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세계를 삼키기로 했다

4화

쿵. 뭔가에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나는 존재의 형태를 처음으로 '느꼈다'. 이곳엔 위아래가 있었다. 하늘이 있었고 땅이 있었다. 바람이 불었고, 공기 중에는 뭔가 오묘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여긴... 뭐야.' 나는 어리둥절했다. 세계수의 뿌리로부터 도망쳐 필사적으로 뛰어든 곳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어느 산자락 위에 떠 있는 형체 없는 기운 덩어리 같은 존재로 존재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건 없었지만—눈이 없으니까—그 세계의 결을 통해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온몸이 하나의 촉각으로 바뀐 느낌이었달까. 바람이 스치면 그 결을 따라 흐름이 읽혔고, 땅에서 올라오는 지기(地氣)의 두께까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이거 진짜 몸이 없는 거 맞아? 근데 왜 이렇게 생생해.' 움직여보려 했다. 팔을 뻗는다는 감각도, 다리를 딛는다는 감각도 없었지만, '의지'만으로 위치가 조금씩 밀려나는 게 느껴졌다. 마치 물 위에 뜬 기름방울이 흐름 따라 흘러가듯이. 신기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했다. 이곳은 후에 천명계(天命界)라고 불리게 되는 세계였다. 무술이라는 것이 발달한 세계, 인간과 흡사한 지성체들이 검을 쥐고 기(氣)를 다루며 서로 죽고 죽이는 세계. '무협지 세계관인가, 이거.' 지구인이었던 나로서는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검이니, 내공이니 하는 개념들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물론 확신은 못 했다. 그냥 그런 냄새가 났다. 마치 오래전에 읽었던 소설의 한 페이지가 눈앞에 펼쳐진 듯한,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그리운 감각. 나는 우선 숨을 골랐다. 숨을 쉬는 존재는 아니지만, 그 표현이 제일 어울렸다. 세계수의 뿌리가 이 세계까지 뻗어오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최소한 아직은. 뒤를 돌아본다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했지만, 그래도 뭔가 등 뒤가—등이 없는데도—서늘한 느낌이 계속 남아 있었다. '살았다... 인가.' 안도의 한숨이 나올 뻔했지만, 그 안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 세계에도 나를 느끼는 존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산 아래 어딘가에서, 여러 개의 기척이 동시에 나를 향해 쏠렸다. 하나가 아니었다. 둘도 아니었다. 최소 열 개는 넘는 강렬한 시선이 나를 관통했다. 마치 수십 개의 바늘이 동시에 내 존재의 결을 찌르는 느낌이었다. 그중 몇몇은 유독 날카로웠는데, 아마도 그게 소위 '고수'라는 자들이겠거니 짐작이 갔다. '이런 씨발.' 감춰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몸을 웅크리듯—형체도 없으면서 웅크린다는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어떻게든 존재감을 줄여보려 했다. 소용없었다. 나는 이 세계에 처음 진입한 이물질이었고, 이 세계의 지성체들에게 그건 즉각적으로 감지되는 이물감이었나 보다. 마치 맑은 물속에 떨어진 먹물 한 방울처럼, 숨으려 해도 숨어지지가 않았다. 곧이어, 저 아래에서 사람 같은 형체들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셋, 다섯, 여덟... 계속해서 늘어났다. 하나같이 손에 검을 쥐고, 몸에서 시퍼런 기운을 뿜어내며. 옷자락이 바람에 펄럭였고, 그 아래로 드러난 눈빛들은 하나같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그들의 눈은 정확히 내가 있는 방향, 형체도 없는 나를 겨냥하고 있었다. '저 새끼들, 지금 나 보이는 거야?' 분명 나는 형체가 없는 기운 덩어리였다. 그런데 이 세계의 강자들에겐 그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느껴지는 거거나. 둘 중 뭐가 됐든 결과는 똑같았다—나는 발각됐고, 도망칠 곳도 마땅치 않았다. 선두에 선 자가 검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백발의 노인이었다. 수염이 허옇게 세었지만, 뿜어내는 기운만큼은 젊은이 못지않게 매서웠다. "천외(天外)의 마물(魔物)이 침입했다! 잡아라!" 뒤따르던 자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검기가 사방에서 번뜩였다. 마물이라니. 나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방금 세계수한테서 겨우 도망쳐 왔는데, 이번엔 마물 취급을 받게 생겼다. 인생, 아니 사후생(死後生)이란 게 참 만만치가 않다. 세계수 밑에서도 쫓겨나고 여기서도 쫓기는 신세라니, 나도 참 팔자 한번 기구하다 싶었다. 나는 판단해야 했다. 싸울지, 도망칠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을지. 그런데 그 순간, 가장 앞서 날아오르던 노인의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이 정확히 내가 있는 자리를 향해 짓쳐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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