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빙의했더니 무림 최약체였다

3화

보름이 지나서야 진우는 겨우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처음 사흘은 침상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힘들었다. 절벽에서 떨어지며 부러진 갈비뼈가 숨을 쉴 때마다 욱신거렸고, 왼쪽 다리는 힘을 주면 후들거렸다. 그러나 몸이 아픈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낯선 감각이었다. 손을 뻗으면 익숙하지 않은 손가락이 움직였고, 거울에 비친 얼굴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몸은 여전히 선진우의 것이었으나, 그 안을 채운 정신은 완전히 이도현의 것이었다. 그는 매일 밤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기는 연습을 했다. 처음엔 세 걸음도 걷지 못하고 쓰러졌다. 몸이 이렇게 되어보니 새삼 절실했다. '몸에 익은 습관이 없으면 아무리 정신이 멀쩡해도 소용이 없다.' 그는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섰다. 걸음걸이 하나, 눈빛 하나까지 예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채는 이는 없었다. 하인들도, 문파의 어른들도 그의 방문을 지나칠 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무도 폐물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도현은 그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관심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감시받지 않는다는 뜻이었고, 감시받지 않는다는 것은 시간을 벌 수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은 약하다. 하지만 약함을 숨길 수 있다면, 그것 역시 무기다.' 아버지처럼 여겼던 스승의 가르침이 문득 떠올랐다. 힘을 감추는 것도 힘을 기르는 방법 중 하나라고, 그는 전생에서 그렇게 배운 적이 있었다. +++ 몸이 어느 정도 움직이게 되자, 이도현은 우선 장로원을 찾아가기로 했다. 족형제들의 살인미수를 정식으로 알리는 것이 순서였다. 절벽 아래서 자신을 밀어 떨어뜨린 세 사람의 얼굴을, 그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선지목의 비웃음, 그 옆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두 사촌의 표정까지. '증거도 있고, 목격자도 있다. 정상적인 문파라면 처벌해야 한다.' 그는 그렇게 계산했다. 적어도 전생에서 몸담았던 문파에서는 그것이 상식이었다. 장로원 앞에 이르렀을 때, 문지기가 그를 막아섰다. 창을 옆으로 늘어뜨린 채 무료한 얼굴로 서 있던 사내였다. "무슨 일로 왔느냐." 문지기의 말투엔 하대가 섞여 있었다. "족장의 아들입니다. 장로님들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도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문지기가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피식 웃었다. 걸음걸이가 여전히 불편해 보이는 소년, 옷자락에 아직 채 낫지 않은 상처의 흔적이 비치는 몸. "그 폐물 공자로군. 절벽에서 떨어져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보구나." 문지기의 어조엔 조롱이 짙었다. "들여보내 주십시오." 이도현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들여보내 달라, 들여보내 달라... 여기가 뭐 아무나 드나드는 저잣거리인 줄 아느냐?" 문지기가 창을 슬쩍 세우며 위협하듯 말했다. 이도현은 물러서지 않았다. 대신 한 발 더 다가섰다. "제가 살인미수를 당했습니다. 이것이 저잣거리의 소란과 같은 취급을 받아야 할 일입니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지만, 그 속엔 흔들림이 없었다. 문지기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눈앞의 소년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으나, 곧 그것을 무시했다. 폐물의 말투가 좀 바뀌었다고 해서 폐물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기다려라. 안에 전해는 주겠다." 문지기는 마지못해 안쪽으로 사라졌다. +++ 한참을 기다린 뒤, 겨우 말단 장로 한 명이 나왔다. 옷차림은 화려했으나 표정엔 귀찮음이 가득했다. 이런 일로 자신의 시간을 뺏기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일이냐. 짧게 말해라." 장로의 눈빛엔 이미 결론이 정해져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이도현은 사건을 있는 그대로 설명했다. 흥분하지 않고, 감정을 섞지 않고, 마치 문서를 읽듯 사실만을 나열했다. 선지목을 비롯한 족형제 셋이 자신을 혼령림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렸다는 사실을. 그들이 나눈 대화, 자신이 떨어지기 직전 보았던 표정, 그리고 그 이후 문파 내에서 자신에게 벌어진 조치들까지. 장로는 다 듣고 나서 짧게 웃었다. 그 웃음엔 조금의 동정도 없었다. "증인이 있느냐?" 장로가 물었다. "그들 스스로 자백하는 걸 들을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도현이 말을 잇으려 했다. "그럼 없는 것이지." 장로가 말을 잘랐다. "공자는 그저 발을 헛디뎌 떨어진 것으로 이미 정리되었다. 새삼스레 없는 죄를 만들어 문파를 시끄럽게 만들지 마라." 장로의 목소리엔 짜증이 섞였다. "발을 헛디뎌 절벽 아래로 떨어졌는데, 등에 손바닥 자국이 남았다면 그것도 우연입니까." 이도현이 다시 물었다. 장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눈살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몸을 돌렸다. "이미 결론이 난 일이다. 더 이상 이 일로 장로원을 찾아오지 마라. 두 번째는 무례로 간주하겠다." 장로는 그렇게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이도현은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 발치의 돌바닥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이도현은 그 순간 깨달았다. 이 문파에서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힘 없는 자의 말은 애초에 들어줄 가치가 없는 취급을 받는다는 것을. 전생, 그가 몸담았던 문파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승은 늘 말했다. '무림에서 진실은 강자의 입에서 나올 때만 진실이 된다. 약자의 진실은 소음일 뿐이다.' 그때는 그 말을 흘려들었으나, 이제는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렇다면 스스로 증명하는 수밖에 없다.' 그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 돌아오는 길, 그는 문파 어른들 사이에서 오가는 소문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나이 든 문파 원로 둘이 나누는 대화였다. "족장님도 젊었을 적엔 대단했다지만, 요즘은 그저 이름값뿐이라더군." 한 노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문 장로들이 실권을 다 쥐고 있잖나. 족장은 얼굴마담이지." 다른 노인이 맞장구를 쳤다. "쉿, 목소리 낮추게. 누가 듣기라도 하면..." 첫 번째 노인이 주변을 살피며 속삭였다. "누가 듣겠나. 폐물 공자 하나 지나갈 뿐인데." 두 번째 노인이 이도현을 흘깃 보고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이도현은 걸음을 멈췄다. 발밑의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아버지, 선 족장의 명성이 그가 알던 것과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처음 이 몸에 정신이 들어왔을 때, 그는 선 족장을 든든한 뒷배로 여겼다. 족장의 아들이라면 적어도 문파 내에서 함부로 다뤄지지 않을 것이라 계산했었다. 그러나 그 계산은 틀렸다. '아버지조차 이 문파에서 힘이 없다.' 그는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의지할 언덕이라 믿었던 것이, 실은 처음부터 허상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의 처지를 되짚었다. 몸은 폐물, 아버지는 허울뿐인 족장, 문파는 진실보다 힘을 우선하는 곳. 세 가지 조건 중 어느 하나도 그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그 밤, 그는 홀로 앉아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강해져야 한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창밖으로 달빛이 스며들었다. 이도현은 손바닥을 펼쳐 들여다보았다. 아직 굳지 않은 상처 자국이 남은 손, 힘 한 줌 제대로 쥐지 못하는 손.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 그가 쌓았던 것은 재능이 아니라 시간과 방법이었다는 것을. 몸이 다시 시작이라면, 방법 역시 다시 쌓으면 될 일이었다. '몸이 약하다고 마음까지 약해질 이유는 없다.' 스승의 가르침이 다시 떠올랐다. '강함은 처음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 쌓아 올리는 것이다.' 그는 그 밤 내내 눈을 감지 않았다. 대신 지난 삶에서 익혔던 무공의 구결들을 하나씩 되짚었다. 몸이 따라주지 않아도 정신은 앞서 나갈 수 있었다. +++ 해가 뜨기 무섭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다음으로 향한 곳은 외문 제자들이 모이는 훈련장이었다. 장로원처럼 격식과 위세로 가득한 곳이 아니라, 흙바닥에 목검 부딪는 소리와 젊은 제자들의 거친 숨소리로 채워진 곳이었다. 정보는 위가 아니라, 아래에서 먼저 흘러나온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도 그러했다. 문파의 진짜 소식은 장로들의 밀실이 아니라, 하급 제자들의 잡담 속에 먼저 스며들었다. 훈련장 어귀에 이르자, 이도현은 걸음을 멈추고 잠시 안쪽을 살폈다. 목검을 부딧는 소리, 낮게 주고받는 웃음소리, 그리고 그 사이로 간간이 들리는 낯익은 이름들. 선지목의 이름도 그 안에 섞여 있었다. 그는 옷깃을 여미고 훈련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다시 한번, 그 무관심이 그에겐 오히려 기회였다.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자리에서, 나는 가장 많은 것을 들을 수 있다.' 이도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훈련장 한쪽 그늘 아래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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