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뿌리가 나를 옭아맸다.
세계수(世界樹)의 뿌리 한 가닥, 굵기만 따지면 은하 하나를 통째로 감아도 남을 크기였다. 그 뿌리가, 지금, 나라는 존재를 칭칭 감고 있었다. 존재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이게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몸도 없고, 형태도 없고, 그냥 '나'라는 개념 덩어리가 통째로 조여지는 느낌이었으니까.
'좆됐다.'
솔직히 이 상황에서 이보다 정확한 표현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무한 허공(無限虛空)을 떠돌던 신물(神物)이었고, 세계 태아(世界胎兒) 하나를 품에 안은 죄로 이 지경까지 쫓겨왔다. 뿌리는 압박해왔다.
우드득.
존재의 경계가 짓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다는 표현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눈도 없고 귀도 없으니까. 그런데도 들렸다. 씨발, 이게 말이 되나. 아니 애초에 '말이 된다'는 기준 자체가 나한테 적용되는 게 맞나 싶다. 나는 언어를 쓰는 존재도 아니었고, 소리를 듣는 기관도 없었다.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 뼈가 갈리는 것 같은 그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고 있었다. 우스운 노릇이다.
세계수는 말이 없었다. 원래 말을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냥 뻗고, 감고, 삼켰다. 초식동물이 풀을 뜯듯이, 그렇게 불안정한 세계들을 뜯어 먹는 놈이었다. 밥그릇 관리가 그렇게 철저한 줄 알았으면 애초에 근처에도 안 갔을 텐데. 그리고 지금 그 거대한 아가리 앞에 놓인 게 나였다.
'죽는 건가.'
이상하게도 무섭다기보다는 억울했다. 나는 겨우, 겨우 시작한 참이었다. 무한 허공에서 눈을 뜬 지 — 아니, 눈은 없으니까 의식을 회복한 지 얼마나 됐다고. 세계 태아 하나 주워 먹은 게 그렇게 큰 죄였나. 뭐, 죄라면 죄겠지. 세계수 입장에서는 자기 밥그릇에 손댄 셈이니까. 근데 나도 배가 고팠단 말이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허기가 지는 그 기분을 세계수 저 나무 새끼가 알기나 할까.
뿌리가 한층 더 조여들었다.
빠득.
존재의 결이 갈라지는 느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손톱 밑에 못이 파고드는 감각을 우주 규모로 확장한 것 같다고 하면 조금은 비슷할까. 아니, 그것보다 더 지독했다. 손톱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가 결대로 쪼개지는, 마치 통나무가 도끼날을 따라 쫙 갈라지듯 그런 느낌. 나는 발버둥쳤다. 발도 없는 주제에 발버둥이라니, 우습지만 사실이다. 존재 전체로 몸부림쳤다. 이걸 몸부림이라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만.
'놔라, 이 나무 새끼야.'
물론 세계수가 내 말을 들을 리 없었다. 대화가 통하는 상대였으면 애초에 이 지경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나는 계속 버텼다. 버틴다는 표현도 웃기다. 실제로 내가 하고 있는 건 그냥 조여지는 걸 느끼며 욕이나 하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순간, 아주 짧은 찰나, 나는 내가 처음 눈을 떴던 순간을 떠올렸다.
아니, 정확히는 '눈을 떴다'는 표현조차 사치스러운 순간이었다. 그건 그냥 무(無)에서 갑자기 '나'라는 자각이 생겨난 순간이었다. 지구에서 죽었던 기억의 파편들이 둥둥 떠다니는 와중에, 나는 이도훈(李道勳)이라는 이름 석 자만 붙잡고 있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흐릿했다. 부모가 있었는지, 친구가 있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심지어 내가 몇 살에 죽었는지도 몰랐다. 그냥 '이도훈'이라는 세 글자만, 마치 침몰하는 배 위에서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부표처럼, 그것만 선명했다.
'그래, 그때부터 이야기해야겠구나.'
뿌리가 조여드는 지금 이 순간에, 나는 왜 이런 한가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아마도 이게 죽음 직전의 마지막 발악인 모양이다. 인간들 말로 주마등이라던가. 나는 인간도 아니고 말도 아니지만, 뭐, 어쨌든 비슷한 걸 겪고 있는 게 확실했다. 죽기 직전에 지나온 삶을 되짚어 본다더니, 나는 삶이랄 것도 별로 없는데 뭘 그리 되짚을 게 있다고. 그런데도 자꾸 그 첫 순간이 떠올랐다. 마치 뭔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는 듯이.
뿌리가 완전히 나를 감싸는 순간, 시야가 — 시야라고 할 게 있다면 — 완전히 암전됐다.
...
...
...
그리고 나는, 아주 오래전 그 무한 허공의 첫 순간으로 돌아가 있었다.
깜깜했다. 아니, 깜깜하다는 말도 사치였다. 어둠조차 없는, 그냥 아무것도 없는 상태. 그 속에서 '나'라는 자각 하나가 불쑥, 마치 물 위에 거품 하나가 떠오르듯 그렇게 생겨났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다시 한번, 처음처럼 이도훈이라는 세 글자를 떠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