판단만 있었다.
낮에는 눈을 감고 체온을 아꼈고, 밤에는 짐승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선진우의 기억 속에 남은 이 숲의 지형을 되짚었다. 방향은 알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사흘째 되던 날, 문파의 수색대가 절벽 아래까지 내려왔다.
발소리가 여러 갈래로 들렸다. 낙엽을 밟는 소리, 나뭇가지를 헤치는 소리.
한 명이 진우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여기, 살아 있습니다!"
놀란 기색은 오래가지 않았다.
수색대장이 다가와 상태를 확인하고 짧게 말했다.
"용케 안 죽었군.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그 말투엔 안도가 아니라 실망이 배어 있었다.
수색대장은 진우의 상태를 이리저리 살피며 혀를 찼다. 상처를 확인하는 손길에도 조심스러움이 없었다. 물건을 다루듯 무심했다.
"들것 가져와라. 어차피 죽지도 않을 목숨이면 데려가야지."
들려오는 대화들이 이도현의 귀에 그대로 박혔다.
"폐물이 절벽에서 떨어졌다더니, 결국 살아 돌아오는군. 명줄 하나는 길어."
"차라리 죽었으면 문파 체면은 지켰을 텐데."
"셋째 공자님이 밀었다는 소문이 있던데, 뭐 아무렴 어떤가. 저런 게 살아 있어봤자 문파에 짐이지."
웃음소리가 뒤섞였다. 누구 하나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진우가 듣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도현은 그 웃음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슬퍼할 시간도 아깝다.' 그는 그렇게 판단했다.
대신 그 웃음소리 하나하나를 기억 속에 새겨 넣었다. 목소리의 높낮이, 말투의 억양, 누가 먼저 웃었고 누가 뒤이어 웃었는지까지.
'언젠가 이 목록에 이름을 하나씩 지워나갈 거다.' 그는 조용히 그렇게 새겼다. 복수라는 말은 아직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미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들것에 실려 이동하는 동안에도 눈은 감은 채였다. 흔들리는 몸의 리듬 속에서 그는 선진우의 기억을 계속 뒤졌다. 아버지, 족장이라는 자의 얼굴. 자애로우면서도 어딘가 무력한 인상이었다.
족장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을 때, 그는 진우를 끌어안으며 울었다.
"살아 있었구나. 살아 있었어...." 족장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었다.
족장의 손이 진우의 등을 몇 번이고 두드렸다. 눈물이 진우의 뺨에 떨어졌다. 그 온도는 분명 따뜻했다.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진 족장의 침묵이 더 많은 것을 말해주었다.
족형제들이 그를 절벽으로 밀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족장은 그들을 벌하지 않았다.
"문파 안의 갈등을 함부로 들추면 더 큰 화를 부른다." 족장은 그렇게만 말했다.
그 말 뒤에 숨은 계산이 이도현의 눈에는 뻔히 보였다. 족형제들의 뒤에는 각자의 가문이 있었고, 그 가문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 족장에게는 자식 하나의 목숨보다 우선이었다.
"아버지, 그들이 절 죽이려 했습니다." 진우의 입에서, 아니 이도현의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시험이었다. 이 사람이 어디까지 움직일 수 있는지 가늠하려는.
족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그 흔들림은 결심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진우야... 지금은 조용히 있는 게 낫다. 몸부터 회복해라." 그렇게 말하며 족장은 시선을 피했다.
이도현은 그 말을 들으며 확신했다.
이 세계에서 자신을 지켜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게임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팀원이라는 이름표를 달았던 자들이 결국 등에 칼을 꽂았다. 이 세계의 핏줄이라는 이름표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렇다면 내가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 그는 조용히 그렇게 다짐했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다. 누구도 믿지 않는다. 그것이 두 번의 죽음이 그에게 가르쳐준 유일한 교훈이었다.
복수는 그날부터, 그의 유일한 목표가 되었다.
방으로 옮겨진 뒤, 이도현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폐물이라 불리던 몸, 무혼조차 없다는 판정을 받은 몸. 그러나 이 세계의 상식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게임 속에서도 처음엔 아무것도 없던 캐릭터가 결국 최강이 되었던 것처럼.
그의 눈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빛났다.
'다시 시작이다.' 그는 그렇게 속으로 되뇌었다. 그리고 그 순간, 창밖에서 낯선 그림자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