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검기(劍氣)가 허공을 갈랐다. 노검수(老劍手)의 백발이 바람에 흩날렸고, 흰 수염 아래로 드러난 입매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늙은이 주제에 손속 한번 매섭네.' 나는 형체 없는 몸을 늘여 그 궤적에서 비껴났다.
스릉—
검기가 스쳐 지나간 자리, 산자락의 바위 하나가 두부처럼 갈라졌다. 그걸 보는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저게 나였으면 어떻게 됐을까 - 생각하다가, 아니, 나는 몸이 없는데 무슨 등골이냐, 하고 스스로 헛웃음을 삼켰다. 감각은 있는데 몸은 없다. 이 지랄맞은 존재 방식은 아직도 적응이 안 됐다.
주변을 둘러보니 노검수 뒤로 대여섯 명이 더 진을 치고 있었다. 하나같이 검을 뽑아 들고 나를 에워싼 모양새였다. '떼거리로 몰려와서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그들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진법(陣法)까지 갖춰놓은 걸 보니 애초에 나 하나 잡으려고 작정하고 온 모양이었다.
"마물(魔物)이 감히 검기를 피하다니."
노검수가 낮게 읊조렸다. 그 목소리엔 놀람보다 확신이 짙었다. 이미 나를 뭔가로 규정해버린 말투였다. '마물이라... 그래, 편한 대로 불러라.' 나는 그 순간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저들이 나를 '마물'이라 부르는 순간, 나는 정말 마물이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이름이 실체를 만든다는 건 이런 걸까.
옆에 서 있던 젊은 검수 하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사부님, 저것이 정말 소문의 그 존재입니까? 산 하나를 통째로 삼켰다는."
"말이 많다." 노검수가 짧게 일축했다. 그 짧은 대꾸에 젊은 검수는 입을 다물었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나를 향해 날카롭게 박혀 있었다. '삼켰다니, 남 말 하듯 하네. 니들이 직접 겪어보지도 않았으면서.' 나는 그 생각을 떨쳐내며 흡수한 세계태아(世界胎兒)의 존재를 더듬었다. 여전히 희끄무레한 백지 같은 것이 내 중심에 웅크리고 있었다. 아무 색도, 결도 없었다. 이 녀석이 자라기 전엔 나도 별수 없다.
노검수의 검이 다시 허공을 갈랐다. 이번엔 궤적이 셋으로 갈라졌다. 삼재검(三才劍)이라 불릴 법한 초식이었다. 나는 몸을 비산시켜 흩어졌다. 형체가 없다는 게 이럴 때는 축복이었다. 검기는 허공을 갈랐을 뿐, 나를 베지 못했다.
"허어."
노검수가 처음으로 미간을 좁혔다. 흩어졌던 나는 다시 한 점으로 모여들며 그의 등 뒤를 노렸다. '이때다.' 나는 그의 기맥(氣脈) 한 줄기를 움켜쥐었다. 형체 없는 손이 있을 리 없지만, 나는 어느샌가 그의 진기(眞氣) 흐름을 붙잡는 법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감각처럼, 손에 잡히지도 않는 것을 잡는 요령이 몸에, 아니 몸도 없는 이 존재 어딘가에 각인되어 있었다.
노검수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크윽!"
뒤에서 지켜보던 다른 이들의 검이 일제히 나를 향해 쏟아졌다.
챙, 챙, 챙—
연이은 파공음이 귓속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두드렸다. 아프지는 않았다. 다만 흩어질 뿐이었다. 나는 산산이 흩어졌다가 다시 뭉치기를 반복했다. 이게 얼마나 갈까. 나는 세지도 못했다. 몇 번을 흩어졌다가 뭉쳤는지, 뭉칠 때마다 아까보다 조금씩 늦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일까. '설마 이러다 그냥 못 뭉치는 거 아니야.' 불길한 생각이 스쳤지만, 애써 무시했다.
"놓치지 마라!" 누군가 외쳤다. "포위망을 좁혀라!"
검수들이 진형을 바꾸며 서서히 거리를 좁혀왔다. 검기가 사방에서 얽히며 나를 가두는 형국이었다. 마치 그물처럼, 촘촘하게. '이거 좀 곤란한데.' 나는 흩어진 채로 그들의 검기 사이 빈틈을 찾았다. 있었다. 아주 좁지만, 분명히 있었다.
노검수가 숨을 고르며 나를 노려봤다.
"네놈은 대체 무엇이냐."
목소리에 처음으로 피로가 섞여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형체 없는 것을 벤다는 게 얼마나 헛수고인지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입도 없었지만, 있었어도 안 했을 거다. '내가 뭔지 나도 모르는데 니가 어떻게 알아.' 다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저들이 나를 정의(定義)하려 들수록, 나는 점점 더 좁은 틀에 갇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건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예감이었다.
그리고 그 좁은 틀 너머로, 나는 처음으로 이들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나를 죽이려는 게 아니라면— 저 백발 노검수의 손끝이 왜 자꾸 내 중심, 그 희끄무레한 세계태아 쪽을 향하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