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다음 날 정오, 폐사찰 마당에는 사람이 늘어서 있었다.
간밤에 잠을 설쳤다. 몸속에서 뭔가 계속 웅웅거리는 느낌 때문이었는데, 눌러도 눌러도 가라앉지 않는 진동 같았다. 아침 해가 뜨자마자 유하 신왕이 문 앞에 서서 나를 불렀고, 나는 반쯤 감긴 눈으로 마당까지 끌려 나왔다.
마당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유하 신왕, 설화 신왕, 그리고 처음 보는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
키가 크고, 갑옷 대신 은은한 청색 도포를 걸친, 눈빛이 유난히 형형한 사람이었다. 도포 자락이 바람도 없는데 살짝살짝 움직였다. 마치 도포 안쪽에서 뭔가가 계속 지지직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랬다.
"천뢰 신왕이십니다."
유하 신왕이 소개했다.
천뢰 신왕이라 불린 사람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픽 웃었다. 그 웃음이 묘하게 사람을 깔아보는 종류였다.
"이게 신존님이 지목한 그 소년이라고?"
말투가 거칠었다. 존댓말 같은 건 아예 없었다.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도 모르는데 저렇게 나온다는 건, 최소한 저 사람 기준에서는 내가 한참 아래라는 뜻일 거다.
"…네, 그런데요."
일단 대답은 존댓말로 했다. 속으로는 아니 나이도 모르는데 반말은 좀 무례하지 않나 싶었지만, 상대가 신왕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으니 굳이 시비를 걸 이유는 없었다.
"패기는 있네."
비웃는 건지 칭찬하는 건지 애매했다. 목소리 톤이 너무 평평해서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설화 신왕이 마당 한가운데로 나서며 손을 들었다. 손끝에서 서늘한 기운이 뻗어 나갔고, 허공에 반투명한 결계가 펼쳐졌다. 마치 유리 돔 같은 형태였다. 크기는 대략 이 마당의 절반쯤, 안쪽에서 보면 어디로도 도망칠 곳이 없어 보였다.
"시험의 규칙을 설명하겠습니다."
서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설화 신왕은 늘 이런 식이었다. 존댓말을 쓰지만 온도가 하나도 없는, 사무적인 존댓말.
"첫째, 이 결계 안에서 천뢰 신왕의 신기 뇌천신극과 대적합니다."
뇌천신극. 그 이름을 듣자 목소리가 몸속에서 다시 반응했다. 뭔가 익숙하다는 듯, 혹은 경계한다는 듯 미세하게 떨리는 느낌이었다.
"둘째, 시간은 백 호흡입니다. 그 안에 결계를 벗어나거나, 신기를 견뎌내면 통과입니다."
백 호흡이라니. 숨 백 번 쉬는 시간이 대체 몇 분인지 감이 안 왔다. 짧게 느껴질 수도 있고, 엄청 길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셋째, 죽지는 않습니다. 다만 다칠 수는 있습니다."
다칠 수는 있다는 말을 저렇게 태연하게 하는 거, 진짜 너무한 거 아닌가. 마치 소풍 가서 넘어질 수도 있다는 얘기하듯이 말하고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죽지는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다치는 건 걱정 안 되나 보네, 이 목소리는. 죽음만 아니면 부러지든 찢어지든 상관없다는 태도가 지금 이 순간 제일 얄미웠다.
"저기, 저 진짜 이거 처음이라고요. 뭘 어떻게 하는지도 몰라요."
정말로 몰랐다. 어제 손끝에서 금빛이 나왔던 것도 얼떨결에 일어난 일이었고, 그걸 다시 부르는 방법 같은 건 배운 적이 없었다. 매뉴얼도 없고, 튜토리얼도 없었다. 그냥 던져놓고 살아남으라는 식이었다.
"그건 상관없습니다."
설화 신왕이 짧게 답했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었다.
"자격이 있다면, 몸이 알아서 반응할 겁니다."
자격이 있다면, 이라는 말이 좀 걸렸다. 없으면 어떻게 되는 건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물어봐도 좋은 대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천뢰 신왕이 신기를 뽑아들었다.
푸른 창 형태의 무기였다. 창끝에서 벼락 같은 빛이 지지직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귀에 닿을 때마다 살갗이 저릿저릿했다. 마치 정전기가 계속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
"긴장 풀어, 애송이. 살살 해줄 테니까."
말과 동시에 창끝이 번쩍였다.
콰아앙!
벼락이 그대로 나를 향해 떨어졌다.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머리로는 아무 생각도 못 했는데 손이 저절로 앞으로 뻗어나갔다. 손끝에서 그날 그 금빛이 다시 피어올랐다.
번쩍!
벼락과 금빛이 정면으로 부딪혔다.
귀가 먹먹해졌다. 마치 머리 바로 옆에서 폭발이 터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몸이 뒤로 튕겨나갔다. 발이 땅에서 떨어지고, 등이 결계 벽에 부딪히는 순간, 오히려 이상한 감각이 들었다.
마치 몸속 어딘가에서 뭔가가 깨어나는 느낌.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감각이 등뼈를 타고 올라왔다. 아파야 정상인데 아프다는 감각보다 그 이상한 느낌이 더 크게 자리 잡았다.
[…이건.]
목소리가 처음으로 말을 멈췄다.
"뭐가요? 왜 그래요?"
대답이 없었다. 평소라면 뭐라도 한마디씩 하던 목소리가, 지금은 완전히 침묵이었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불안했다.
천뢰 신왕이 다음 벼락을 준비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창끝의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순간 멈추더니, 그가 나를 다시 살펴보는 눈치였다.
"…뭐야, 이 반응."
그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웃음기가 사라졌다. 방금까지 애송이라고 놀리던 그의 표정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설화 신왕도 결계 밖에서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저 사람이 저런 표정 짓는 것도 처음 봤다.
"저거, 신력 파장이 이상합니다."
"이상하다니요."
유하 신왕이 다급히 물었다.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흑마 제존의 마기와… 파장이 흡사합니다."
그 한마디에 마당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결계 안에 서 있었다. 손끝에서는 아직도 금빛이 흐르고 있었다. 다만 그 금빛 사이사이로, 아주 옅게, 검은 실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눈이 피곤해서 보이는 잔상인가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눈을 비벼도 그 검은 실은 사라지지 않았다. 금빛 안에서 천천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저기, 이거 왜 이래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유하 신왕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나를 보고 있었고, 설화 신왕은 여전히 결계 너머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두 사람 다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데, 그 말을 꺼내기가 두려운 것처럼 보였다.
천뢰 신왕이 신기를 고쳐 잡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손에 쥔 창끝의 벼락이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신존님이 죽음으로 지목한 게… 흑마의 씨앗이었다는 건가."
결계 안, 내 손끝에서 흐르던 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마치 그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